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인베르크, 아직은 낯선 이름

2023. 12. 20. 13:40

글·이민희 음악학자


미에치스와프 바인베르크(Mieczysław Weinberg, 1919-1996)는 폴란드 출신의 러시아 작곡가로, 1919년 12월 8일 바르샤바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한 지휘자이자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어머니는 극단의 배우였다. 이러한 환경은 후에 바인베르크가 오페라를 비롯한 극음악에 두각을 드러내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바인베르크는 어려서부터 작곡을 시작했고 10살이 되던 해에는 아버지가 일하던 극장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곤 했다. 12살이 되던 해에는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해 요제프 투르친스키((Jozef Turczinski)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피아니스트로서 두각을 드러낸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바인베르크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기 직전인 1939년 바르샤바를 떠나 소련 민스크로 향하게 된다. 바인베르크는 폴란드에서 이미 <피아노를 위한 자장가> 그리고 <현악사중주 1번> 등을 작곡한 경험이 있었지만, 1939년 러시아의 민스크 콘서바토리에서 발라키예프 및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였던 바실리 졸로타료프(Vasily Zolotaryov) 밑에서 작곡을 공부하며 본격적인 작곡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얼마 후인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바인베르크는 다시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로 대피하고 이곳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일하며 당시 저명한 배우이자 연극 감독이었던 솔로몬 미호엘스(Solomon Mikhoels)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 여기에서 바인베르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인 ‘쇼스타코비치’와의 교류가 시작한다. 바인베르크는 이때를 회상하며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과 같은 경험이었다 [...] 나는 나의 새로운 작품이었던 <니키티나>(Nikitina)를 쇼스타코비치에게 보여줬으며, 쇼스타코비치와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속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1943년, 쇼스타코비치의 권유로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겨 음악활동을 이어간다. 

모스크바에서 바인베르크는 1943-1948년에 이르는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무려 30개의 작품을 쏟아내며 열정적으로 음악에 몰두한다. 하지만 1948년 스탈린의 반유대주의 숙청이 시작되었고, 즈다노프(Andrei Zhdanov)에 의해 세계주의와 형식주의적 특성을 보여주는 작품들, 그리고 유대인 예술가의 작품이 공격당한다. 바인베르크의 작품도 이런 분위기 아래에서 한동안 연주가 금지되었고, 그는 연극이나 서커스를 위한 글을 쓰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러던 중 1948년 1월 13일 장인 미홀스가 비밀경찰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바인베르크도 1953년 1월 부당한 이유로 체포된다. 그렇게 바인베르크는 영하의 감옥에 수감되어 3개월을 보내며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1953년 스탈린이 죽으면서, 그리고 바인베르크를 지속적으로 변호해 준 쇼스타코비치의 편지 덕분에 이런 수감생활도 끝이 난다.

이후 바인베르크는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작곡을 하고 피아니스트로 연주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간다. 생애의 마지막 20년 동안 그는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으며, 특히 이 시기에 썼던 여러 편의 오페라는 그가 그간 교향곡과 합창곡을 쓰면서 연마한 기술을 총망라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죽기 직전 크론병을 앓았으며, 죽기 2달 전에는 정교회로 개종했다. 

바인베르크는 전 생애에 걸쳐 정치적 풍랑의 한 가운데에 있었음에도 인간적으로는 초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의 음악 안에는 증오와 인종차별 등에 대한 경험이 녹아들어있으며, 특히 탄압, 유대인의 고통, 어린이가 느꼈을 상실 등이 뚜렷하게 감지된다. 바인베르크는 “내 작품들 중 다수는 전쟁이라는 주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운명, 그리고 내 친척들의 비극적인 운명 때문에 그렇게 쓰여졌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바인베르크의 열렬한 팬으로서 그의 작품에 찬사를 마다하지 않았고, 그 외에도 루돌프 바르샤이(Rudolf Barshai), 에밀 길렐스(Emil Gilels), 레오니드 코간(Leonid Kogan), 키릴 콘드라신(Kirill Kondrashin),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 쿠르트 잔데를링(Kurt Sanderling), 예브게니 스베틀라노프(Yevgeny Svetlanov) 등의 다양한 러시아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바인베르크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녹음했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까지도 이어져, 올림피아(Olympia)에서는 여러 종류의 음반을 발매했고, 이후 낙소스, Chandos, ECM, 도이치 그라모폰 등에서도 그의 음악을 앞 다투어 녹음했다. 

특히 2006년에 결성되어 최근까지도 활발한 연주를 보여주는 아르카디아 사중주단(Arcadia Quartet)은 2021년 바인베르크가 남긴 17개의 현악4중주 중 2번과 5번, 그리고 8번을, 그리고 2022년에는 1번과 7번, 11번, 2023년에는 4번과 16번을 Chandos에서 발매했다. [Chandos CHAN 20158 (2021년), Chandos CHAN 20174 (2022년), Chandos CHAN 20180 (2023년)]

기돈크레머가 2019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챔버 음악’도 자주 언급되는 음반으로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세 개의 작품>을 비롯하여, <피아노 트리오 가단조>(Op. 24),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6번>(Op. 136) 등을 수록하고 있다.  [Deutsche Grammophon – 483 7522 (2019년)]

