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처 콘서트 시리즈 V ‘세상의 모든 소리: 소음과 음향’ 리뷰

2023. 8. 24. 14:01

현대음악을 읽는 새로운 관점과 방식들  

2021년 6월 29일(화)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작곡가 락헨만과 리게티는 ‘현대음악’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함께 서술되지만, 이 둘의 양식적 차이는 힙합과 그레고리안 성가 만큼이나 멀다. 또한 현대음악은 조성음악과 달리 청취의 즐거움이 한정적이며, 그 안에는 수십 가지의 미학과 작곡방식이 혼재한다. 따라서 ‘현대음악’과 가장 어울리는 단어로 ‘렉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가 2년에 걸쳐 시리즈로 진행하고 있는 ‘현대음악 렉처 콘서트’가 꾸준히 관객을 모으며 성황리에 진행 중인 이유 중 하나다

이날 공연된 렉처 콘서트 V의 주제는 ‘세상의 모든 소리: 소음과 음향’이었다. 특히 이날 공연은 총 7회에 걸쳐 진행될 렉처 콘서트 전체의 의의를 상기시키기에 좋은 기회를 제공했는데, 첫째, 기존의 음악사 서술을 비틀며 ‘소음’이라는 키워드를 재해석했고, 둘째, 실연을 접하지 못한 채 텍스트나 영상으로만 알고 있었던 유명 음악을 직접 귀로 확인하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셋째, 2021년에 작곡된 신작과 20세기의 중반에 작곡된 음악을 동시에 청취하게 함으로써 현대음악의 특정 카테고리 안에서도 다른 결을 갖는 새로운 작품이 끊임없이 작곡되고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이런 세 가지의 특성은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렉처 시리즈가 현대음악을 읽는 새로운 관점과 방식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20세기 음악을 감상하기 위한 훌륭한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음악 문헌의 일반적 서술을 비트는 시도

‘소음’과 ‘음향’은 현대음악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상징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케이지(J. Cage)가 주장했던 특정한 유형의 우연성 음악, 그리고 ‘음향작법’ 혹은 ‘음색작법’이라 불리는 20세기의 작곡기법을 지칭하는데 주로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날 음악회에서 모차르트(W. Mozart, 1785-1791)와 발바스트르(C. Balbastre, 1724-1799)의 작품을 ‘소음’의 범주에 포함시킨 것은 이례적이다. 이 음악 안에서 ‘소음’이란 ‘틀린 음’ 혹은 음악적 맥락을 아예 벗어난 ‘제3의 소리’ 등을 의미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농담>(Ein Musikalischer Spaß, K. 522, 1785-1787) 4악장 프레스토는 쫒기는 듯한 분위기 안에서 짧은 선율 모티브가 하행진행을 계속한다. 그렇게 경쾌한 분위기로 전개되던 음악은 최종부에 이르러 현악기 연주자가 실수를 한 듯 엉뚱한 음정을 연주하며 끝난다. ‘음악적 농담’이라는 제목은 현악기가 소리 낸 ‘불협화음’을 지칭하며, 이 음악회 안에서는 ‘소음’으로 지칭된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날 연주회에서는 이 마지막 화음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21세기가 한창이나 지난 지금, 해당 악곡 전체가 워낙 유명해졌기에 ‘농담으로 넣은’ 불협화음까지도 자연스러운 음악의 흐름으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안성민의 편곡으로 무대에 오른 발바스트르(C. Balbastre, 1724-1799)의 <마르세예즈 행진곡>(Marche des Marseillois, 1792)은 작품 후반에 대포소리를 표현하는 클러스터가 등장한다. 이와 같은 화성의 사용은 발바스트르 시절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독특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 클러스터는 음정적‧모티브적으로 의미를 가진다기보다는 단지 ‘의성어’의 일종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이 클러스터는 ‘소음’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음향의 ‘삽입’이 된다. 모차르트의 곡과 마찬가지로 발바스트르의 클러스터 역시 과격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는데, 너무도 다양한 소리에 노출된 21세기의 청취 환경이 감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모차르트와 발바스트르의 작품은 기존의 음악사적 서술에서 벗어나 보다 다양한 악곡 안에서 ‘소음’의 의미를 재탐색한다. 하지만 ‘현대음악 렉처 콘서트’라는 타이틀을 기대하며 음악회장에 온 관객의 상당수는 어느 정도 ‘정격’의 음악사 서술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터, 이와 같은 작품이 의외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음악사를 ‘비트는 시도’가 획기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음악사를 ‘그대로 들려주는 시도’ 역시 놓칠 수 없는 가치임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영상자료로만 접했던 대가의 음악을 직접 듣고 확인하는 기회

