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숲에서 만난 19세기 음악의 절정

 

1890년의 어느 날, 작곡가 엥겔베르트 훔퍼딩크(Engelbert Humperdinck, 1854-1921)는 여동생 베테(A. Wette)의 요청으로 그림형제(Brothers Grimm)헨젤과 그레텔(Hänsel und Grethel)을 바탕으로 한 대본에 음악을 붙이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헨젤과 그레텔>은 베테의 아이들을 위한 작품이었고, 친숙한 구전 선율을 바탕으로 한 네 개의 노래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동생의 집에서 음악을 들은 가족들은 이것을 발전시켜 징슈필(Singspiel)로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하고, 훔퍼딩크 역시 새로운 희극 오페라의 텍스트를 고민하던 차에 이 생각을 받아들여 정식 오페라 작곡에 착수하게 된다.

완성된 오페라의 반응은 어땠을까? 훔퍼딩크도 반신반의 했지만, 결과는 예상외의 대성공이었다. 18931223일 바이마르에서의 초연 지휘를 맡았던 슈트라우스(R. Strauss)는 걸작이라는 찬사를 보냈으며, 이듬해인 18941013일 베를린에서 바인가르트너(F. Weingartner)가 지휘한 오페라를 관람한 황제 역시 작품을 칭찬했다. 이후 1894년 런던에서 있었던 영국 초연을 시작으로 1905년의 미국 메트로폴리탄 공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나라에서의 무대가 모두 열화와 같은 반응을 얻었다. 그렇게 훔퍼딩크는 <헨젤과 그레텔>을 통해 아무도 알지 못하는 무명 작곡가에서 벗어나, 바그너(R. Wagner)와 슈트라우스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하는 아름다운 음악을 쓰는’ 19세기 작곡가로 기억되기에 이른다. 이는 수많은 대중을 극장으로 불러 모은 메르헨 오페라가 음악사에 공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낭만주의 오페라와 공명한 메르헨

전래동화로 번역되는 메르헨’(Märchen)은 본래 꾸며낸 소재로 구성된 짧은 운문이나 하층민들 사이에서 떠돌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일컫는다. 특히 구비문학으로서의 메르헨은 신화 혹은 전설과 유사한 신비로운 이야기로서, 신화가 지배계층의 권력 구도나 상징, 신성 등을 복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에 비해 좀 더 유쾌하고 재미있으며, 비현실적인 배경 위에 행복한 결말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주목할 점은 무한계성과 초월성, 더 나아가 성취할 수 없는 것을 동경했던 19세기 낭만주의가 도래하면서,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이야기로 가득 찬 메르헨이 고도의 문학 양식으로 격상됐다는 점이다. 이런 분위기 안에서 독일의 낭만주의 작가들이 창작메르헨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우리가 잘 아는 그림형제 역시 성적인 묘사나 폭력적인 장면이 난무했던 기존의 이야기를 어린이가 읽기에 좋은 교훈적인 텍스트로 다시 써 출판함으로써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동시에, 메르헨은 오페라와 결합해 독특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즉 이성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선과 악의 대립, 초월자가 문제를 해결하고 악인은 벌을 받는 드라마틱하고 명쾌한 서사 등은 오페라의 대본으로 활용되기에 제격이었고, 그렇게 메르헨 오페라’(Märchenoper)가 유행하며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의 진수를 담게 된다. 보통 메르헨 오페라는 메르헨오퍼로 불리거나 요정 오페라로 번역되기도 하며, 이와 연관된 장르로 마술 오페라’(Zauberoper) 그리고 프랑스의 오페라 페리’(Opéra féerie) 등이 언급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베버(K. M. v. Weber)<마탄의 사수>(Der Freischütz)가 메르헨에 기반한다는 사실은 메르헨 오페라의 낭만주의적 특성을 증명한다. 이 오페라는 아펠(J. A. Apel)이 쓴 메르헨 모음집 유령 책(Gespensterbuch)에 수록된 이야기를 기초로 킨트(F. Kind)가 대본을 쓴 작품으로서 사격대회, 악마의 유혹, 마법 탄환, 고백과 구원 등의 강렬한 모티브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런 환상적인 이야기가 베버의 낭만주의적 작곡기법과 만나 스산한 분위기의 웅장하고 묵직한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이외에도 수 없이 많은 메르헨이 오페라 대본으로 쓰였다. 로시니(G. Rossini)는 그림형제가 쓴 신데렐라 이야기 <아셴푸텔>(Aschenputtel>을 기반으로 오페라 <라 체네렌톨라>(La Cenerentola)를 작곡해 큰 인기를 얻었으며, 그 외에도 마스네(J. Massenet)를 비롯한 다양한 작곡가가 신데렐라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들었다. 인어공주 모티브는 마르슈너(H. Marschner), 로르칭(A. Lortzing), 호프만(E. T. A. Hoffmann)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오페라화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푸케(Fouqué)운디네(Undine)와 안데르센(H. C. Andersen)인어공주에 기초해 드보르작(A. Dvořák)이 작곡한 <루살카>(Rusalka)가 널리 알려져 있다.

