비평/contemporary
벽 앞의 생, 그리고 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들 2023년 9월 6일-2024년 2월 25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가 정연두의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백년 여행기’ 전시가 진행되는 가운데 작품 중 하나인 (2023)에 영감을 받아 작곡된 4개의 창작곡이 2023년 10월 4일 및 10월 11일 이 설치된 부스 안에서 초연되었다. 관객을 만난 음악은 각각 비올라, 클라리넷, 첼로, 콘트라베이스 독주를 위한 것으로, 네 곡에 걸쳐 총 40여 분간 공연되었다. 비올라에서부터 콘트라베이스에 이르는 연주 순서는 악기의 음역이 점차 확장되는 느낌을 동반하며 공연 전체를 일관된 느낌으로 이끌었다. 분명 정연두 작가의 은 그 자체로 상당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 앞에 비올리스트, 클라..
복합 미디어 작품 ‘Juxtaposition of Macro Cosmos’ 2022년 12월 16일(금) ~ 2022년 12월 17일(토) 국립극장 하늘극장 ‘Juxtaposition(병치)’는 작곡가 이현민이 시리즈로 선보이고 있는 ‘Macro Cosmos’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작곡가는 병치를 “두 가지 이상의 것을 한 곳에 나란히 두거나 설치하는” 것으로 보고 다양한 미디어를 동시에 제시했을 때 관객이 이를 ‘인식’하는 행위에 집중한다. 50분가량의 공연 전체가 하나의 음악으로서, 원형의 무대 위에는 스크린과 소량의 객석이 설치되었다. 비올리스트 라세원과 세 명의 무용수(최지원, 민경원, 전혜정)가 등장하며, 공간 전체를 활용하는 음향세팅과 조명이 특징적이다. 강렬한 연출로 진행되는 50분 동안의..
1877년 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하는 기술이 처음으로 발명됐고 1898년에는 자기magnetic녹음을 활용한 테이프 녹음 기술이, 1927년에는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싱어》가 관객을 만났다. 구체음악Musique concrète이 1940년대에, 전자음악electronic music이 1950년대에 등장했으며, 최초의 랩톱 컴퓨터가 1981년 판매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2021년은 소리를 기계로 매개하는 핵심적인 기술이 발달한지 150여년, 개인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 된 지 40여년이 더 지난 먼 미래다. 전자음악은 그동안 무엇이 달라졌고, 어떤 것이 지속되고 있는가? 그 안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여전히 있는가? 전자음악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기술’과 ‘매개방식’을 전면에 드러내기에, 20..
현대음악은 얼마나 먼가? 그리고 얼마나 또 가까운가? 2021년 11월 27일(토)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음렬주의’라는 말이 너무나 어려운 현대음악을 지칭하는 것 같아 지레 겁을 먹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마련한 ‘미래를 여는 12개의 음: 음렬주의’를 들으며 깨닫게 된 점은 그 반대다. 다양한 현대음악의 사조 중 의외로 명확한 음악적 외형을 갖고 있으며 청취가 수월한 것이 ‘음렬음악’이며, 그렇기에 음렬로 작곡된 몇몇 곡은 충분히 청취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 이날 연주됐던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의 곡은 음고 및 선율을 ‘음렬’로 제한한 상태에서 리듬적인 면을 부각시켰으며, 리스트와 하우어 그리고 장지현의 곡은 음렬이 만들어내는 화성적 색채를 강조했다. 한편 메..
현대음악을 읽는 새로운 관점과 방식들 2021년 6월 29일(화)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작곡가 락헨만과 리게티는 ‘현대음악’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함께 서술되지만, 이 둘의 양식적 차이는 힙합과 그레고리안 성가 만큼이나 멀다. 또한 현대음악은 조성음악과 달리 청취의 즐거움이 한정적이며, 그 안에는 수십 가지의 미학과 작곡방식이 혼재한다. 따라서 ‘현대음악’과 가장 어울리는 단어로 ‘렉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2년에 걸쳐 시리즈로 진행하고 있는 ‘현대음악 렉처 콘서트’가 꾸준히 관객을 모으며 성황리에 진행 중인 이유 중 하나다 이날 공연된 렉처 콘서트 V의 주제는 ‘세상의 모든 소리: 소음과 음향’이었다. 특히 이날 공연은 총 7회에 걸쳐 진행될 렉처 콘서트 전체의 의의를 상기시..
