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상의 작곡가들

2023. 8. 24. 14:50

예부터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과감히 도전하는 수많은 작곡가들이 존재했고, 클래식 음악과 대중음악 사이의 경계 넘기는 1980년대부터 활발했다. 최근에는 이런 경향이 보다 심화되어 ‘고전음악’에서 ‘현대음악’으로의 시간적 점프는 물론, 밴드의 프론트맨에서 영화음악가로의 행보 변경, 클래식 음악과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교류, 전통적인 악기와 새로운 매체의 결합 등 다채로운 형태의 경계 넘기가 자행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영상음악·대중음악·클래식음악·대중음악 분야의 작곡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니코 뮬리, 클래식 음악의 적자에서 다양한 스타일을 넘나드는 다매체 작곡가로 (Nico Muhly, 1981-)

1981년 미국 동부의 버몬트 주에서 태어난 니코 뮬리는 줄리어드 대학교에서 존 코리글리아노와 크리스토퍼 라우스에게 작곡을 배운 미국 클래식의 정통파로, 이력 초기부터 미니멀 음악의 대가 필립 글래스(P. Glass) 밑에서 키보드를 연주하고 그를 위해 ‘컴퓨터 사보가’로 일한 경력은 유명하다. 뮬리는 2011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로부터 <두 소년>(Two Boys, 2011) 및 <마르니>(Marnie, 2018) 등의 논쟁적이고도 동시대적인 작품을 위촉받게 되는에 이를 통해 가장 촉망받는 클래식 음악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뮬리의 음악은 예리하면서도 정교하게 짜여진 리듬적 레이어 위에 ‘확장된 조성’을 바탕으로 하며, 풍부한 색채감이 특징이다. 특히 전통적인 어쿠스틱 앙상블 뿐 아니라 동시대 전자음악 작곡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전자악기나 전자음향까지를 망라한다.

뮬리의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은 그를 일반적인 콘서트홀 뿐 아니라 ‘영화음악’이나 대중음악 씬에도 등장시켰는데, 이런 그의 활동 중 가장 눈에 띄는 작업 중 하나는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ldry) 감독의 2009년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의 영화음악이다. 이 OST는 현악기의 느린 진행으로 분위기를 채워주거나 가벼운 짜임새로 영화의 시간적 흐름을 보완하는 것 등, 선배 영화 음악가의 정통적 기법을 성실히 지키는 것은 물론, 어딘지 묘한 감각을 드러내는 화성과 악기를 사용함으로써 이 음악이 마냥 ‘양산된’ 스테레오 타입의 배경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뮬리의 음악이 있었기에, 영화 <더 리더>의 세련되고도 동시대적인 분위기가 입체적으로 되살아난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OST](The Reader OST, 2009)

Lakeshore Records (LKS 34061)

 

막스 리히터, 고전과 현대 그리고 클래식과 영화음악을 종횡 무진하는 탐험가(Max Richter, 1966-)

1966년 독일 북서부 하멜 린에서 태어난 막스 리히터는 영국의 에딘버러 대학교와 왕립음악원에서 작곡을 배웠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대 작곡가 베리오(L. Berio)를 사사하는 등 일반적인 클래식 작곡학도들과 유사한 길을 걷는다. 하지만 리히터의 본격적인 음악가로서의 첫 행보는 ‘여섯 대의 피아노’로 구성된 극히 독특한 앙상블인 ‘피아노 서커스(Piano Circus)’에서 연주를 하며 곡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새로운 영역의 음악가들과 함께 경계를 넘는 것으로서, 이후에도 그는 전자음악 그룹인 퓨처 사운드 오브 런던(Future Sound of London)과 함께 작업을 했으며, 싱어송라이터 바시티 버니언(Vashti Bunyan) 등의 제작자로 일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리히터의 음악은 클래식 뿐 아니라 팝, 전자음악, 미니멀 음악 등의 요소가 풍부하게 배합된 상태가 되었다.

리히터의 대중적 인기는 그가 2004년 발매했던 음반 [블루 노트북](The Blue Notebooks) 두 번째 트랙 <햇빛의 자연 속에서>(On the Nature of Daylight)가 영화 <스트레인지 댄 픽션>(Stranger than Fiction, 2006)에 삽입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음악은 영화를 위한 음악이 아니었으나 이후 <셔터 아일랜드>(2010) 및 <디스커넥트>(2012)를 비롯하여 수 년에 걸쳐 무려 16개의 영화와 텔레비전 음악에 쓰이게 되면서 리히터를 ‘영화음악’작곡가로 각인시킨다.