메르헨 오페라가 원작 메르헨을 어느 정도로 변형하고 새로운 인물을 추가하는지는 작품마다 다르다. 다만 메르헨이 구비문학에 기초했던 것처럼, 메르헨 오페라의 주요 선율은 민요나 구전 선율, 어린이 노래 등에서 취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19세기 낭만주의를 체화한 작곡가들이 만들어내는 이 부류의 오페라들은,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이 환상적인 음향을 보여주되, 노래는 또렷한 선율선을 갖고 아름답게 흐르는 경우가 많다. 이 지점에서 메르헨 오페라는 서사적인 측면에서 뿐 아니라 음악적 측면에서도 남녀노소 누구나 빠져들기 쉬운 대중성을 겸비하게 된다. 이런 속성은 메르헨 오페라를 브리튼(B. Britten)과 힌데미트(P. Hindemith) 그리고 바일(K. Weill), 더 나아가 코플란드(A. Copland)로 이어지는 20세기의 어린이 오페라전통과 연결시킨다. 이 경우 어린이 오페라는 난해한 음악을 쓰던 20세기의 작곡가들이 단순하고 쉬운 음악을 통해 더 많은 청중에게 다가가고자 했던 도전적인 장르로 기억할 수 있다.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의 낭만성, 그리고 영구성

<헨젤과 그레텔>은 그림형제의 동명 메르헨을 바탕으로 하는 3막의 오페라로, 1812년에 쓰인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집(Kinder- und Hausmärchen)을 원작으로 한다. 그림형제의 버전 안에서 오빠인 헨젤과 여동생인 그레텔은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란 남매다. 지독한 흉년이 든 어느 해 남매의 계모는 아이들을 숲에 버리고, 숲에 사는 마녀는 이들을 유인해 살을 찌워 잡아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훔퍼딩크의 오페라 안에서는 원작의 비극적인 모티브가 옅어지고 작품의 배경인 독일의 일젠슈타인 숲이 좀 더 환상적인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림형제의 원작에서는 과자의 집이 거의 유일하게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오페라 안에서는 잠의 귀신이슬 요정그리고 ‘14명의 천사가 새롭게 등장하며 이야기의 소재 및 줄거리의 흐름이 좀 더 아기자기하다. 오페라 속 아이들이 길을 잃게 되는 숲은 마냥 어둡고 두려운 장소가 아니며, 아이들은 친모와 함께 살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버려지는 게 아니라 딸기를 따려 숲에 갔다가 우연찮게 길을 잃는다. 사실, 원작과 오페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작품의 결말에 있다. 오페라 속 부모는 숲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을 걱정하며 이들을 찾아 나서고, 마지막 순간에는 모든 주인공들이 행복하게 재회한다.

오페라의 서곡은 극적이면서도 시적이다. 특히 호른 앙상블로 시작하는 부드러운 코랄풍 짜임새는, 곧 그 소리의 영역을 넓혀 아득한 이야기의 깊숙한 곳으로 빠져드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다양한 악기를 옮겨가며 미세하게 변화하는 오케스트레이션은, 차마 바그너의 영향을 숨기지 못한 섬세하고도 능숙한 훔퍼딩크의 작곡 테크닉을 보여준다. 느린 첫 부분 이후에는 쏟아져 내리는 듯한 현악기와 목관악기의 움직임이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자아내며, 현이 만드는 부드러운 튜티와 대위적 섹션을 넘어서면 총천연색 소리로 구성된 입체적이고도 거대한 음향에 도달한다. 이런 짜임새 가운데 4박자의 단순한 선율이 메들리처럼 곳곳에 실려 나오는데, 이것들은 앞으로 오페라 안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노래의 일부다. 이런 장치를 통해 오페라의 서곡은 극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극 전체를 조망하는 구도를 띄게 된다. 이런 방식 또한 19세기 독일 오페라의 전통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독특한 오케스트레이션, 마녀를 비롯한 다양한 인물과 사건을 묘사하는 유도동기(Leitmotiv), 뻐꾸기 소리 등을 연상시키는 음향적 처리 등이 인상적이다. 또한 작품 안에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든 노래와 대사가 음악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바그너 스타일의 음악극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작품 전면에 드러나는 노래들은 여전히 민요나 구전 선율을 기반으로 한 탓에, 부드러운 화음과 쉬운 리듬이 지배적이다. 긴 기악적 반주를 삽입해서 발레를 감상할 수 있는 부분을 따로 만들었다는 점, 그리고 랄라라라, 랄라라라와 같은 의성어가 포함된 노래를 부른다는 점도 흥미롭다. 결국 이런 다양한 기법을 통해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21세기에도 여전히 전 세계의 수많은 극장에서 끊임없이 공연되는 메르헨 오페라의 전형이 되었다.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의 절정에서 탄생해, 긴 시간을 넘어 일종의 고전 레퍼토리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글 이민희/음악평론가)

SPO매거진』 2021년 12월호 (20211111) https://ebook.seoulphil.or.kr/Viewer/5SNSIGFA4UOZ

 

SPO 2021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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