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미의 <화음 프로젝트 Op.154 “솜꽃”>(To the Cotton Flower, 2015) 리뷰

2016. 1. 20. 16:59

소리에서 솜꽃으로 그리고 여성으로

 

음악 속 '성차'는 조성음악에서 고도로 발달했다. 여성과 남성은 반음계와 온음계, 여성적인 종지와 남성적인 종지, 그리고 여성적 2주제와 남성적 1주제로 기호화됐다. 작곡가가 ‘여성적인 것’을 표현하려 할 때, 음악의 여성적 재현이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조성음악은 자취를 감췄다. 혼란은 여기서 시작된다. 아마도 현대의 ‘여성주의 작곡가’(Feminism composer)가 파괴하고 싶었을 여성적인 음악 상징은 모더니스트들에 의해 일찌감치 사라졌다.

이제 현대음악은 ‘무성’(無性)으로 들린다. 현대음악은 성차를 재현하지 않는다. 대신 논리를 강화해 수학과 과학에 근접했다. 같은 시기 대중음악이 자본과 결합해 극단적으로 성적(性的)으로 변모하는 동안 현대음악은 남성, 여성, 그리고 재현이 배제된 곳으로 유배됐다. 현대음악은 여성스럽지도, 그렇다고 남성스럽지도 않다.

2015년 11월 18일 미술관 ‘스페이스 C’에서 열렸던 화음 쳄버오케스트라의 “2015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 Day7: 댄싱 마마(Dancing Mama)” 연주회가 기대됐던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 음악회는 여성주의(Feminism) 미술의 최신 경향과 현대음악을 결합한다. 화음 쳄버오케스트라는 미술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창작곡 위촉을 다년간 진행해왔고, 이날 공연에서도 네 명의 작곡가가 여성주의 미술 작품을 작곡의 모티브로 활용했다. 창작곡은 전시회장 한쪽에서 연주됐다. 건물의 다른 층에는 벌거벗고 굴삭기 앞에 선 페미니스트 행위 예술가의 영상이 전시돼 있었고(Tierra by Regina Jose Galinando, 2013) 또 다른 방에는 성인 남성이 여성의 자궁으로 연출된 액체 안에서 헤엄치고 있었다.(Honey Baby by Janine Antoni & Stephen Petronio, 2013)

여기에서 여성주의 현대 음악을 만날 수 있을까? 여성주의 미술과 창작 현대음악의 결합이 음악 안에 여성적인 혹은 남성적인 상징을 새롭게 배태할 수 있을까. 연주 직전 떠올랐던 의문에 대해 이날 초연된 작품 하나가 흥미로운 대답을 건넨다. 작곡가 안상미의 <화음 프로젝트 Op.154 “솜꽃”>(To the Cotton Flower for String Quartet, 2015)이다.

안상미의 <솜꽃> 전반부에는 서로 다른 짜임새로 된 몇 개의 음향적 제스처가 등장한다. 같은 음높이로 악기의 떨림이 주를 이루는 부분이 출현하고, 이어 연타하는 듯한 리듬과 화음이 추가되며, 구불구불한 빠른 선율이 나타난다. 다양한 요소들은 하나하나 차례로 나와 때때로 결합하며 점차 그 음역과 움직임을 확장해나간다. 제스처들은 점차 격렬해지고 강렬해지며 계속해서 전진하고 오르기를 반복한다. 마침내 현악 사중주로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에너지를 이끌어 낸 후, 음악은 잠시 소강상태에 이른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누구나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는 몇 개의 음악적 사건이 시작된다.

첫 번째 사건은 툭툭 퉁기는 현악기의 피치카토다. 바로 직전까지 현의 떨림이나 지속음을 이용해서인지, 음향을 분산시킨 피치카토가 대번 눈에 띈다. 그리고 이 거칠거칠해진 음향 한가운데에서 매끄러운 선율이 쭉 뻗어 나온다. 이것이 두 번째 사건이다. 이 선율은 확대되어 음향 전체를 진동시키는 화음이 된다. 이어 세 번째 사건이 시작된다. 모든 현악기가 잠시 멈추어서더니 곧 본래의 음역을 훌쩍 뛰어넘는 ‘하모닉스’(Harmonics) 음향으로 변모한다. 감정을 뒤흔들 듯 진동하던 화음들이 이제는 감정의 동요가 전혀 없는 새로운 울림이 된다. 하모닉스 음향은 리듬을 제한한 채 음정을 하나둘 변화시키며 천천히 움직인다. 그렇게 곡이 끝난다.

현대음악에는 청중이 공유하는 음향의 기호화 방식과 그 해독 방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증4도의 간격을 만드는 두 음표의 합은 ‘사랑’으로도 ‘증오’로도 쓰일 수 있다. 안상미 곡에 등장하는 수많은 음정들과 화음들도 음악 그 자체만 놓고 보면 특정한 의미를 도출하지 않는다. 하지만 안상미의 곡은 음의 추상적 조합에서 한발자국 벗어난다. 우선 안상미는 이 곡에 <솜꽃>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이곡에 등장하는 음악적 긴장과 사건들은 작품이 연주됐던 미술관이라는 특수한 공간 안에서 외부 요소와 공명하며 꽤 또렷한 해석을 이끌어낸다.

