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각자의 영역에서 확장해오는 시도들 2024년 1월 27일(토)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크로스 콘체르트 프로젝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신작 음악 분야 선정작으로 “클래식과 재즈의 소통을 통해 새로운 음악을 제시”한다는 포부를 지닌 공연이다. 작곡가 오예승이 예술감독으로 기획 전반을 이끌었으며, 재즈 피아니스트 조윤성이 피아노 연주자 및 작곡가로 활약했다. 이외에도 콘트라베이스 전창민, 드럼 신동진, 일렉기타 오진원, 색소폰 신명섭이 재즈 앙상블로 무대 왼쪽에, 바이올린·비올라·첼로로 구성된 8명의 현악 앙상블이 무대 오른쪽에 배치되어 ‘재즈 vs 클래식’의 구도를 만들었다. 재즈 보컬리스트 박지우가 두 곡의 노래를 불렀고, 바이올리니스트 송정민이 독주자로 무대에 섰다. 전반적으로는 ..
상징을 내세운 추상적인 흐름, 그러나 종착점은 너무도 구체적인 ‘한’과 ‘소녀상 2023년 11월 3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홍석원이 지휘하는 서곡이 연주되며 공연이 시작되었다. 마치 전체 극의 흐름을 복기하듯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선율을 비롯한 다양한 음향 짜임새가 차례로 등장했다. 사실 이번 프로덕션은 연출의 의도가 상당한 수준으로 반영되는 ‘레지테아터’임을 떠올려 볼 때, 충분한 길이를 갖는 서곡에 아무런 연출이 더해지지 않고 ‘막을 내린 채로’ 음악만 나오는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연출가 스테파노 포다는 전반적으로 미장센에 공을 들여 결벽증적으로 완결한 하나하나의 ‘장면’을 긴 호흡으로 만들어냈는데, 그의 작법이 작동하기에 짜임새의 교체가 잦은 서곡이 적절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막이 ..
멜로스 연주와비평 이민희 음악평론가 2023년 하반기 리뷰 모음 원문출처: https://blog.naver.com/yeonju_critic 축소지향적인 연출이 주는 의외의 효과 2023년 8월 17일 2023 예술의전당 토월오페라 〈투란도트〉 /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대형오페라로 익숙한 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무대의 규모와 러닝타임을 줄인 채 공연됐다. 이런 기획은 몇몇 새로운 효과를 이끌어냈는데, 무엇보다도 음향적인 측면에서 격하면서도 자극적인 소리를 들려줬다. 아담한 홀에 60명 이상의 성악가 및 대편성 관현악이 소리를 냄으로써 사실상 터져버릴 것 같은 음향 한 가운데에 관객을 위치시키는 독특한 구도를 창출한 것이다. 때문에 소리의 밸런스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이런 울림이 극도의 현장..
멜로스 연주와비평 이민희 음악평론가 2023년 상반기 리뷰 모음 원문출처: https://blog.naver.com/yeonju_critic 테크닉 그 너머 2023년 2월 17일 다닐 트리포노프 피아노 리사이틀-대전 /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 피아니스트들은 음량, 음길이, 템포, 아티큘레이션 등의 정도를 조절하며 개성을 만들어낸다. 트리포노트는 여기에 하나 더, ‘건반을 누르는 깊이’를 섬세하게 차별화했다. 이를테면 차이콥스키의 안에서 그가 생각하기에 주변적이거나 브릿지처럼 지나가는 악장들은 최대한 얕게, 모음곡의 중심에 위치하는 중요한 악장에서는 릴렉스된 손끝이 피아노의 가장 깊숙한 곳을 타건했다. 그렇게 트리포노프는 개성 없어 보이는 짧은 악장마저도 ‘전체’의 음악을 구축하기 위한 필수적인 도구로 만..
멜로스 연주와 비평 이민희 음악평론가 2022년 리뷰 모음 원문출처: https://blog.naver.com/yeonju_critic 그날 오페라하우스를 꽉 채운 이들은 누구였을까? 2022년 5월 22일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라 보엠 /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아름다운 노래로 대중을 현혹하는 최고의 ‘대중 오페라’다. 특히 극 중 로돌프가 부르는 ‘그대의 찬 손’이나 무제타가 부르는 ‘내가 거리를 걸으면’ 등은 누구나 한번은 들어봤을 법한, 오페라 역사의 최고 히트송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이날의 해설자는 의 청중을 극히 대중적인 여흥을 ‘가볍게’ 보러 온 이들로 여기는 듯했다. 이미 진행된 극의 줄거리를 요약해주고, 이후 진행될 상황을 미리 설명했기에, 잔뜩 졸다가 그저 ‘주..