한편 리히터의 주특기인 ‘과거의 클래식 음악’과 ‘현대 음악’의 조화를 꾀하는 능력은 2012년 발매한 음반 [사계 리콤포즈드]에서 절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바로크 음악가 비발디(A. Vivaldi)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를 재해석한 것으로, 원곡의 일부 모티브를 가져와 반복하고 확장시켜 리히터의 방식으로 재배열한다. 사실상 대중이 기억하는 비발디 음악의 ‘잔상’이 리히터에 의해 더 정교한 방식으로 재조합되기에 자연히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과거의 음악’을 ‘현재의 음악’으로 되돌려놓았다는 찬사를 얻게 된다.

[사계 리콤포즈드](Recomposed By Max Richter: Vivaldi, The Four Seasons)

Deutsche Grammophon (476 5040)

 

조니 그린우드, 라디오헤드의 어린 소년이 어느새 영화음악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Jonny Greenwood, 1971-)

한 시대를 풍미하고도 여전히 정상에 서 있는 영국 밴드 ‘라디오헤드(Radiohead)’에서 수줍게 기타를 치던 소년은, 이제 데뷔 수십 년이 지나며 전 세계 영화음악 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감독이 되었다. 라디오헤드 시절의 조니는 소위 ‘실로폰’ 등의 독특하고 귀여운 악기로 <노 서프라이즈>(No Surprise) 등의 음악을 몽환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곤 했는데, 이미 많은 이들은 이때부터 조니가 소리에 대한 비범하지 않은 감식력으로 평범한 밴드가 낼 수 있는 사운드를 확장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조니를 지켜본 이들은 그가 자라 어느 지점에 도달할지 늘 궁금해 했을 터, 현재 그는 가장 매혹적이고도 기괴한 영화를 만들어 내는 폴 토마스 앤더슨(Paul Thomas Anderson) 감독과 여러 편의 영화음악을 작업하고 있다.

화려하고 초현실적이며, 정신이 번쩍 드는 독특한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앤더슨 감독은 조니와 2007년 <데어 윌 비 블루드> 작업을 통해 처음 만났으며, 2018년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팬텀 스래드>를 비롯해 다양한 음악을 함께하게 된다. 조니의 첫 번째 영화음악 작업이 2003년의 <바디송>이기에, 그의 전반적인 영화음악 행보에 앤더슨 감독의 영향력은 엄청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헐리우드의 영화음악들이 ‘사운드 위주의’ 작업을 통해, 기억에 남는 선율이나 음악적 특징 없이 영화 전체에 ‘소리가 녹아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비해, 조니의 음악은 영화 안에서 명확하게 인지 가능한 형태로 등장한다. 특히 <팬텀 스레드>의 경우, 화려하고 고혹적인 의상과 미술만큼 그의 음악이 아름답고도 또렷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그만큼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팬텀 스레드 OST](Phantom Thread -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

Nonesuch (564777-2)

 

보비 클릭, 가장 섬뜩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완성하는 섬세한 사운드의 직조자(Bobby Krlic, A.K.A. The Haxan Cloak)

보비 클릭은 ‘The Haxan Cloak’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영국의 작곡가로, 2011년과 2013년에 본인의 개인 음반을 발매하는 것은 물론 뷰욕(Björk), 칼리드(Khalid) 등의 잘 알려진 대중음악가의 프로듀서로도 왕성한 활동을 한 바 있다. 다만 보비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된 작업은 2019년 오컬트 영화계의 천재적 후계자로 떠오른 아리 에스터(Ari Aster) 감독의 공포영화 <미드소마>(Midsommar)의 OST 작업이다. 이 영화는 아리 에스터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었는데, 전작이었던 <유전>(Hereditary, 2018)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일반적인 공포영화의 분위기보다는 극단적으로 아름다운 이미지와 기이한 낯섦이 화면 가득 지배하는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인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새로운’ 측면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가장 큰 장치 중 하나가 바로 보비의 음악이다.

