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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의 검은 배경 위로 매끈하게 드러난 지구의 곡선, 바로 그 옆을 느리게 유영하는 우주선. 다소 냉혹한 우주의 풍경에 천재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 를 결합시켰다. 그러자 눈앞의 암흑은 금새 아름다운 무언가로 탈바꿈했다. 영화 의 이 유명한 장면이 암시하는 것은 첫째, 왈츠란 우아한 느낌을 준다는 것, 둘째, 왈츠는 원을 그려 도는 운동을 암시한다는 것, 그리고 셋째, 무엇보다도 왈츠란 인간들 사이의 애정과 친교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음악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음악이 암흑의 우주에 울려 퍼진 순간 그곳은 온기로 가득 찬 인간적인 무언가로 보였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춤곡 ‘왈츠’의 역사는 17세기 그리고 그보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형태 또한..
글·이민희 음악학자 미에치스와프 바인베르크(Mieczysław Weinberg, 1919-1996)는 폴란드 출신의 러시아 작곡가로, 1919년 12월 8일 바르샤바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지휘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어머니는 극단의 배우였다. 이러한 환경은 후에 바인베르크가 오페라를 비롯한 극음악에 두각을 드러내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바인베르크는 어려서부터 작곡을 시작했고 10살이 되던 해에는 아버지가 일하던 극장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곤 했다. 12살이 되던 해에는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해 요제프 투르친스키((Jozef Turczinski)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피아니스트로서 두각을 드러낸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바인베르크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기 직전인 1939..
글 이민희 음악평론가, "고전오페라, 그리고 한국의 창작오페라의 발전을 위한 고민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대한민국공연예술제 대구-유네스코 음악제 2021 대한민국 오페라 네트워킹 데이, 대구오페라하우스 별관 2층 카메라타, 2021.09.10. 1. 고전오페라와 창작오페라의 구분 오페라를 뭉뚱그려 하나의 덩어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카테고리’로 나누어 세부적으로 생각해야 함. 즉 와 같은 창작오페라와 와 같은 서양의 고전오페라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필요. 이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의외로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낮음. 이런 상황은 한국 오페라계 전체의 규모가 크지 않아서 생긴 일. 하지만 다양한 작품에 대한 지원사업과 앞으로 진행될 신진 오페라 작곡가들에 대한 모니터링, 그리고 관객..
신화란 “종교적 교리 및 의례의 언어적 진술”로, “초자연적인 존재의 행위를 통해 하나의 실재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박혁거세(朴赫居世) 신화는 씨족사회의 시작과 근본을 서술하며, 수로신화나 단군신화 등은 특정 시기 국가의 건국이나 역사적 믿음 등을 형상화한다. 또한 신화는 동아시아나 유럽, 아프리카 등 각 지역의 특성을 담고 있는 만큼 모든 문화권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신화 가운데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익숙한 것은 아마도 그리스·로마 신화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발생하여 로마 제국으로 이어진 이 일련의 이야기들은 제우스와 헤라, 디오니소스 등의 다채로운 신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기반이 되는 지리적이고도 문화적인 공동체가 서양문화의 기본이 되..
클래식 음악은 본래 ‘절대음악’이라는 맥락에서 연주되고 해석되었으며, 이는 ‘소리’를 제외한 그 어떤 상상이나 감각적 사유를 결벽증적으로 금지하는 것에 가까웠다. 따라서 연주자들은 늘상 검은색 옷을 입고 근엄하게 무대에 올랐다. 하지만 기술의 발달은 음악 청취와 작곡에 완전히 새로운 환경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도 디지털미디어는 “각각의 매체를 기반으로 형성된 각각의 예술 장르를 하나로 통합”해버렸다. 즉 디지털을 기반으로 하는 작업 환경 안에서 이미지, 텍스트, 소리 등은 모두 ‘데이터’ 형태로 치환되며, 이런 가운데 각 요소들 간의 결합 및 상호 변환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원활히 이뤄지게 되었다. 따라서 21세기 음악 문화 안에서는 음악과 미술 분야의 결합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
최근 큰 사랑을 받는 현대음악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첫째, 어쿠스틱 위에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결합시킨다는 점, 둘째, 과거의 클래식 음악으로부터 가져온 재료를 활용한다는 점, 셋째, 영상이나 이미지 등을 음악과 결합시킨 작업을 선보이거나 영화음악 등의 형태로 대중을 만난다는 점, 넷째, 조성을 기반으로 하는 화성 그리고 반복을 통해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니멀 음악의 흔적을 보여준다는 점. 이런 음악들은 보통 포스트 미니멀 음악, 신조성주의, 포스트 클래식, 일렉트로니카, 앰비언트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대부분의 음악이 이어폰을 사용한 ‘개인적인 청취’에 적절한 사운드를 구사하며, 유럽 소도시의 테크노 클럽에서부터 아시아의 대규모 페스티벌에서 이르기까지 지역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예부터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과감히 도전하는 수많은 작곡가들이 존재했고,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의 경계 넘기는 1980년대부터 활발했다. 최근에는 이런 경향이 보다 심화되어 ‘고전음악’에서 ‘현대음악’으로의 시간적 점프는 물론, 밴드의 프론트맨에서 영화음악가로의 행보 변경, 클래식 음악과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교류, 전통적인 악기와 새로운 매체의 결합 등 다채로운 형태의 경계 넘기가 자행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영상음악·대중음악·클래식음악·대중음악 분야의 작곡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니코 뮬리, 클래식 음악의 적자에서 다양한 스타일을 넘나드는 다매체 작곡가로 (Nico Muhly, 1981-) 1981년 미국 동부의 버몬트 주에서 태어난 니코 뮬리는 줄리어드 대학교에서 존 ..