벽 앞의 생, 그리고 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이들 2023년 9월 6일-2024년 2월 25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작가 정연두의 ‘MMCA 현대차 시리즈 2023: 정연두 백년 여행기’ 전시가 진행되는 가운데 작품 중 하나인 (2023)에 영감을 받아 작곡된 4개의 창작곡이 2023년 10월 4일 및 10월 11일 이 설치된 부스 안에서 초연되었다. 관객을 만난 음악은 각각 비올라, 클라리넷, 첼로, 콘트라베이스 독주를 위한 것으로, 네 곡에 걸쳐 총 40여 분간 공연되었다. 비올라에서부터 콘트라베이스에 이르는 연주 순서는 악기의 음역이 점차 확장되는 느낌을 동반하며 공연 전체를 일관된 느낌으로 이끌었다. 분명 정연두 작가의 은 그 자체로 상당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 앞에 비올리스트, 클라..
무대 위 추도의 시간 - 오페라 '순이삼촌' 그리고 한국 오페라의 어떤 속성에 관한 고민 은 오페라 특유의 힘으로 4·3사건에 대한 기억과 반성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작품이다. 제주도를 기점으로 모인 각 분야의 제작진과 무대 위 가수와 연기자,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수천의 관객이 모여 거대한 추도의 장을 만들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오페라의 서사는 4·3사건의 주인공을 ‘불특정 다수’에서 ‘특정한 개인’으로 전이시켰고, 개인의 구체적 형상은 소프라노가 부르는 ‘순이삼촌 광란의 아리아’로 실제화되었다. 모든 성취는 이 작품이 제작에서 공연에 이르기까지 수천의 인력을 필요로 하는 ‘오페라’라는 장르였기에 가능했다. 지역의 기억을 외부에 공표하는 도구로서의 오페라 은 제주4·3사건을 다룬 현기영의 동명 중편..
복합 미디어 작품 ‘Juxtaposition of Macro Cosmos’ 2022년 12월 16일(금) ~ 2022년 12월 17일(토) 국립극장 하늘극장 ‘Juxtaposition(병치)’는 작곡가 이현민이 시리즈로 선보이고 있는 ‘Macro Cosmos’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작곡가는 병치를 “두 가지 이상의 것을 한 곳에 나란히 두거나 설치하는” 것으로 보고 다양한 미디어를 동시에 제시했을 때 관객이 이를 ‘인식’하는 행위에 집중한다. 50분가량의 공연 전체가 하나의 음악으로서, 원형의 무대 위에는 스크린과 소량의 객석이 설치되었다. 비올리스트 라세원과 세 명의 무용수(최지원, 민경원, 전혜정)가 등장하며, 공간 전체를 활용하는 음향세팅과 조명이 특징적이다. 강렬한 연출로 진행되는 50분 동안의..
1877년 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하는 기술이 처음으로 발명됐고 1898년에는 자기magnetic녹음을 활용한 테이프 녹음 기술이, 1927년에는 최초의 유성영화 《재즈싱어》가 관객을 만났다. 구체음악Musique concrète이 1940년대에, 전자음악electronic music이 1950년대에 등장했으며, 최초의 랩톱 컴퓨터가 1981년 판매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2021년은 소리를 기계로 매개하는 핵심적인 기술이 발달한지 150여년, 개인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게 된 지 40여년이 더 지난 먼 미래다. 전자음악은 그동안 무엇이 달라졌고, 어떤 것이 지속되고 있는가? 그 안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여전히 있는가? 전자음악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기술’과 ‘매개방식’을 전면에 드러내기에, 20..
현대음악은 얼마나 먼가? 그리고 얼마나 또 가까운가? 2021년 11월 27일(토)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음렬주의’라는 말이 너무나 어려운 현대음악을 지칭하는 것 같아 지레 겁을 먹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마련한 ‘미래를 여는 12개의 음: 음렬주의’를 들으며 깨닫게 된 점은 그 반대다. 다양한 현대음악의 사조 중 의외로 명확한 음악적 외형을 갖고 있으며 청취가 수월한 것이 ‘음렬음악’이며, 그렇기에 음렬로 작곡된 몇몇 곡은 충분히 청취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 이날 연주됐던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의 곡은 음고 및 선율을 ‘음렬’로 제한한 상태에서 리듬적인 면을 부각시켰으며, 리스트와 하우어 그리고 장지현의 곡은 음렬이 만들어내는 화성적 색채를 강조했다. 한편 메..