[미드소마 OST]는 그 영화의 배경이 낯선 시골에서 자행되는 집단적이고도 토속적인 축제인 것에 걸맞게, 전통악기에서 들어봄직한 독특한 주파수의 현악기를 등장시키는 것은 물론, 군중의 기괴한 웅성거림 등을 음악화 한 것이 눈에 띈다. 물론, 공포영화이기에 긴박한 장면에서는 긴장감을 부가시키는 기능적인 음악을 사용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보비의 음악은 어느 구간 하나라도 허투루 흘려보낼 수 있는 형태는 아니며, 오롯이 그 소리와 악기의 음질, 그리고 앙상블의 형태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형태로 등장한다. 이를테면 푸른 초원에 전자음향이 노골적으로 덧입혀지며, 바람이 부는 평온한 만찬 자리에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조율을 하는 듯한 음향을 삽입되는 식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음악의 존재감이 그를 가장 눈에 띄는 영화음악가로 각인시켰다.

[미드소마 OST](Midsommar -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

Milan (M2-37089)

 

한스 짐머, 현대 영화음악의 표준과 고전을 스스로 창시한 인물(Hans Zimmer, 1957-)

프랑크푸르트 암마인에서 태어난 독일태생 짐머는, 소년시절 엔리오 모리코네가 영화음악을 작업한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옛날 옛적 서부에서>를 보고 감명을 받아 영화음악의 길로 들어선다. 초기에는 영국의 밴드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그의 본격적인 활동은 헐리우드 입성과 동시에 큰 주목을 받은 <레인 맨>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레인 맨>을 통해 단번에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며, 이후 수없이 많은 레퍼토리를 작업함으로써 점차 헐리우드의 가장 대표적인 영화음악 작곡가로 거듭난다.

작업 초기에는 전자음향을 구사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사운드 트랙을 만들었지만, 점차 거대한 스튜디오를 갖추게 되었고, 종국에는 ‘사운드 디자인’에 특화된 외부 인력과 긴밀하게 협업하면서 영화 전체에 완벽하게 ‘밀착된’ 한스 짐머 특유의 스코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특히 짐머의 음악은 2000년대를 넘어가면서부터 ‘미니멀리즘’ 기법을 받아들여 극히 단순하된 짜임새와 선율을 반복시키는 형태로 변모하게 되었는데, 그런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인터스텔라 OST]다. 이와 같은 방식의 영화음악은 현재는 현대 영화음악의 표준 혹은 고전이라 불릴 만큼 대형 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법이 됐다. 이처럼 사운드디자인과 음악, 음향 효과를 넘나드는 그의 교묘하고 섬세한 작법은 영화 안에서 음악이 따로 ‘독립되지 않은’ 상태로, 영화의 내러티브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인터스텔라 OST](Interstellar - Original Soundtrack)

WaterTower Music (WTM39546)

 

류이치 사카모토, 모두의 마음에 추억으로 남은 음악(Ryuichi Sakamoto, 1952-)

오시마 나기사(Oshima Nagisa) 감독의 1983년 작품 <전장의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이 영화의 OST였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메인 테마를 흥얼거릴 수 있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사카모토의 음악은 동양적인 음계에 독특한 전자사운드가 결합된 것이었으며, 이후 <마지막 황제>(1987), <고하토>(1999) 등 굵직한 영화음악의 작곡가로 활동하며 일본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자리 잡았다. 주목할 것은 사카모토가 단지 영화음악 스튜디오에만 처박혀 있는 작곡가가 아니라, 전자음악 뮤지션과의 협업을 진행하며, 혁신적이고도 새로운 개인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애초에 <전장의 크리스마스> 음반 역시 앰비언트 음악가 데이비드 실비언(David Sylvian)과 함께한 것이었는데, 특히 최근에 가장 주목받는 전자음악가와의 협업으로는 글리치 혹은 마이크로사운드(microsound) 뮤지션으로 손꼽히는 알바 노토(Alva Noto)와의 작업들이다. 이 둘은 2015년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영화음악을 함께 하는 것으로 대중에게는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사실 2002년 래스터-노튼 음반사에서 발매한 <브이리온>(Vrioon)을 시작으로 2019년까지 무려 9장의 음반을 함께 작업한 사이다. 알바 노토와의 작업은 정적이고 차가우며, 짧게 지속되는 전자적 소음을 독특한 형태로 조합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부류의 음악은 클래식과 전자음악, 앰비언트와 미니멀 음악의 경계를 넘는 것으로 사실상 ‘영화음악가’라는 인기에 가려진 사카모토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브이리운](Alva Noto + Ryuichi Sakamoto – Vrioon)

Raster-Noton (r-n 50)

 

"경계선상의 작곡가들", 월간객석 레코드칼럼, 2022년 10월호

Jonny Greenw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