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Maurice Joseph Ravel)의 샴고양이

2017. 11. 2. 21:21

라벨의 사진을 검색하다 보면 종종 그가 고양이를 안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고양이는 작을 때도 있고 두 손으로 안아야 할 만큼 클 때도 있다. 사진 속 고양이는 샴(siamese cat)이다. 라벨은 샴 고양이를 여러 마리 키웠고 7년에 걸쳐 작곡한 오페라 안에는 암수 고양이가 부르는 듀엣이 포함되어 있다.

음악사에서 고양이를 키웠거나 고양이에게서 영감을 받아 곡을 쓴 작곡가는 수없이 많다. 르네상스 작곡가 오를란도 라소(Orlando di Lasso)의 <오 루치아, 야옹, 야옹>(Oh Lucia, miau, miau)에서부터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의 <고양이 푸가>(L. 499), 그리고 쇼팽의 <고양이 왈츠>와 사티의 <고양이 노래>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이런 작곡가 리스트에서 라벨은 단연 특별하다.

라벨과 고양이의 이야기는 1차 대전 이 그가 자리 잡았던 오래된 별장에서 시작된다. 그는 파리 근교의 정원이 딸린 별장 ‘벨베데르’에서 고양이를 키우며 곡 작업을 했다. 랑부이 숲 근처에 있었던 이 작은 별장은 아름답고 조용한 곳이었다. 그리고 사실 라벨은 고양이를 키우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자신의 성적 지향을 드러내지 않았던 동성애자였다.

 

1929317일 그의 고양이 Mouni를 안고 있는 라벨

 

라벨은 자신이 고양이의 언어를 이해하고 있으며 고양이들도 자신의 말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 때 고양이들의 기분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실제로 라벨을 취재했던 한 신문기자는 라벨이 고양이와의 대화를 “확신하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래서 라벨은 자신이 쓰고 있던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L'Enfant et les sortilèges, 1917-1925)에 흰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가 부르는 듀엣을 집어넣었는지 모른다. 이 듀엣에는 사람의 언어로 된 가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야옹’ 소리만 가득하다.

고양이 듀엣이 삽입된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은 어린이를 위한 ‘판타지 리릭’이라 불린다. 발레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극이며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환상적이고 동화같은 이야기다. 의자, 중국식 찾잔, 루이 왕조풍의 팔걸이의자, 잠자리, 박쥐, 다람쥐, 큰 시계가 등장하고 이 물건들이 말을 하며 노래를 부른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어린아이가 말썽을 부리지 말고 부모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다. 흰고양이와 검은고양이 복장을 한 성악가들은 오페라의 첫 장면에서부터 무대를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니며, 무대 뒤 난로 앞에 웅크려 앉아 서로를 핥아주기도 한다.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에서 찻잔으로 분장한 오페라 가수들

 

고양이 애호가 스카를라티가 <고양이 푸가>를 썼을 때, 혹은 쇼팽이 <고양이 왈츠>를 썼을 때 음악 안에 묘사되는 고양이란 그저 특정 음형의 반복이다. 예컨대 고양이를 다루는 기존의 곡들은 이 생명체의 본질을 포착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곡들이 매력적이지 않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고양이의 우아한 움직임과 특이한 습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떠올려보면 쇼팽의 <고양이 왈츠>는 그저 ‘빙빙돌기’일 뿐이고 사티의 <고양이 샹송>은 그저 카바레풍의 ‘흥겨운 노래’일 뿐이다.

 

[영상 1] <어린이와 마술> 섹션 3 고양이 듀엣 (6:14초부터)

https://www.youtube.com/watch?v=c2BCyDlUKMk

 

하지만 라벨의 “고양이 듀엣”에는 우리가 알던 바로 그 고양이가 등장한다. 이 작품에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음악 및 라벨의 화성이 만들어내는 멜랑콜리함이,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훈련된 유연함이, 그리고 음과 음 사이를 미끄러지는 글리산도 기법이 고양이를 표현한다. 말하자면 이산(離散)적이고 유리된 음정 사이를 계속해서 연결하려는 움직임과 소리들이 고양이의 대화를 꽤 실감나게 그려낸다. 라벨은 음과 음 사이의 공간에서 고양이를 포착한다.

 

Sam Kalda의 책 OF CATS AND MEN 속 라벨 삽화

 

고양이에 관한 책을 쓴 레나테 저스트는 그녀의 고양이가 음악을 듣는 광경을 묘사한 적이 있다. “모차르트의 5중주가 울려 퍼지면 내 고양이는 발을 서로 가지런히 포개고 조용히 숨을 쉬면서 잠을 잔다. 알반 베르크의 돌림노래나 러시아 작곡가 슈니트케의 현악기 연주자를 위한 곡이 울려 퍼지면 고양이는 놀랍게도 코를 골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이든의 바리톤 삼중창이 울려 퍼지면 고양이의 귀는 민감하게 이리저리 움직인다. 슬라이드 기타 소리가 나면 고양이는 신경이 거슬린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내가 휘파람을 불거나 혹은 어떤 멜로디를 함께 따라 부르면, 고양이는 유감스럽게도 혼란스럽고 화가 난 듯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마치 이 특이한 소리가 과연 나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의심하는 눈초리로...”

그렇다. 저스트의 고양이에게 라벨의 듀엣을 들려준다면 분면 고양이는 음악에 맞추어 대화를 시도할 것이다. 라벨은 음과 음으로 이뤄진 사람의 노래와 음과 음 사이의 공간에 존재하는 고양이의 노래 모두를 이해하는 작곡가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라벨의 고양이 듀엣은 20세기의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늘 탐구해 오던 미분음과 소음, 더 나아가 비인간의 소리까지를 고양이를 매개로 아주 위트있게 건드리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참고자료

Detlef Bluhm, Katzen Spuren, 두행숙 역 고양이 문화사, 들녘, 2008.

Sam Kalda, Of Cats and Men, TenSpeedPress, 2017.

Benjamin Ivry, Maurice Ravel: A Life. Welcome Rain Publishers, 2000

음악지우사 저, 라벨, 음악세계, 2002.

 

웹진 [그라모프], (2018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