현대음악을 읽는 새로운 관점과 방식들 2021년 6월 29일(화)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작곡가 락헨만과 리게티는 ‘현대음악’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함께 서술되지만, 이 둘의 양식적 차이는 힙합과 그레고리안 성가 만큼이나 멀다. 또한 현대음악은 조성음악과 달리 청취의 즐거움이 한정적이며, 그 안에는 수십 가지의 미학과 작곡방식이 혼재한다. 따라서 ‘현대음악’과 가장 어울리는 단어로 ‘렉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2년에 걸쳐 시리즈로 진행하고 있는 ‘현대음악 렉처 콘서트’가 꾸준히 관객을 모으며 성황리에 진행 중인 이유 중 하나다 이날 공연된 렉처 콘서트 V의 주제는 ‘세상의 모든 소리: 소음과 음향’이었다. 특히 이날 공연은 총 7회에 걸쳐 진행될 렉처 콘서트 전체의 의의를 상기시..
음악으로 경험하는 순교의 길 2021년 11월 20일(토) ~ 2021년 11월 21일(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수많은 관객이 어두운 극장에 앉아 천주교인의 죽음을 숨죽여 바라보는 행위는 극히 제의적이다. 특히 일반적인 서사구조와는 다른 형태로 배열된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 그리고 바르바라를 비롯한 순교자의 박해사를 그린 줄거리는 관객에게 꽤 직접적으로 종교적인 층위의 감동을 준다. 해설자가 등장해 역사적인 배경이나 장면의 전환을 상세히 설명해준다는 점, 계단식 구조물 단 한 개가 장면마다 그 노출면을 달리하며 반복되는 배경이 된다는 점 역시 이 작품을 일반적인 오페라보다는 종교적인 오페라 내지는 오라토리오에 더 가깝게 만든다. 하지만 이 작품이 기존의 오페라와 다른 이유는 서사나 해설자의 존재, 연..
2021년 12월 13일 한남동 일신홀에서 박정은(1986~)의 두 번째 개인 작곡발표회가 열렸다. 독주에서 오중주까지 악기 편성이 다양했고, 총 다섯 곡 중 세 곡이 초연이었다. 각각의 곡마다 중점적으로 쓰인 주요 아이디어나 연주기법 등이 달랐지만, 몇몇 곡을 교차하며 나타나는 작곡가 특유의 음악 어법이 비교적 또렷했다. 특히 피아노 독주곡과 타악기 독주곡이 연주자의 비르투오소한 면모를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하나의 그룹으로 인식됐고, 삼중주는 음향이 회화적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사중주와 오중주는 펄스를 중심으로 음향 블록이 나열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그룹으로 묶일 수 있었다. 이외에도 오래된 테크놀로지를 무대 위에 등장시킨다는 점, 일상적이면서도 재기발랄한 물건을 활용해 특수주법이나 프리페어드를 시도한..
분열된 자아를 가진 동시대인의 초상 2021년 11월 12일(금)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 위에 한 명이 등장해 극을 이끌어가는 ‘모노드라마’는 음악이나 시, 연극 등이 다채롭게 융합된 무대예술 안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런 유형의 작품 중 유명한 것으로 1930년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초연된 장 콕토(Jean Cocteau)의 연극 (La Voix Humaine)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한 여자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에게 전화를 거는 내용으로, 신경질적이고도 복잡한 주인공의 마음이 그리움과 분노, 그리고 체념을 넘나들며 격렬하게 전개된다. 이 모노드라마에 풀랑크(F. Poulenc)가 1958년 음악을 붙인 모노오페라 는 콕토의 원작과 동일하게 진행하되, 단 한 명의 소프라노를 오..
지금, 여기의 새로운 음악경험 2021년 10월 28일(목)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2021 서울국제음악제는 코로나 19로 얼룩졌던 긴 시간을 지나, 이제는 다시 약동하고자 하는 음악계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특히 ‘신비로운 놀이동산’이라는 타이틀로 열렸던 28일의 실내악 공연에서는 브람스(J. Brahms)와 드뷔시(C. Debussy)의 작품에 대한 재해석과 함께 남상봉 작곡가의 ‘플루트,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타악기, 피아노를 위한 기묘한 놀이공원’이 위촉‧초연되었다. 익숙한 곡에서는 참신한 경험을, 신작을 통해서는 동시대의 현실을 성찰하게 만든 레퍼토리로서, 지금‧여기에서 행해질 수 있는 새로운 음악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했다는 점에서 값진 시간이었다. 새롭게 다가온 브람스와 드뷔시 브람..