락헨만(H. Lachenmann, 1935-)의 <압력>(Pression, 1969/2010)은 작곡학도 사이에서 마니악한 팬을 형성하고 있는 악명 높은 작품으로, 괴기스러운 음향과 악기를 부수어 버릴 듯한 제스처, 일그러진 연주자의 얼굴로 유명하다. 이날 첼로를 연주했던 이헬렌은 이 작품을 의외의 방식으로 해석해냈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여리게 연주함으로써 <압력>에 대해 갖고 있었던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이다. 사실상 이 지점에서 그간 접해왔던 <압력>의 과도한 에너지와 폭력적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거친 프레이즈들이 영상 속 과장된 퍼포먼스이며, 볼륨을 최대로 키우고 들어 온 청취환경 때문이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동시에 <압력>이라는 작품 안에 등장하는 다양한 특수주법 역시 이제는 다양한 작곡가의 작품 안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게 되었기에, 단지 이런 요소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격’을 주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윤이상(1917-1995)의 <교착적 음향>(Colloïdes sonores, 1961) 역시 자주 연주되지 않는 곡이다. 현악앙상블을 위한 작품으로서, 대편성 오케스트라로 접하게 되는 윤이상의 주요기법이나 성부진행 방식을 소규모 편성 안에서 보다 명확하게 청취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실제 연주회장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작품 전반의 피치카토 패시지들과 저음의 현악기가 길고 구불구불한 선율을 화려하게 펼쳐보이는 모습이었다. 2악장의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전통악기의 주법을 노골적으로 연상시킴으로써 다소 오리엔탈리즘적인 의도가 감지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윤이상’이라는 완결된 세계보다는, 그 세계가 생성되고 서서히 채워져 나갔을 초기의 모습을 엿보는 것 같았다. 이런 감상은 아마도 실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작품에 대한 ‘대면 효과’의 하나일 것으로, 숨어 있는 작품을 음악회 안에서 되살려내는 화음챔버오케스트라의 기획이 갖는 미덕임이 분명했다.

현대음악의 역사성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배치들: 리게티와 전다빈

전다빈의 화음프로젝트 Op. 213 <보레아스>(Boreas, 2021, 공모당선작 초연)는 투명한 빛이 길게 내리치는 듯한 앙상블로 시작한다. 현을 활로 그을 때 나는 미세한 마찰소리, 혹은 공기 중에 떠있는 것처럼 들리는 하모닉스가 생황의 소리와 합쳐져 독특한 ‘바람소리’를 들려주었고, 가늘게 끊어질 듯한 현의 지속음이 생황과 섬세하게 결합해 그 음향의 꼬리를 장식했다. 풍부한 현악기의 배음 안에 생황의 소리를 가둠으로써 공연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음향 배합이 형성되는 순간도 근사했다. 취주구에 공기를 불어넣는 방식에 따라 음색과 강세가 시시각각 바뀌는 생황의 소리와 10인 규모의 현악앙상블이 융합됨으로써, 서로의 소리를 거울처럼 반영하고 또 확장시키는 것이 흥미로웠다. 앙상블 전체의 시작과 소멸지점이 모호하게 처리되어 어스름이 지거나 안개가 드리우듯 음량과 음색이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작품 전반적으로는 지속음이 지배적인 부분과 리드미컬한 부분이 교대로 등장했는데, 리드미컬한 부분에서는 바르톡 피치카토를 비롯한 특수주법이 활용되어 리듬의 분절점을 보다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현악기 전체가 지판을 빠르게 두드리는 가운데 생황이 독주 패시지를 연주할 때에는 저 멀리서 동물떼가 점차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그 안에 위치한 생황은 거대한 음향적 배경을 두른 멋들어진 비르투오소처럼 다가왔다.

반음의 간격 혹은 그보다 더 좁은 음정으로 뭉쳐진 미세클러스터를 들을 때에는 이와 같은 기법을 처음 선보였던 선대 음악가 리게티(G. Ligeti, 1923-2006)가 떠올랐다. 특히 이날 연주되었던 리게티의 <분지들>(Ramification, 1968)은 미세음을 토대로 하는 음향적 클러스터에 대한 기념비적인 시도다. 이 작품은 안개와 같은 음향을 만들어내기 위한 성부 구성방식을 명확하게 제시했는데, 이는 후대 작곡가들이 자주 사용하게 되는 작곡 기법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소음’이라고 불리던 소리를 ‘악음’으로 편입시킨 리게티의 시도가 있었던 때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후 이 기법을 포함한 채 더 많은 소음을 음악 안으로 포섭하려는 전다빈의 시도는, 긴 시간을 초월한 무언의 협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더 나아가 전다빈은 곡 안에 ‘생황’이라는 독특한 악기를 사용했고 ‘북풍의 신’이라는 그리스 신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이런 장치를 통해 마냥 순수하고 투명했던 리게티의 음악과는 다른, 독주자가 부각되는 동시에 회화적인 풍경을 그려낼 수 있었다. 이런 두 음악 사이의 거리, 혹은 두 음악의 차이 안에 내포된 현대음악의 ‘역사’를 가늠해보는 것 역시 음악회의 묘미 중 하나였다. (글 이민희/음악평론가)

2022년 1월, 2021 화음프로젝트 아카데미, 화음챔버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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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화음프로젝트 아카데미 : 현대음악 렉처콘서트 시리즈 Ⅴ] 세상의 모든 소리: 소음과 음향 이민희 / 2022-01-19 / HIT :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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