기돈크레머가 협연하고 그레메라타 발티카가 연주한 ‘바인베르크 라이브 인 Lockenhaus & Neuhardenberg / 2012&2013’도 빼놓을 수 없다. 2014년 ECM에서 발매된 이 음반에는 다닐 트리포노프가 반주를 맡고 기돈 크레머가 연주한 <소나티네>(Op. 46)를 비롯하여 <바이올린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체르티노>(Op. 42), <교향곡 10번>(Op. 98) 등이 수록되었다. [ECM Records – ECM 2368/69 (2014년)]

낙소스에서 2018년 발매된 ‘바인베르크 교향곡 13번 & 세레나데’ 음반의 경우, 블라디미르 란데(Vladimir Lande)가 지휘하는 시베리안 스테이트 심포니오케스트라(Siberian State Symphony Orchestra)의 연주로 바인베르크의 <교향곡 13번>과 <세레나데>(Op. 47)을 녹음하였다.  [Naxos 8.573879, A0103065297-0101]

다넬 콰르넷(Quatuor Danel)은 바인베르크의 현악사중주를 최초로 전곡 녹음한 것으로 유명하며, 많은 관객에게 바인베르크의 작품을 소개해왔다. 다넬 콰르텟은 2007년 저먼 클래식스 레이블(cpo)에서 4번과 16번 현악사중주를 발매한 것을 시작으로,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까지 총 6장의 음반에 걸쳐 17개의 현악사중주 전곡을 녹음했다. [cpo 777 313-2 (2007년), cpo 777 392-2 (2008년), cpo 777 393-2 (2009년), cpo 777 394-2 (2010년),cpo 777 566-2 (2011년),cpo 777 587-2 (2012년)]

이렇게 바인베르크의 수많은 음반이 발매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의 이름은 여전히 낯설다. 그의 음악은 기본적으로는 소련 안에서만 널리 알려진 상태였고, 한동안 냉전이 계속되는 바람에 소련을 제외한 나라에서 그의 음악을 듣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따라서 전세계적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가 죽은 지 10년이 지난 후 모스크바에서는 그의 오페라 <패신저>(The Passenger)를 공연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바인베르크의 음악이 더 많은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이 오페라는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바인베르크의 대표작이기도 하며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을 걸작으로 묘사한 바 있다. 

바인베르크의 음악은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 미야코프스키(Myaskovsky), 바르톡, 말러 등의 영향 아래에 있다. 한 평론가는 그를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와 함께 소련의 세 번째 위대한 작곡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의 상당수는 어린 시절의 기억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과 연결되어 있다. 특히 순수하고 평온했으나 안정감을 느꼈던 어린 시절이 파괴되는 감각이 음악 안에 자주 등장하며, 이것이 음악적으로 묘사된다. 동시에 바인베르크는 신고전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측면을 보여주는데, 이에 따라 그의 작품은 명확성과 균형을 갖추고 보편적인 조화와 통합의 철학을 반영한다. 많은 작품이 표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추상적이며 절대음악적인 성향을 띈다. 

바인베르크는 상당한 수의 작품을 남겼는데, 무대 작품으로는 앞서 언급한 <패신저>를 비롯하여 <마돈나와 병사>(Madonna and the Soldier, 1970), 그리고 마지막 오페라인 <이디엇>(The Idiot, 1987)을 비롯한 총 7편의 오페라, 발레와 오페레타 등을 다수 작곡했다. 기악음악으로는 총 25개의 교향곡이 대표적인데, 그 중에서도 마지막 교향곡은 바르샤바의 게토에서 죽은 유대인들을 기리는 <카디시>(Kaddish)이다. 이외에도 관현악 편성의 모음곡, 교향시, 챔버 심포니, 랩소디 등을 작곡했으며, 실내악 분야에서는 17개의 현악4중주 및 다양한 편성의 독주 소나타를 남겼다. 특히 그는 3개의 바이올린 소나타, 4개의 비올라 소나타, 4개의 첼로소나타, 1개의 더블베이스 소나타들은 서정적인 것에서부터 연주자에게 극악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것까지 그 스타일이 다양하다. 더 나아가 그가 남긴 여러 편의 협주곡은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을 위한 것들이다. 

쇼스타코비치와의 인연 및 영향은 바인베르크를 이야기할 때 반복해서 언급되는 부분이다. 바인베르크는 쇼스타코비치와 음악을 공부하거나 배운 적은 없지만, 쇼스타코비치가 그보다 12살이 더 많았기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이들은 동료적 관계였고, 모스크바 아파트의 같은 블록에 살면서 정기적으로 만났다. 바인베르크는 <교향곡 12번>에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여럿을 인용하기도 했으며, <교향곡 5번>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4번>을 연상시킨다. 다만 이러한 사례들이 단순히 바인베르크가 쇼스타코비치에게서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곳곳에도 바인베르크의 모티브나 그로부터의 영향이 드러난다. 다만, 바인베르크의 스타일과 쇼스타코비치의 스타일이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이 둘이 ‘실제로’ 어떠한 영향을 서로 주고받았는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논쟁중이다. 한 음악학자는 이미 60년대에 바인베르크의 스타일이 개별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는 쇼스타코비치와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2023년 12월, "[RECORD COLUMN] 바인베르크, 아직은 낯선 이름", 월간객석

작곡가 바인베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