알파벳을 ‘계이름’으로 변환해 음악 안에 집어넣는 작곡기법은 오랜 시간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절대음악과 표제음악, 성악음악과 기악음악의 긴 줄다리기 안에서 ‘텍스트에 기반한 순수한 선율’이라는 독특한 영역을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음악이론가 자를리노(Gioseffo Zarlino, 1517-1590)는 이 기법을 ‘단어에서부터 유도해낸 주제’라고 설명하며 ‘소제토 카바토’(Soggetto Cavato)라 명명했다. 이를테면 바흐를 의미하는 알파벳 “B-A-C-H”는 독일어 계명으로 “시♭-라-도-시”가 되는데, 이 음들을 작품 속 주요 선율 동기로 사용하는 것이다. 음악적 모노그램으로도 불리는 이 기법은 단어의 알파벳 중 계이름과 일치하는 것을 추려 음의 열로 만든다. 이와 같은 ‘글자와 음의 병..
마녀의 숲에서 만난 19세기 음악의 절정 1890년의 어느 날, 작곡가 엥겔베르트 훔퍼딩크(Engelbert Humperdinck, 1854-1921)는 여동생 베테(A. Wette)의 요청으로 그림형제(Brothers Grimm)의 「헨젤과 그레텔」(Hänsel und Grethel)을 바탕으로 한 대본에 음악을 붙이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은 베테의 아이들을 위한 작품이었고, 친숙한 구전 선율을 바탕으로 한 네 개의 노래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동생의 집에서 음악을 들은 가족들은 이것을 발전시켜 징슈필(Singspiel)로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하고, 훔퍼딩크 역시 새로운 희극 오페라의 텍스트를 고민하던 차에 이 생각을 받아들여 정식 오페라 작곡에 착수하게 된다. 완성된 오페라의 반응은 어땠을까? 훔퍼..
그 어떤 요소와도 연계되지 않은 ‘순수한’ 음악회 경험이 가능한가? 마치 무인도에서 홀로 존재하는 음악처럼, 그 자체가 무인도 같은 음악회가 존재하는가? 홀로 음악회장에 가서 공연을 본 후 이 음악회에 대해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이 음악회에 대한 어떠한 글귀도 읽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필자가 음악학자 스몰(Christopher Small)의 저서 『뮤지킹 음악하기』(Musicking: the meanings of performing and listening)를 읽었던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스몰은 이 책에서 음악회의 사회적 맥락을 논한다. 그에 의하면 음악회는 과거에 작곡된 음악을 재상연하거나 단순히 재청취하는 활동이 아니며 음악회에서는 청중과 음악의 복합적인 관계가 형성..
2018 실내악작곡제전 II 프리뷰 유사한 편성의 곡이 예닐곱 개 등장하는 음악회에 앉아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단일한 잣대를 상상하고 음악을 듣게 된다. 이를테면 “어느 곡이 가장 복잡한지” 혹은 “어느 곡이 가장 최신의 기법을 쓰는지” 쫒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수년째 열리는 실내악작곡제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실내악작곡제전은 다양한 시공간에서 초연된 각기 다른 작품을 한데 모은 음악회라는 사실이다. 5월 9일 연주될 실내악작곡제전 II의 첫 곡은 원로 작곡가 나운영의 1942년 동경제국음대 졸업작품이며 이어지는 곡은 ‘작곡21’, ‘음악과 영상 창작집단NOW’, ‘한국악회’, ‘창악회’, ‘21세기악회’ 등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작곡 동인(同人..