2021년 12월 13일 한남동 일신홀에서 박정은(1986~)의 두 번째 개인 작곡발표회가 열렸다. 독주에서 오중주까지 악기 편성이 다양했고, 총 다섯 곡 중 세 곡이 초연이었다. 각각의 곡마다 중점적으로 쓰인 주요 아이디어나 연주기법 등이 달랐지만, 몇몇 곡을 교차하며 나타나는 작곡가 특유의 음악 어법이 비교적 또렷했다. 특히 피아노 독주곡과 타악기 독주곡이 연주자의 비르투오소한 면모를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하나의 그룹으로 인식됐고, 삼중주는 음향이 회화적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사중주와 오중주는 펄스를 중심으로 음향 블록이 나열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그룹으로 묶일 수 있었다. 이외에도 오래된 테크놀로지를 무대 위에 등장시킨다는 점, 일상적이면서도 재기발랄한 물건을 활용해 특수주법이나 프리페어드를 시도한..
지금, 여기의 새로운 음악경험 2021년 10월 28일(목)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2021 서울국제음악제는 코로나 19로 얼룩졌던 긴 시간을 지나, 이제는 다시 약동하고자 하는 음악계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특히 ‘신비로운 놀이동산’이라는 타이틀로 열렸던 28일의 실내악 공연에서는 브람스(J. Brahms)와 드뷔시(C. Debussy)의 작품에 대한 재해석과 함께 남상봉 작곡가의 ‘플루트,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타악기, 피아노를 위한 기묘한 놀이공원’이 위촉‧초연되었다. 익숙한 곡에서는 참신한 경험을, 신작을 통해서는 동시대의 현실을 성찰하게 만든 레퍼토리로서, 지금‧여기에서 행해질 수 있는 새로운 음악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했다는 점에서 값진 시간이었다. 새롭게 다가온 브람스와 드뷔시 브람..
최근 현대음악에서 발견되는 재현의 몇몇 양상들 최근 작곡되는 한국 현대음악의 특징 중 하나는 상당수의 곡이 재현적인 양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작곡가의 연령이나 작곡가의 평소 작곡어법과 상관없이 실내악 분야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현상으로서, 2021년 9월 7일 대한민국 실내악 작곡제전의 일신홀 무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창회, 창연악회, 뮤지콘, 소리목, 창악회에서 각기 추천된 다섯 곡과 2020년 파안생명나무작곡가로 선정되어 작품발표의 기회를 얻은 박정은의 작품이 모두 표제를 갖는 재현적인 성격으로 관객을 만났다. 재현적인 현대음악이란, 기본적으로는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작곡가의 의지로 볼 수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작곡가의 음악어법은 각기 천차만별이기에, 청중의 입장에서 현대음악..
음악적 표현주의에 대한 심층적인 체험, 그리고 그 너머의 사유 2020년 6월 21일(일) 오후 5시 LG아트센터, 화음챔버오케스트라 음악사에 등장하는 표현주의(expressionism)의 뜻을 암기해본 이는 많지만, 이 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본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연주자에게는 까다로운 악곡이며 청중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저 듣기 싫은 현대음악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날 음악회에서 표현주의의 대표적 작곡가로 불리는 쇤베르크, 베르크의 대곡(大曲)들이 뛰어난 악단에 의해 실연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이날 음악회는 송주호 음악평론가의 렉처와 함께 진행됐으며, 하이든이 작곡한 질풍노도 시기의 작품이 함께 연주됐고 서유라 작곡가의 신작이 발표됐다. 그..
듣고 이해하는 즐거움, 미니멀 음악 2020년 5월 24일(일) 오후 5시 LG아트센터 오리지널 미니멀리스트라 불리는 글래스와 라이히, 그리고 바로크 시대의 파헬벨과 19세기의 사티. 활동했던 시대가 다르며 지역적으로도 먼 이들의 음악을 ‘미니멀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을까? 이 음악들을 한꺼번에 관통하는 ‘미니멀적 속성’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파헬벨과 사티를 ‘미니멀 음악’이라는 관점에서 청취했을 때 청중이 얻을 수 있는 통찰은 무엇인가? 그리고 라이히와 존 아담스가 ‘미국’의 미니멀리스트로서 다른 음악과 구분되는 지점이 있는가? ‘렉처콘서트’로 기획된 이날 음악회는 이와 같은 다양한 질문을 제기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에 대한 답이 객석에 앉은 청중의 수만큼 다채로웠을 수는 있을지..
