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회에 대한 글쓰기 그리고 글읽기

2020. 1. 3. 02:23

그 어떤 요소와도 연계되지 않은 ‘순수한’ 음악회 경험이 가능한가? 마치 무인도에서 홀로 존재하는 음악처럼, 그 자체가 무인도 같은 음악회가 존재하는가? 홀로 음악회장에 가서 공연을 본 후 이 음악회에 대해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이 음악회에 대한 어떠한 글귀도 읽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필자가 음악학자 스몰(Christopher Small)의 저서 『뮤지킹 음악하기』(Musicking: the meanings of performing and listening)를 읽었던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스몰은 이 책에서 음악회의 사회적 맥락을 논한다. 그에 의하면 음악회는 과거에 작곡된 음악을 재상연하거나 단순히 재청취하는 활동이 아니며 음악회에서는 청중과 음악의 복합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이런 맥락 안에서 음악을 지칭하는 단어는 명사형인 음악(music)이 아니라 동사형인 음악하기(musicking)가 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내가 스몰의 글을 읽으며 진정 짜릿했던 순간은, 음악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이나 ‘뮤지킹’이라는 혁명적인 개념을 확인했을 때가 아니었다. 나는 스몰이 지적한 사항들을 소리가 아닌 그의 글을 통해 이해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글을 읽고 난 후 내가 음악회에서 마주치는 풍경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좀 더 명확히 말하면, 나는 스몰이 관찰한 음악회 청중 중 한 사람으로서 음악회의 다양한 활동에 동참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스몰이 서술한 것들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거나, 눈앞의 풍경과 소리를 조합해 의미화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몰의 글을 읽고 난 후에는 음악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을 그가 언급했던 방식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아니, 나는 스몰의 글을 읽고 난 후 이전에 참석했던 수많은 음악회까지도 새롭게 경험할 수 있었다.

음악회에서의 나의 경험이 스몰의 글에 의해 재정의되는 모습은 음악회 ‘경험’이 그 자체로 독립적인 현상이 아니라 음악회 이외의 다른 요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서두에 언급한 “그 어떤 요소와도 연계되지 않은 ‘순수한’ 음악회 경험이 가능한가”에 대한 필자의 답은 ‘불가능하다’라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극도로 내성적인 사람은 홀로 음악회를 즐기고 이에 대해 개인적인 메모도 적지 않은 채 이 기억을 영원히 봉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소수의 예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음악회 경험은 음악회를 둘러싼 다양한 활동과 연계되어 있다. 그리고 음악회와 연계된 다양한 활동 중에서도 음악회에 대한 글쓰기와 글읽기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동시대 미디어 환경 및 공연예술 특유의 성격을 바탕으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맥클루언(Marshall McLuhan)은 하나의 미디어 안에는 항상 이것과 짝을 이루는 또 다른 미디어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를 동시대 미디어 환경에 적용해 보면 인터넷 및 SNS, 신문 기사나 웹진 안에 ‘텍스트’라는 또 다른 미디어가 담겨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주목할 점은 인터넷, SNS, 신문, 웹진 등 텍스트를 포함한 동시대 미디어가 음악회를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환경 안에서 음악회에 대한 글쓰기와 글읽기는 음악회에서 동떨어진 별개의 활동이 아니다. 음악회에 대한 경험이 인터넷을 비롯한 동시대 미디어로 매개되는 과정에서 ‘텍스트’ 형태로 전유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음악회에 대한 글쓰기와 글읽기가 음악회 경험의 확장이자 연속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매일 매일의 공연이 완전히 새로운 이벤트로 존재한다는 ‘공연예술’의 특성 역시 음악회에 대한 글쓰기와 글읽기를 장려한다. 매일 밤의 유일무이한 이벤트는 이것이 얼마나 고유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행위(글쓰기)와 이에 대한 동의(글읽기)에 의해 더 단단한 개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열흘 동안 동일한 프로그램으로 연주되는 베토벤 교향악은 매일 밤의 차이를 드러내는 섬세한 리뷰에 의해 온전히 새로운 이벤트로 명명될 수 있다.

음악회에 대한 글쓰기와 글읽기가 그 자체로 매력적이라는 점도 지적될 수 있다. 음악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은 청각신호인 소리를 시각이미지인 텍스트로 전환하는 과정이며, 음악에 대한 글을 읽는 것은 시각이미지인 텍스트가 읽는 이의 마음속에서 청각신호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이는 음악에 대한 글쓰기와 글읽기가 시각과 청각을 끊임없이 오가는 활동이며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감각 비율을 지속적으로 재조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다른 감각을 끊임없이 전환하는 활동은 한 가지의 감각만을 사용하는 활동에 비해 훨씬 더 흥미롭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음악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검색하고 기사를 읽으며, 음악회에 대해 글을 쓴다. 자신하건데, 음악회를 보고 나와 이 경험을 발설하지 않는 자는 드물다. 그것이 블로그의 글이든, 친구와의 문자든, 리뷰든 간에 음악회 관람의 끝은 대부분 글쓰기 혹은 글읽기로 마무리되며, 음악회의 시작 역시 글로 매개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가끔 마주치게 되는 흡족한 리뷰는 그날 대면했던 음악회의 경험을 구체화하고 완성한다.

축음기의 초기 이름은 그래머폰(gramophone)이었다. 이 이름은 그 안에 들어있는 또 다른 단어인 그래머(grammma)가 암시하듯 ‘귀에 들리는 문자’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래머폰은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이 기존 미디어를 포섭해 청중의 음악 경험을 확장시킨 사례다. 미래의 음악회 경험 역시 새롭게 등장할 미디어와 함께 새로운 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최근 미디어 환경에서는 ‘이미지’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다만 음악회에 대한 글에 한정한다면, 글과 이미지는 서로 상충된다기보다는 보완적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음악회에 대한 사진은 짧은 글귀와 함께 떠돌아다니며 웹진 속 이미지는 글과 함께 게재된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초에는 음악회 경험 상당수가 여전히 텍스트 형태로 확장되며 이것은 인터넷에 기반하고 있다. 물론 음악회에 대한 느낌을 ‘요리’나 ‘춤’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음악회를 보고 나와서 ‘요리’를 하는 것보다는 ‘글’을 쓰는 것이 더 쉽고 자연스럽다.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초에는 말이다.

 

웹진 [그라모프], (20170506)

사진출처: kr.linkedin.com/company/auditorium-theatre-of-roosevelt-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