불협화로 이뤄진 이 작품이 <솜꽃>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이 곡이 여성주의 미술가 홍이형숙의 작업 <폐경의례>(A ritual for Menopause, 2012)에서 모티브를 얻었고, 이어 박노해의 시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1996)를 그 출발점으로 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이 음향의 해독은 안상미가 작업과정에서 마주쳤던 미술과 홍이형숙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홍이형숙은 폐경(閉經)을 ‘폐경’(閉境), 즉 경계를 지우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녀는 담장을 뛰어넘는 여성 그리고 공중목욕탕에 모여 폐경을 자축하는 중년의 나체 여인을 화면에 담았다. 일상적이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는 사건. 폐경이란 소재는 흔히 부정적으로 인식되지만 홍이형숙은 이 사건을 여성이 겪는 또 하나의 통과의례로 격상한다. 폐경 이전 여성의 몸이 여성의 역할에 속박된 성별화된 것이라면 폐경 이후의 몸은 여성의 한계를 초월한다.

작곡가 안상미도 이런 홍이형숙의 입장을 수용한다. 안상미는 폐경을 두고 “삶의 한 단계를 완성한 여성들이 그동안 쌓아온 연륜과 지혜, 그리고 내적인 힘으로 또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는 과정”(작품노트 )이라 이야기한다. 그리고 안상미는 박노해의 시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를 떠올리며 여성의 폐경을 목화의 두 번째 꽃인 ‘솜꽃’에 대응시켰다. 그녀는 “폐경을 이미 맞이한, 또 앞으로 맞이할 모든 여성들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규정되어 질 수 없는 그들 안에 늘 존재하는 ‘여성성’과 그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기억하기를 바라며”(작품노트 ) 곡을 만들었다.

과거에 활발히 활동했던 급진적인 여성주의 미술가들은 여성의 신체를 절개하고 뒤틀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재현된 여성의 ‘몸뚱이’ 즉 ‘상’을 짓이기고 더럽힘으로써 가부장에 저항했다. 따라서 안상미가 여성의 폐경을 또다시 여성적 상징인 ‘꽃’에 연결하는 장면은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는 비판받아 마땅해 보인다. 하지만 상의 파괴에만 집착하는 것은 낡은 발상이다. 이날 미술관의 최신 여성주의 미술가들은 ‘유쾌함’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지하 부스에서 상연됐던 시골 할머니의 관광버스 춤 영상(Dancing Grandmothers by 안은미, 2011) 그리고 여성의 ‘목소리’만을 들려주던 영상 작업(Wantee by Laure Prouvost, 2013) 등은 과거에는 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방식의 항거다.

음악에서의 여성주의도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될 수 있다. 음악 그 자체에만 천착할 것이 아니라 작곡가가 음악을 대하는 방식이나 착상의 아이디어 그리고 퍼포먼스 전반에 걸쳐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소환될 수 있다. 여성작곡가로서 행위하고 발언하는 것, 여성작곡가로서 정체성을 드러내고 여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실천이 될 수 있다. 음악에서의 여성주의는 한정된 텍스트를 벗어나 다양한 과정과 관계 안에서 작동한다.

작곡가 안상미도 자신이 ‘여성’임을 드러낸다. 연주 직전 그녀는 미소를 띠고 자신의 작품이 폐경을 다룬다고 설명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작곡가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홀 안에 모인 중년의 여성 관객에게 축복을 내리는 듯했다. 잠깐이나마 여성들 사이에 동지애가 흘렀다.

다시 안상미의 음악 안으로 돌아가 보자. 미술가 홍이형숙의 작업 · 박노해의 시 그리고 작곡가의 작품 해설이 음악을 둘러싸고 있다. 이들은 서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청중은 안상미가 만든 여성주의적 공명 안에서 이 음향을 해석한다.

청중은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음악의 전반부에서 시간의 흐름을 감지한다. 나이를 먹는 것. 강렬한 시간의 불가역성이 곡을 지배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첫 번째 사건, 현악기의 피치카토를 들으며 목화 솜꽃의 ‘개화’를 떠올린다. 피치카토는 시간 안에 촘촘한 점을 박아 흐드러지게 핀 솜꽃을 묘사한다. 두 번째 사건은 유난히 매끄럽게 느껴지는 현악기의 선율이다. 이제껏 곡 안에서는 단 한 번도 아름다운 선율이 인지된 적 없었다. 따라서 이 선율의 등장은 현실에서 행해진 적 없었던 폐경의 ‘호명’(呼名)이 이제야 이뤄짐을 은유하는 것 같다. 폐경이 선율의 지위로 재현된다. 선율에서 파생된 화음이 이어지고, 이어 세 번째 사건인 하모닉스가 등장한다. 하모닉스는 서늘하고 초연하며 명상적이다. 이 소리는 폐경을 대하는 작곡가의 해석처럼 들린다.

안상미의 작업은 미술가 홍이형숙의 작업과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홍이형숙의 작업은 호명되지 못했던 폐경을 미술관에 전시하고 이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작곡가도 마찬가지다. 안상미는 음악회라는 공간에 폐경을 불러내고 이것을 전시, 즉 ‘공연’했으며 작곡이라는 행위로 재해석했다. 이 떨떠름한 소재는 음악하기의 ‘공연성’(Performativity)을 기이하게 강조한다. 작곡가는 공연될 수 없는 것을 공공연한 장소에 불러냄으로써 전통에 맞선다.

안상미의 곡에서 여성이라는 화두는 현대적 담론 안에서 그리고 작업의 착상 단계에서 생겨나 청중의 해석 속으로 유영(游泳)해 간다. 그렇게 소리가 목화의 솜꽃으로, 솜꽃이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전이된다. 결국 무성(無性)의 음향은 여성의 통과의례를 바라보는 개성적인 시선 그리고 ‘여성적인 소리’가 되어 다가온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 (20160128)

http://hwaum.org/bbs/board.php?bo_table=project&wr_id=165&sfl=wr_subject&stx=154&sop=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