에코챔버를 독해하는 다양한 방식 2019년 11월 29일(금) 오후 7시 / 30일(토) 오후 3시 대안공간 루프, 화음 프로젝트 아카데미 사운드이펙트서울2019의 전시가 대안공간 루프에서 진행되는 가운데, 화음 프로젝트 아카데미의 작곡가들이 ‘에코챔버’를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였다. 에코챔버란 최근의 디지털 환경을 은유하는 용어로, 인터넷을 이용하는 개인이 자신의 검색기록, 구매내역, 위치 등을 기반으로 하는 선별된 정보만을 접하면서, 결국 편향된 사고로 구성된 각자의 ‘버블’ 즉 ‘에코챔버’ 안에 갇히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언뜻 ‘에코챔버’를 주제로 음악을 만드는 것은 꽤 까다로워 보인다. 하지만 ‘에코챔버’는 애초에 “공명, 잔향, 반복, 기억, 자기 반사, 확인 편향” 등으로 확장될 여지가 있..
현악오케스트라 자체 레퍼토리 계발의 가장 좋은 사례 하나의 악단이 긴 세월 유지되려면, 그리고 이들이 자신만의 색깔을 갖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서로 다른 묘안을 제시하겠지만, 2019년 11월 24일 화음(畵音)의 정기연주회를 본 청중이라면 이에 대한 답을 ‘악단 고유의 자체 레퍼토리 계발’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편곡’과 ‘창작곡의 위촉 초연’ 그리고 음악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스토리텔링적 선곡’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이 긴 시간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재확인시켜줬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안성민 작곡가가 편곡한 프란츠 모차르트(F. X. Mozart)의 그리고 에르완 리샤(Erwan Richard)가 편곡한 쇼스..
퍼포먼스의 다양한 층위들 작곡가와 연주자의 입장에서 ‘퍼포먼스’(performance)라는 단어는 너무도 흔하기에, 이 말이 가진 함의를 짐작하기에 오히려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이 개념은 다양한 단계의 음악활동을 지칭하며, 최근 연극 및 미디어연구 분야에서 새롭게 조망되고 있는 연구 주제이기도 하다. 특히 연극계에서는 형식주의적 접근과 구분되는 ‘퍼포먼스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20세기 후반 생겨났다. 이에 따르면 퍼포먼스란 “무엇인가 행하는 것으로서의 액션들, 혹은 액션의 주체로서의 인간과 상관관계를 맺고”있는 것이며, “재현도구로서의 육체와, 현재의 액션으로부터 기인하는 시간성과 공간성을 포함”하는 것이다. 한편 퍼포먼스라는 개념을 음악에 한정했을 때에는, 연주자의 연주행위 혹은 연주 그 자체,..
현대음악의 재연에 관한 몇몇 기록들 ‘실내악 작곡제전’은 작곡가협회의 산하단체에서 한번씩 연주되었던 작품들을 모아 연주곡목을 꾸린다. 따라서 실내악 작곡제전의 리뷰는 특정 작품의 재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공간이기도 하다. 이에 본 글에서는 2018년 5월 9일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에서 열렸던 ‘2018 실내악 작곡제전 II’의 리뷰를 진행하되 이 음악들의 ‘재연’(再演)이라는 측면에 집중하고자 한다. 다만 이날 음악회에서 발표된 공모작(임주광) 및 ‘재연’이라는 카테고리로 묶기 어려운 몇몇 작품들에 대해서는 인상 깊었던 순간을 꼽아 기록해 보고자 한다. 박지수의 은 필자가 ‘순간의 시간성’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던 작품이다. 필자는 이 작품이 “수평적이기보다는 수직적인 타격에 기반”..