왈츠에 실린 새로운 이야기들 2021년 10월 14일(목) ~ 2021년 10월 16일(토) 대전예술의전당 앙상블홀 ‘레테’는 본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망각(忘却)의 강’을 의미하지만, 김주원(작곡)과 황정은(대본)의 창작오페라 안에서 인간을 돕는 ‘재난 로봇’으로 다시 태어났다. 오페라의 배경은 척박하게 변해버린 먼 미래. 그 안에서 로봇 ‘레테’는 재난과 위기에서 인간을 구해내며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 오페라를 관통하는 ‘로봇’이라는 소재는 최근 각광받는 AI기술 등과 관련이 있으며, 해당 오페라를 제작한 대전 지역의 산업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여러 대학이 연합해 꾸린 오페라 프로덕션의 참신한 성격을 대변한다. 하지만 오페라 ‘레테’는 단지 소재로서의 로봇을 전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레테..
광주를 모르는 먼 미래의 관객에게, 오페라로 다가가길 바라며 2021년 8월 27일(금) ~ 2021년 8월 28일(토)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오페라 ‘박하사탕’에서 주목할 점은, 오페라라는 매체가 5‧18 광주의 시간을 영화와는 달리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고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원작과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며 다소 난해하게 펼쳐졌던 ‘서사’는 그 전개 방식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음악’의 경우에는 현장의 관객을 충분히 설득시켰다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는 큰 비중을 차지했던 합창, 반복되는 모티브, 미묘한 성부 진행, 아리아, 이중창 등의 음악적 장치가 조화롭게 작동해 만들어낸 결과다. 특수한 이야기와 보편적 이야기 사이 오페라는 야유회에 나온 수많은..
최근 현대음악에서 발견되는 재현의 몇몇 양상들 최근 작곡되는 한국 현대음악의 특징 중 하나는 상당수의 곡이 재현적인 양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작곡가의 연령이나 작곡가의 평소 작곡어법과 상관없이 실내악 분야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현상으로서, 2021년 9월 7일 대한민국 실내악 작곡제전의 일신홀 무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창회, 창연악회, 뮤지콘, 소리목, 창악회에서 각기 추천된 다섯 곡과 2020년 파안생명나무작곡가로 선정되어 작품발표의 기회를 얻은 박정은의 작품이 모두 표제를 갖는 재현적인 성격으로 관객을 만났다. 재현적인 현대음악이란, 기본적으로는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작곡가의 의지로 볼 수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작곡가의 음악어법은 각기 천차만별이기에, 청중의 입장에서 현대음악..
대학가곡축제가 보여준 가능성, 그리고 미래를 위해 고민해야 할 과제 2021년 8월 14일(토) ~ 15일(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나이가 지긋한 성악가가 를 부르며 실향의 아픔을 이야기하면, 그의 어린 시절이 간략한 연극으로 뒤따르고 이어 젊은 어머니가 등장해 를 열창한다. 2021년 8월 14-15일 예술의전당 IBK홀에서 진행된 대학가곡축제의 한 장면으로, 가곡이 스토리와 상황에 맞추어 노래되는 모습이다. 예술의전당은 성악과 재학생으로 이뤄진 지원자들에게 150선의 가곡 목록을 제공했고, 학생들은 여기에서 3-4곡 가량을 선별해 연기와 스토리텔링을 곁들인 15분의 무대를 만들었다. 그렇게 일반적인 가곡 콘서트와는 다른, 연극적인 요소와 캐릭터가 존재하는 세미 음악극이 탄생했다. 무대 뒤편에는 스..
사랑의 이야기로 풀어낸 연가곡들 2021년 7월 24일 롯데콘서트홀 노래 가사는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이 많고, 무대 위의 성악가들은 배역에 맞는 상황을 연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대 예술이 갖는 비현실적이고도 퍼포먼스적인 본질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 음악회는 이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가사 속 ‘사랑을 노래함’이 단지 글귀에 머물지 않고 ‘현실의 사랑’을 투영한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렸던 소프라노 홍혜란, 테너 최원휘 그리고 피아니스트 백혜선의 음악회가 그랬다. 홍혜란은 여성의 입장에서 남편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를, 테너 최원휘는 남성의 입장에서 열렬히 사랑을 고백하는 를 불렀다. 이 둘은 부부로, 이들과 좋은 인연을 맺어온 피아니스트 백혜선이 음악회의 반주를 맡았다. 1부에서는 슈만..
