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classical
상징을 내세운 추상적인 흐름, 그러나 종착점은 너무도 구체적인 ‘한’과 ‘소녀상 2023년 11월 3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홍석원이 지휘하는 서곡이 연주되며 공연이 시작되었다. 마치 전체 극의 흐름을 복기하듯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선율을 비롯한 다양한 음향 짜임새가 차례로 등장했다. 사실 이번 프로덕션은 연출의 의도가 상당한 수준으로 반영되는 ‘레지테아터’임을 떠올려 볼 때, 충분한 길이를 갖는 서곡에 아무런 연출이 더해지지 않고 ‘막을 내린 채로’ 음악만 나오는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연출가 스테파노 포다는 전반적으로 미장센에 공을 들여 결벽증적으로 완결한 하나하나의 ‘장면’을 긴 호흡으로 만들어냈는데, 그의 작법이 작동하기에 짜임새의 교체가 잦은 서곡이 적절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막이 ..
멜로스 연주와비평 이민희 음악평론가 2023년 하반기 리뷰 모음 원문출처: https://blog.naver.com/yeonju_critic 축소지향적인 연출이 주는 의외의 효과 2023년 8월 17일 2023 예술의전당 토월오페라 〈투란도트〉 /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대형오페라로 익숙한 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무대의 규모와 러닝타임을 줄인 채 공연됐다. 이런 기획은 몇몇 새로운 효과를 이끌어냈는데, 무엇보다도 음향적인 측면에서 격하면서도 자극적인 소리를 들려줬다. 아담한 홀에 60명 이상의 성악가 및 대편성 관현악이 소리를 냄으로써 사실상 터져버릴 것 같은 음향 한 가운데에 관객을 위치시키는 독특한 구도를 창출한 것이다. 때문에 소리의 밸런스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이런 울림이 극도의 현장..
멜로스 연주와비평 이민희 음악평론가 2023년 상반기 리뷰 모음 원문출처: https://blog.naver.com/yeonju_critic 테크닉 그 너머 2023년 2월 17일 다닐 트리포노프 피아노 리사이틀-대전 /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 피아니스트들은 음량, 음길이, 템포, 아티큘레이션 등의 정도를 조절하며 개성을 만들어낸다. 트리포노트는 여기에 하나 더, ‘건반을 누르는 깊이’를 섬세하게 차별화했다. 이를테면 차이콥스키의 안에서 그가 생각하기에 주변적이거나 브릿지처럼 지나가는 악장들은 최대한 얕게, 모음곡의 중심에 위치하는 중요한 악장에서는 릴렉스된 손끝이 피아노의 가장 깊숙한 곳을 타건했다. 그렇게 트리포노프는 개성 없어 보이는 짧은 악장마저도 ‘전체’의 음악을 구축하기 위한 필수적인 도구로 만..
멜로스 연주와 비평 이민희 음악평론가 2022년 리뷰 모음 원문출처: https://blog.naver.com/yeonju_critic 그날 오페라하우스를 꽉 채운 이들은 누구였을까? 2022년 5월 22일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라 보엠 /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아름다운 노래로 대중을 현혹하는 최고의 ‘대중 오페라’다. 특히 극 중 로돌프가 부르는 ‘그대의 찬 손’이나 무제타가 부르는 ‘내가 거리를 걸으면’ 등은 누구나 한번은 들어봤을 법한, 오페라 역사의 최고 히트송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이날의 해설자는 의 청중을 극히 대중적인 여흥을 ‘가볍게’ 보러 온 이들로 여기는 듯했다. 이미 진행된 극의 줄거리를 요약해주고, 이후 진행될 상황을 미리 설명했기에, 잔뜩 졸다가 그저 ‘주..
요엘 레비의 역량을 가감 없이 보여준 시벨리우스 해석 2018년 9월 29일 핀란드와 노르웨이의 작곡가는 종종 ‘북유럽 음악’이라는 라벨로 묶여 설명되곤 한다. 9월 28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요엘 레비(Yoel Levi) 지휘의 KBS교향악단 제734회 정기연주회도 ‘북유럽의 신비 속으로’라는 부제로 시벨리우스와 그리그의 곡을 선곡했다. 흥미로웠던 점은 이날 공연을 들었던 많은 관객들이 시벨리우스와 그리그의 음악이 얼마나 다르고 개성적인지 그 차이를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날 음악회의 타이틀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북유럽’이라는 큰 틀로 만족스러운 음악회를 구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첫 곡으로 연주된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의 ..
토속적이며 때로는 현대적인, 새로운 시벨리우스와의 만남 10월 2일 롯데콘서트홀에서는 ‘풍산’의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지휘자 사이먼 래틀(Simon Rattle)과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LSO),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재닌 얀센(Janine Jansen)의 내한 공연이 열렸다. 이날 연주회는 하루 전 있었던 일반인 대상 유료공연과 동일한 레퍼토리로 진행됐으며, 시작 전부터 거의 모든 좌석에 관객이 빼곡히 들어차 연주회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런 분위기와 명성에 부응하듯 이날 공연은 많은 이들을 만족시킨 호연이었다. 연주회의 백미는 바이올리니스트 얀센이 협연한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1957)의 (Op. 47, 1904) 이었다.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 곡을 연주해왔고 다양..