음악이 탄생하는 긴 여정 중 어딘가 서초동에 위치한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연습실이 연초부터 북적였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2018년 ‘화음오작교아카데미’를 신설했고, 이를 위해 세 명의 젊은 작곡가 김신, 이설민, 김재덕, 이들의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와 지휘자, 그리고 화음 전속작곡가 백영은, 배동진 및 평론가 송주호, 서주원, 이민희가 모인 참이었다. 연주자들은 4일에 걸쳐 젊은 작곡가의 곡을 리허설하고 녹음했으며 많은 이가 이 과정을 지켜봤다. 매 리허설마다 음악의 색깔이 미묘하게 달라졌기에 마지막 날 녹음된 음원은 시시각각 변하는 음악의 다채로운 면면 중 단 한 순간을 포착하게 되었다. 모든 음악은 작곡가의 아이디어가 악보로, 그리고 악보가 연주자의 해석을 거쳐 여러 번 리허설되고 청취되는 ‘음악되..
음악에 서서히 밀착되었다가 멀어지는 경험 관객은 2017년 4월 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아르스노바 II - 관현악 콘서트: 현기증”에서 자신의 감각이 음악에 서서히 밀착되었다가 다시 멀어지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음악회는 뒤카(Dukas)의 (‘Fanfare’ pour Preceder La Péri)로 시작했다. 이 작품은 금관 앙상블로 구성된 짧은 악곡으로 음악회 전체의 시작을 알리는 지극히 기능적인 전주곡으로 청취되었다. 이어진 라헨만(Lachenmann)과 백병동의 오케스트라 작품에서 관객은 조금 더 음악에 다가갔다. 특히 관객은 라헨만의 (Tableau for Orchestra)를 감상하며 지휘자로 표상된 작곡가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불쑥 튀어나오는 음향 조각을 친히 음..
음악이 만들어내는 공간에 관하여 안성민의 (The Starry Night II, 화음 프로젝트 Op. 166, 2016) 초연에 대한 스케치 2016년 8월 31일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화음 프로젝트 Day 9 음악회”는 특별했다. 대부분의 ‘미술관 음악회’가 미술 애호가와 현대음악에 익숙한 사람들 앞에서 연주된다면, 이날 자리를 메운 관객 대부분은 ‘매마수’(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체험을 즐기러 온 평범한 시민이었다. 미술관에서는 ‘코스모스’(cosmos)라는 타이틀로 예술과 과학의 융복합 전시가 한창이었다. 초등학생과 유아 그리고 그들의 부모가 인터렉티브 미술 작품을 작동시켜보고 신기한 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저녁 식사 후 집 앞 미술관으로 삼삼오오 나들이를 나온 참이었다. 이날..
동시대 음악을 엿보는 만화경 2016년 6월 1일과 2일 세종체임버홀과 연세아트홀 금호에서 21세기악회 제47주년 기념 작품발표회가 열렸다. 이 땅에서 ‘현대음악 작곡가’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음악회에서 발표된 작품들은 일관된 양식을 사용한다거나, 공통의 주제를 다루진 않는다. 대신 작품들은 ‘실내악 편성’이라는 소규모 앙상블로 제한된다. 양일에 걸친 음악회에서는 독주에서부터 사중주까지의 편성이 선보여졌으며 세계초연된 윤성현의 와 김청묵의 를 비롯해 정세훈, 이해미, 김은영, 배동진, 류창순, 이재신, 강동규, 김효주, 우미현, 김효진, 이은지, 이일주의 최근작 재연 혹은 개작 곡이 포함됐다. 작품들의 스타일과 형식은 다양했다. 주요..
차이를 통한 음악 읽기 전통적인 음악 해석은 음악의 표면을 파헤쳐 그 안에 내재한 소리 구조를 탐구해왔다. 음악의 의미는 텍스트(music itself)에 있다 믿었고 특정 음형에 의미를 실어 작곡가의 의도를 표현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음악 해석은 다원론적인 접근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현시대에서는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이제 쌍방으로 소통하는 음악들, 의미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음악들 그리고 청자의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내는 음악들이 도처에 산재한다. 작곡가 유진선의 2015년 작 은 동시대적인 음악 해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탁월한 예다. 이 작품은 무소르그스키의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층위의 재현들과 이 음악을 청취하는 다양한 방식 그리고 이 음악에 대한 청자의 수용사를 ..