음악, 소리, 대사가 어우러진 감각의 전이 2021년 6월 22일(화) ~ 2021년 7월 4일(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이야기는 간단하다. 아내가 죽은 후 홀로 딸을 키워 온 작곡가이자 사제 시미언. 그가 딸을 집에서 내쫒는다. 그에게는 죽은 아내의 추억을 곱씹는 ‘정원’이 가장 중요하며, 그걸 계속 정성스레 가꾸며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등장인물은 내레이터를 포함해 총 세 뿐. 주목할 것은 이 작품이 키냐르(P. Quignard)의 원작 동명소설처럼 극 전체를 소리와 음악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는 점이다. 키냐르는 글자를 이용해 소설 뿐 아니라 음악을 쓸 수도, 언어를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글자를 사용하는 매체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감각을 넘어서는 것이다. 키냐르의 아이디어대로라면 ‘..
2021년의 레드북, 또 다시 동시대성을 고민하다 2021년 6월 4일(금) ~ 2021년 8월 22일(일)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2017년 트라이아웃을 거쳐 2018년 초연된 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대표적인 창작뮤지컬이다. 특히 이 작품은 성녀와 창녀로 이분화된 전형적인 캐릭터에 신물을 느꼈던 이들에게 신선한 여주인공을 제시했으며, 문화예술계의 미투운동이 한참 불거져 나오던 시기에 관객을 만남으로써 당대의 여성담론을 시기적절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은 매끄러운 극작 및 음악과 함께 호평을 받았다. 이제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2021년이 되었다. 연극·뮤지컬 분야에서 여성 원톱 작품은 더 이상 놀라운 것이 아니며, 여성 배역으로만 구성된 작품도 여럿 눈에 띈다..
‘오페라’라는 표지 아래에서 시도된 장르적 실험 2021년 5월 13일(목) ~ 2021년 5월 16일(일) 국립극장 달오름 국립오페라단이 초연한 는 ‘서정오페라’라는 수식과 함께 일반적인 오페라와는 다른 외양을 갖는다. 브람스(J. Brahms), 슈만(R. Schumann), 클라라(C. Schumann)라는 세 명의 인물과 발레리나들 그리고 대규모 합창단이 등장하며, 익히 알고 있는 브람스의 사랑이야기를 지극히 추상적인 필치로 그린다. 작품 안에 포함된 총 20곡 중 18곡은 브람스, 슈만, 클라라가 기존에 작곡한 곡을 가져와 활용하며, 극 중 모든 가사는 독일어로 불린다. 이런 독특한 형식 안에서 감지되는 두 가지 특이성은, 첫째 이 작품이 음악적 측면에 있어 연속성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했다는 점,..
이국적인 음악으로 빚어낸 열 명의 여성 2021년 1월 22일(금) ~ 2021년 3월 14일(일) 정동극장 1930년대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 남편이 죽어 집안의 최고 권력자가 된 안주인 베르나르다 알바는 다섯 딸을 앞에 두고 자신의 말에 복종하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딸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하녀들 그리고 정신이 온전치 않은 할머니는 이 체제의 불완전성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이런 구도 안에서 어머니 알바의 강압은 신(神)의 섭리로, 이에 저항하는 딸들의 행동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은유한다고 해석되며(윤용욱, 2010), 여성이 풀어내는 여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최근의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독해되기도 한다. 다만 이런 접근들은 뮤지컬이 기반하는 로르카(F. Lorca)의 원작을 중심으로 하기에, ..
경성의 살롱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이머시브 뮤지컬의 가능성 2020년 12월 4일(금) 문화역서울284 RTO ‘문화역서울284’의 역사성과 결합한 공연 1900년에 생긴 ‘남대문 정차장’이 1925년 ‘경성역’으로, 그리고 다시 2004년 ‘서울역’으로, 무려 백여 년간 많은 이들이 북적대던 장소는 이제 ‘문화역서울284’라는 복합문화예술공간이 되었다. 따라서 경성을 배경으로 삼아 1930년대 유행했던 음악을 들려주는 음악극 이 ‘문화역서을284’에서 공연됐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2020 창작유통지원 기획공모: 플랫폼 284 RTO”의 일환으로 작업된 타 공연과 이 음악극을 근본적으로 구분 짓는다. 이날 문화역서울284의 회색빛 벽면에는 알록달록한 조명이 설치되었고, 몇 개의 소품과 테이블이 놓..