클래식 음악에 숨 불어넣기 2019년 2월 13일(수)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홀 클래식 음악에 다시 의미를 부여해야 할 이유 19세기, 을 작곡했던 슈만(R. Schumann)도 그리고 그 곡을 들었던 청중도 이 음악을 들으며 웃음을 터뜨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의 우리는 하나의 클래식 음악이 담고 있는 의미와 분위기를 사회적으로 공유하지 못한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슈만을 듣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니면 분노를 터뜨려야 할지 알지 못한다. 대신 이 옛 음악에 뿌리내렸던 것으로 알려진 사회학적 기호를 파헤치고, 이를 분해하고 전복시키는 재미에 빠져들곤 한다. 하지만 클래식 음악은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그리고 음향적으로 조각난 채 미디어 안에 너무 오래 떠돈 탓에 그 의미를 전복시키기에도 쉽지..
바로크에서 근대음악을 아우르는 뛰어난 작품 소화력 2018년 8월 19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영산아트홀에서 박유신의 첼로독주회가 열렸다. 연주회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던 곡은 프랑쾨르(F. Francoeur, 1698-1787)의 (Sonata in E Major, 1726)와 로시니(G. A. Rossini, 1792-1868)의 (Barber of Seville: Largo al factotum, 1816)였다. 이 곡들은 연주회 중심에 배치된 센티멘털한 곡들과 대조를 이루는 다소 뚜렷하고 명쾌한 선율선을 가지고 있다. 이에 박유신은 첫 곡 를 낭만주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독특하고 두터운 음향을 만들어냈다. 연주회 전반을 지배했던 서정적인 무드를 첫 곡에서부터 들려주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미션을 중심..
2017년 4월 9일 오후 5시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Dennis Russell Davies, 1944-)가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주로 통영국제음악당에서 2017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이 열렸다. 1부에서는 존 아담스(John Adams, 1947-)의 (Short Ride in a Fast Machine, 1986), 윤이상의 (Fanfare and Memorial, 1979), 윤이상의 (1981) 및 클라리넷 협연자 만츠(Sebastian Manz, 1986)가 앵콜곡으로 준비한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의 (1919) 중 3악장이 연주됐고, 2부에서는 스트라빈스키의 (Le Sacre du Printemps, 1913) 및 앙코르곡으로 차이콥스키(Tchai..
소공연장에서 열리는 음악회의 가치 클래식 음악은 ‘소수의 사람’이 향유하는 ‘최고 수준의 음악’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클래식 음악의 상당수는 왕이나 귀족을 위해 작곡된 것들이다. 또한 19세기 이후 정립된 ‘미적 무관심성’(The Aesthetic Uninterestedness) 혹은 ‘미적 관조’(ästhetisches Betachten) 개념은 클래식 음악을 ‘진리’ 내지는 ‘열반’에 이르는 통로로 격상시켰다. 작곡가를 ‘신’으로 추앙하거나 위대한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을 우매하다 비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으로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것은 일종의 사회학적 ‘고급 취향’으로도 해석된다. 공연장에 가는 것은 ‘상류층’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며 남들과 나를 ‘구별짓기’ ..
닐센 · 시벨리우스 · 드보르작 · 김성기 · 쇼스타코비치의 시대 고전 음악과 ‘동시대’의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고전 음악은 우리 사회와 어떤 방식으로 접속하고 있을까? 모든 고전 음악 연주자는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과 청중과의 거리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과거에 작곡된 곡들은 동시대의 청중과는 감정적으로 괴리된 경우가 많고, 동시대 작곡가의 곡은 불친절하다. 화음 챔버 오케스트라가 행하는 ‘쇼스타코비치 챔버 심포니 전곡 연주 시리즈’는 어떤가? 이들은 ‘음악과 사회’라는 부제를 달고 음악과 사회의 접속을 독특한 층위에서 논한다. 대한민국 청중들에게 정치 격변기를 겪었던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과 삶은, 즉각적으로 ‘음악의 사회성’을 환기시키는 강렬한 메타포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이 청중을 설득하는 ..
클래식 기타 선율 속 ‘익숙함’과 ‘새로움’의 조화 들어가면서: 공연의 시작, 그 순간! 더운 여름 밤 어둡고 불편한 장소에 앉아 있노라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나는 어떤 연유로 이 공간에 앉아 있는지, 내 옆에 앉은 아이와는 무슨 인연이 닿아 있는 건지... 단 없는 무대 위에서 주섬주섬 연주를 준비하는 연주자와 온통 검은 색으로 채워진 낯선 무대.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웃들의 모습과 색색의 면 티셔츠를 입고 온 어린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공연장. 이런 저런 소개말을 하는 연주자의 머리 모양이 눈에 들어오려는 찰나, 흡사 소나기를 퍼붓는 것 같이 강렬한 스트로크(Stroke)가 쏟아져 내린다. 비제(Georges Bizet)의 카르멘 모음곡(Carmen Suite)의 첫 화음이다. 순식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