소리에서 솜꽃으로 그리고 여성으로 음악 속 '성차'는 조성음악에서 고도로 발달했다. 여성과 남성은 반음계와 온음계, 여성적인 종지와 남성적인 종지, 그리고 여성적 2주제와 남성적 1주제로 기호화됐다. 작곡가가 ‘여성적인 것’을 표현하려 할 때, 음악의 여성적 재현이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조성음악은 자취를 감췄다. 혼란은 여기서 시작된다. 아마도 현대의 ‘여성주의 작곡가’(Feminism composer)가 파괴하고 싶었을 여성적인 음악 상징은 모더니스트들에 의해 일찌감치 사라졌다. 이제 현대음악은 ‘무성’(無性)으로 들린다. 현대음악은 성차를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논리를 강화해 수학과 과학에 근접했다. 같은 시기 대중음악이 자본과 결합해 극단적으로 성적(性的)으로 변모하는..
미니멀리즘에서 맥시멀리즘으로 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에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애초에 오페라는 ‘미니멀리즘’이라는 단어와 상극이다. 대신 미니멀리즘적인 ‘상태’가 얼마나 다양한 요소를 포용할 수 있는지, 그래서 미니멀리즘이 어떻게 ‘맥시멀리즘’으로 진화하는지 관찰하는 편이 훨씬 더 흥미롭다. (Einstein on the Beach, 1976)은 최소의(minimal) 요소로 통제되는 최대의(maximal) 작품이다. 오페라를 여는 ‘서주’가 좋은 예다. 이 음악은 미니멀리즘을 대변하듯 음표 세 개로 시작하지만, 나레이션, 동작, 이미지와 순차적으로 결합하고 풍성한 코러스를 빨아들임으로써 점차 복합적인 시청각 혼합물로 변한다. 초반의 미니멀리즘적 요소는 음향 구조의 심층으로 밀려 ..
공간, 오브제, 이미지, 상호작용으로 체험하는 소리 이제 소리들은 발광하는 오디오비주얼의 형태나 일종의 소리 오브제가 되어 공연장에 놓인다. 청자도 관습적인 청취 방식을 버리고 ‘공간’이나 ‘신체’ 혹은 ‘자극’과 ‘반응’이라는 새로운 은유로 음악에 접근한다. 전통적인 음악회가 음악의 제의성과 커뮤티타스를 전달해왔고 그것이 태고부터 이어져 온 방식이었다면, 동시대 컴퓨터 음악제에서는 공간화, 대상화, 시청각화, 상호작용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음악이 무엇인지 다시 질문한다. 음악을 만드는데 극히 진보적인 테크놀로지가 사용되지만 그 결과물이 체험가능하며 무척 매혹적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컴퓨터 음악제는 현대음악의 난해함이 그 막다른 골목에서 청중과 화해하는 기묘한 현장이다. 공간 예술의 전당 자유 소극장은 ..
시선들 하나의 음악이 우리 곁에 ‘작품’으로 명명되기까지는 음악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 문화적 배경이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날 연주된 루 해리슨(Lou Harrison, 1917-2003)의 (a Taryong arranged in Quintal Counterpoint, 1961)은 음악의 컨텍스트가 음악이라는 텍스트를 얼마나 강력하게 지탱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이 곡은 ‘외국인’이 작곡한 국악곡이며, 새로운 창작곡이라기보다는 편곡 작품이다. 아마도 동일한 작업을 한국 작곡가가 했다면 크게 언급되지 않았을 정도로 그 편곡방법도 무척 단순했다. 1960년 언저리에 만들어진 곡이 수십 년이 흐른 후 여전히 살아남은 이유는 이 곡이 작곡되었던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즈음의 한국은 ‘우리의 것’..