여전히 또다시, 이야기의 주체와 기억에 관한 고민 2020년 10월 9일(금) ~ 2020년 11월 8일(일)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추상적인 무대연출과 결합한 시민의 대열 이 극은 5·18 광주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무대 한편에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설치해 시체의 화장장소를 나타내고, 두 대의 방패가 전면에 등장해 대치중인 상황을 암시하는 식이다. 극의 최종부에 이르러 무대 중앙에 석상처럼 우뚝 선 채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정화인, 그리고 죽음의 순간 공중으로 떠올라 사라지는 이기백의 모습 등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기백의 죽음은 광주의 희생자를 사람과 같은 크기의 오브제로 구현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추상적인 상(像)들이 몇몇 장면에 이르러서 일종의 제의..
음악적 표현주의에 대한 심층적인 체험, 그리고 그 너머의 사유 2020년 6월 21일(일) 오후 5시 LG아트센터, 화음챔버오케스트라 음악사에 등장하는 표현주의(expressionism)의 뜻을 암기해본 이는 많지만, 이 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본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연주자에게는 까다로운 악곡이며 청중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저 듣기 싫은 현대음악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날 음악회에서 표현주의의 대표적 작곡가로 불리는 쇤베르크, 베르크의 대곡(大曲)들이 뛰어난 악단에 의해 실연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이날 음악회는 송주호 음악평론가의 렉처와 함께 진행됐으며, 하이든이 작곡한 질풍노도 시기의 작품이 함께 연주됐고 서유라 작곡가의 신작이 발표됐다. 그..
듣고 이해하는 즐거움, 미니멀 음악 2020년 5월 24일(일) 오후 5시 LG아트센터 오리지널 미니멀리스트라 불리는 글래스와 라이히, 그리고 바로크 시대의 파헬벨과 19세기의 사티. 활동했던 시대가 다르며 지역적으로도 먼 이들의 음악을 ‘미니멀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을까? 이 음악들을 한꺼번에 관통하는 ‘미니멀적 속성’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파헬벨과 사티를 ‘미니멀 음악’이라는 관점에서 청취했을 때 청중이 얻을 수 있는 통찰은 무엇인가? 그리고 라이히와 존 아담스가 ‘미국’의 미니멀리스트로서 다른 음악과 구분되는 지점이 있는가? ‘렉처콘서트’로 기획된 이날 음악회는 이와 같은 다양한 질문을 제기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에 대한 답이 객석에 앉은 청중의 수만큼 다채로웠을 수는 있을지..
반복되는 노래 안의 변화하는 화음들 2020년 6월 30일(화) ~ 2020년 9월 13일(일) 예스24스테이지 1관 로봇의 음악적 재현 주인에게 버림받은 낡은 로봇이 모여 사는 아파트. 이곳에서 혼자 생활하는 올리버가 를 부르며 등장한다. “아침뉴스!”라는 외침과 함께 8분 음표로 구성된 모티브가 종종거리듯 움직이면, 올리버가 소리에 맞춰 기지개를 켠다. D♭음을 중심에 두고 맴도는 이 소리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평온함을 느끼는 올리버의 성향을 적절히 묘사한다. 또한 이 음악은 서로 다른 호흡을 갖는 악구를 반복시키고 또 불규칙하게 이어 붙임으로써 올리버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서 있는지, 올리버가 이 아파트에 들어오고 나서 대체 얼마나 많은 계절이 흘렀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영원히 반복되는 시..
여성의 목소리로 수행되는 광란의 제의와 유토피아 2020년 4월 2일(목) ~ 2020년 6월 21일(일) 드림아트센터 1관 에스비타운 광란의 제의 특정 장르의 락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란 보통 무대 아래에서 ‘돌고래 비명’을 지르는 맹목적인 팬의 함성으로 상상되어 왔다. 따라서 뮤지컬 리지가 그간 남성의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던 펑크와 하드코어를 전면에 내세우고 네 명의 여성 보컬리스트를 주인공으로 삼아 감정의 격랑을 담아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하다. 흥미로운 점은 여성의 목소리가 이런 장르를 관통할 때, 그 특유의 발화(發話) 방식이 지극히 생경하고도 강렬하게 가시화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리지가 “난 여길 떠나야 해!”라는 외침과 함께 를 부를 때에야 비로소, 하드코어 메탈이란 장르가 화자의 끓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