라벨의 사진을 검색하다 보면 종종 그가 고양이를 안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고양이는 작을 때도 있고 두 손으로 안아야 할 만큼 클 때도 있다. 사진 속 고양이는 샴(siamese cat)이다. 라벨은 샴 고양이를 여러 마리 키웠고 7년에 걸쳐 작곡한 오페라 안에는 암수 고양이가 부르는 듀엣이 포함되어 있다. 음악사에서 고양이를 키웠거나 고양이에게서 영감을 받아 곡을 쓴 작곡가는 수없이 많다. 르네상스 작곡가 오를란도 라소(Orlando di Lasso)의 (Oh Lucia, miau, miau)에서부터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의 (L. 499), 그리고 쇼팽의 와 사티의 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이런 작곡가 리스트에서 라벨은 단연 특별하다. 라벨과 고양이의 이야기는 1차 대전 이 그..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그리고 비잔틴제국이 등장하면서 중세가 시작됐다. 특히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는 안정적인 생활이 이어지면서 곳곳에 있는 수도원과 성당을 중심으로 중세 문화가 꽃을 피웠다. 그렇게 8세기 말 최초의 단성성가 모음집 (Tonarium)이, 10세기에는 원시적인 형태의 종교극이, 11세기 이후에는 라틴어 가사를 갖는 단성 노래가 널리 불리게 된다. 중세는 기독교문화가 절정을 이뤘던 시기다. 따라서 중세 음악은 당대의 기독교 신앙과 건축 및 예배 안에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21세기 서울에 살고 있는 우리가 중세 음악을 과거에 향유되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우리는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자가 아니며, 이 음악을 들으며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
미니멀리즘 음악은 의도적으로 리듬이나 선율, 화성 등을 단순화시킨 작곡의 한 스타일을 말한다. 이 음악은 ‘최소한의 요소로 만들어진 음악’이라 부를 수 있으며, 그 이름을 빌려 온 미니멀리즘 미술과의 연관성을 통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보통 미니멀리즘 미술은 장식적인 것이 빠져있고 기하학적인 점이 강조되며 표현적인 테크닉이 회피된 것이라 묘사되는데 이는 미니멀리즘 음악을 설명하는 말로도 설득력이 있다. 미니멀리즘 음악은 몇몇 ‘미니멀리즘 음악의 테크닉’을 사용하는 음악으로도 정의할 수 있다. 이를테면 미니멀리즘 음악은 반복을 자주 활용하며 화성적으로 정체되어 있는 음악이다. 또한 이 음악은 저음 지속음(drone)이나 지속적인 비트 혹은 맥박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흐르는 펄스(pulse)를 갖는다. 점진..
용량이 꽉 찬 컴퓨터는 버겁다. 자연스럽게 몇 개의 폴더를 열어보고, 그 중 몇 개를 끌어다 ‘휴지통’에 떨군다. 익숙한 풍경이다. 휴지통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철 지난 노래들, 받아놓고 듣지 않는 노래들, 무엇인지 모르는 노래들이 너절한 파일명에 매달려 있다. 너무나 일상적으로 컴퓨터와 핸드폰 그리고 타블렛에서 주기적으로 폐기되는 것들. 음악은 어떻게 버려지는가? 음악의 육체 신촌 향 뮤직에 가면 아직도 레코드를 판다. 어머니의 20대가 이랬을까? 레코드 표지에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패션을 한 가수들이 보인다. 누렇게 바래고 쭈글쭈글해진 비닐을 벗기면 번쩍번쩍한 광을 내는 알맹이가 보인다. 레코드가 가진 ‘물성’은 탄력 없는 어머니의 피부 아래에 숨겨진, 생기발랄했던 어린 그녀를 닮았다. 그..
2014년 4월 22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소프라노 나탈리 드세이(Natalie Dessay)의 내한공연에서는 시작 전부터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세월호 사고 때문이었다. 일부 관객들은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음악 듣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연주자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가수 드세이는 막이 오르자마자 애도의 말을 건넸고, 본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준비해 온 애가 (Du dist die ruh)을 불렀다. 관객들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연주회의 ‘애가’는 관객들 그리고 연주자가 음악회를 진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면죄부’였다. 굳이 화려한 댄스음악이 아니더라도 세월호 이후 ‘노래 부르기’ 더 나아가 ‘음악하기’는 더없이 죄송하고 송구스러운 것이었다. 침묵 속에 갇힌 음악 세월호 사건이 일..
2010년은 홍대의 인디씬과 정치를 말할 때 특별한 해다. 그 해 홍대의 가장자리에서 ‘두리반 운동’이 있었다. 두리반 운동을 경험한 음악가들은 자신들이 음악하기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독특한 음악을 만들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일련의 과정을 홍대의 ‘가장자리’에서 벌어진 음악과 정치라는 시각으로 바라본다. 90년대 중반. 홍대와 인디밴드, 그 둘의 결합이 그 자체로 힘을 가지던 시절이 있었다. 청년들은 홍대입구역에 내려 한참을 휑한 거리를 걸어 구석에 자리 잡은 ‘드럭’을 찾아가곤 했다. 화실들 사이로 클럽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그때,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면 제법 신선한 음악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당시 홍대는 날것과 새것으로서의 잠재력을 가진 에너지 넘치는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