이카루스, 현대음악의 오해에 도전하다 2015년 3월 14일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열린 화음 챔버오케스트의 “이카루스 - 청소년을 위한 현대음악 입문”은 우리의 편견과 달리 재미있고 즐길 수 있는 현대음악이 존재함을 알린다. 어려운 현대 음악을 애써 ‘해독’하는 대신 ‘복잡하지 않고 듣기 좋은 울림으로’ 작곡된 현대 음악을 들려주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국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현대음악’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확장하고 이 단어 한 구석에 ‘듣기 좋은 현대음악’이라는 카테고리를 추가하는 것이 이번 공연의 목표다. 음악회는 2부로 나눠 진행됐다. 1부에는 미니멀리즘 성향의 작품 6곡이 연주됐고 2부에는 임지선 작곡가의 가 단독으로 연주됐다. 임지선의 작품 제목이자 이날 공연의 타이틀인 ‘이카루스’는 ..
열두 동물과 어린이의 만남 2015년 2월 7일 오후 4시 세종문화회관 체임버 홀에서 화음챔버 오케스트라의 신년 가족음악회 “십이간지 동화이야기”가 열렸다. 이날 공연은 1부와 2부로 나누어 진행됐다. 1부에는 작곡가 하르사니(Harsanyi, 1898-1954)의 어린이용 모음곡 (The Brave Little Tailor, 1939)가 연주됐고 2부에는 2014년 화음(畵音)의 전속작곡가 공모에 선발된 작곡가 최한별(Hannah Hanbiel Choi)의 작품 (Orchestea for the child audience 12 Kanji, 2015)가 초연됐다. 는 다양한 타악기를 포함하는 실내 오케스트라 곡으로 총 15악장으로 구성된 35분 길이의 모음곡이다. 악장들의 제목은 1악장 ‘임금님의 부르심..
화음챔버오케스트라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 Day 2 추상에서 구체로, 고립에서 소통으로 인왕산 북동쪽 바위산 기슭에 자리 잡은 석파정에서 화음 챔버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열렸다. 1960~1990년대의 대중가요를 5명의 현대음악 작곡가가 재해석한 무대였다. 무대 뒤편으로는 희끄무레한 암벽들과 그 사이사이 뻗어 나온 짙은 녹색의 나무들이 보였고, 객석에는 젊은이들 · 아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멀찌감치 등산객들이 걸터앉았다. ‘석파’는 흥선대원군의 아호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흐름을 쇄국으로 막아섰던 그다. 대원군은 100년 후 자신의 정자에서 가을 산 · 한옥 · 대중음악 · 현대음악의 편린이 뒤섞여 혼종의 풍경을 만들 것을 알았을까? 세상의 모든 ‘새로움’은 다양한 요소의 조합과 충돌로 만들어진다. 풍경만..
기억을 소환하는 음향 쇼스타코비치 들어가며 : 쇼스타코비치, 음악을 통해 삶을 얻었던 작곡가 서슬이 퍼렇던 스탈린의 통치기간, 단 한번 실연으로 청중을 사로잡아야 했던 작곡가가 있었다. 당시 유럽의 젊은 아방가르드 작곡가들은 새로운 어법을 찾아 과감한 시도를 행하고 그러는 가운데 독자적인 실험의 세계로 들어서곤 했지만, 쇼스타코비치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당대 프롤레타리아 ‘대중’과 그의 ‘독재자’와 소통해야 했다. 그는 동시대 작곡가들이r 포기한 조성음악어법을 바탕으로 그 안에 다양한 과거의 장르들을 녹여냈으며 민족적 요소를 도입한 음악을 시도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 부르는 사회적인 강압은 그가 남들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음악어법을 만들도록 했다. 그렇게 그는 조성 위에 서 있지만, 기존의 방식..
일상의 많은 음악청취는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음악이 홀로 존재한다는 절대음악 연주회에서도 연주자들을 응시하고 있다. 베토벤의 심포니를 들으면서도 그 선율의 흐름과 프레이즈를 도형으로 연상시켜 본 적이 있다. 영민한 예술가는 특정 화음에서 색을 보기도 한다. 이토록 일상에서 시각과 청각의 연계는 자연스럽다. 이러한 상황에서 ‘음악과 미술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펼쳐지는 화음프로젝트 연주회는 눈과 귀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감상할 수 있는 시청각 축제의 장이다. 11월 중순 스페이스 C에서 열린 음악회의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관객들은 손바닥만 한 팸플릿에 그려진 그림을 보며 연주되는 곡과의 연관성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그리고 연주되었던 몇몇 작품 중 단연 돋보였던 것은 이현주의 (Vine fo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