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오페라, 그리고 한국 창작오페라의 발전을 위한 고민들
글 이민희 음악평론가, "고전오페라, 그리고 한국의 창작오페라의 발전을 위한 고민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대한민국공연예술제 대구-유네스코 음악제 2021 대한민국 오페라 네트워킹 데이, 대구오페라하우스 별관 2층 카메라타, 2021.09.10.
1. 고전오페라와 창작오페라의 구분
오페라를 뭉뚱그려 하나의 덩어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카테고리’로 나누어 세부적으로 생각해야 함. 즉 <사의 찬미>와 같은 창작오페라와 <아이다>와 같은 서양의 고전오페라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필요. 이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의외로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낮음.
이런 상황은 한국 오페라계 전체의 규모가 크지 않아서 생긴 일. 하지만 다양한 작품에 대한 지원사업과 앞으로 진행될 신진 오페라 작곡가들에 대한 모니터링, 그리고 관객의 수요 조사 등 오페라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
고전오페라: 외국의 작곡가에 의해 작곡되어 큰 인기를 얻었으며 그 저작권이 대부분 소멸된 오페라. 다양한 연출가에 의해서 무대에 올라가는 서양의 작품. 미국의 작곡가 필립글래스(G. Philip) 1970년대에 작곡한 <해변의 아인슈타인>은 고전의 느낌을 주지만, 라이선스 등의 문제가 남아있어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오페라. 이 경우 ‘고전’에 포함시킬지의 여부는 애매모호.
창작오페라: 1950년 현제명이 작곡한 <춘향전>을 필두로 한국의 작곡가들에 의해 작곡된 오페라. 외국의 오페라단에서 위촉‧초연한 진은숙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윤이상의 작품, 그리고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국적의 작곡가들이 발표하는 오페라를 창작오페라로 넣어야 하는지는 애매모호
그 외의 오페라: 국내에서 오페라의 외형으로 작곡되었지만, 그 작품의 홍보나 대중과의 접점을 위해 그 자신의 장르를 ‘오페라뮤지컬’ 혹은 ‘합창뮤지컬’ 등으로 바꾸어 발표하는 작품들. 작품의 내용과 프로덕션은 온전한 오페라인데, 명칭을 바꾸어 발표하는 경우, 한국의 ‘창작오페라’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드물게 대중성을 겸비한 작품의 목록을 가려버림
뮤지컬의 경우 ‘라이선스뮤지컬’, ‘논레플리카’, ‘레플리카’ 개념이 널리 통용. 한국의 오페라 안에서도 이와 같은 ‘고전오페라’, ‘창작오페라’, 혹은 외국의 고전을 연출가가 많은 변형을 가한 ‘레지테아터 오페라’와 같은 다양한 개념이 널리 인식되어야 함. 이러한 개념과 장르의 뚜렷한 분류를 통해서야만, 오페라의 각 장르가 섬세하게 지원을 받고, 발전하는데 도움이 됨.
2. 고전오페라의 발전을 위한 몇 가지 제안
1) 순수한 관객을 위한 ‘고전오페라’의 중요성
일반적인 음악애호가가 생각하는 ‘오페라 관람’이란 베르디와 모차르트, 그리고 푸치니, 바그너 등의 고전오페라를 보러가는 것. 이들은 공연에 가기 전 음악을 미리 수십 번 들어서 공부하고, 관련된 희곡이나 텍스트를 미리 책을 사 천천히 읽어보며, 작품을 보고 와서는 관련 오페라의 DVD를 사 모으거나 유튜브 등에서 다시 찾아 들으며 한번 본 공연의 감동을 곱씹게 됨. 이들에게 ‘오페라’란 창작오페라를 의미하지 않음.
즉 ‘고전오페라’는 그 음악을 함께 즐긴 사람들, 식사자리, 인맥형성, 대화, 등 사회문화적인 수없이 많은 활동과 연결되어 있음. 반면 ‘창작오페라’의 관람은 온전히 그 ‘작품’ 즉 오페라의 음악만 대본만 남아 그것이 논의됨.
따라서 일반적인 관객들이, 소위 ‘고상한 예술작품을 향유’한다는 측면에서 오페라를 보러 온다고 했을 때, 이들은 당연히 ‘창작오페라’가 아닌 ‘고전오페라’를 선택할 수밖에 없음. 이처럼 고전오페라를 보고 동반되는 수없이 많은 활동은,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이야기했던 취향의 형성을 통한 문화상품의 영향력 발휘라는, ‘클래식 예술’의 본연의 가치 중 하나를 상기시킴.
→ 유료 관객을 원하는 오페라단 및 오페라 프로덕션은 ‘창작오페라’가 아닌 ‘고전오페라’를 주력으로 다뤄야 함. 그렇게 함으로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청중들, 그리고 문화생활을 정기적으로 하는 잠재적인 관객을 오페라공연장으로 끌어 모을 수 있음.
2) 고전오페라의 새로운 관객으로서의 ‘여성’
최근 문화예술계에서 공통적으로 인지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항 중 하나는 실제로 문화예술을 구매하는 성별이 ‘여성’이라는 점. 보다 구체적으로는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요즘 가장 주목받는 소비층은 40대 여성으로서, 최근의 비혼주의 경향, 높아지는 초혼연령 등과 맞물려 문화예술에 큰 비용을 지불하는 것으로 나타남.
- 이런 현상은 출판계, 뮤지컬계, 클래식음악계, 무용계를 망라한 공통적인 현상.
- 특정한 장르의 뮤지컬 시장에서는 여성관객의 비중이 95퍼센트를 넘어감
- 문학계에서는 신진문학가들 중 여성비중이 높아짐
- 출판기념회의 객석은 거의 다 여성이라는 통계
- 클래식 음악계는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스타뮤지션의 등장과 함께 30-40대의 새로운 팬덤이 음악계 안으로 흡수되었고, 이 과정에서 여성관객이 크게 유입
→ 따라서 많은 오페라제작자와 오페라프로덕션 관계자들은 ‘여성관객’이라는 대상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함.
이제까지의 많은 문화예술들, 특히 무대예술은 ‘남성관객’의 시선과 ‘남성으로서의 보는 권력’을 중심에 두고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며, 무대 위에서 헐벗고 가련하게 연기하는 것은 ‘대부분 여성’. 하지만 최근 여성관객의 비중 자체가 크게 변화하면서, 이러한 구도에도 알게 모르게 수정이 가해지고 있는 실정.
- 브리튼의 오페라 <루크레티아의 능욕>에서는 무대 위에서 여주인공을 강간하는 장면이 클라이맥스로 등장하고, 이제까지 많은 언론에서는 이 오페라를 이러한 과격한 신이 있다는 것으로 홍보해왔지만, 이러한 것에 대해 발상의 전환이 필요
- 여성에게 폭력적인 장면을 보는 여성관객이 불쾌함을 느낄 수 있음
- 여성들은 특정한 장면에 문제제기를 하고, 집단으로 사이버 불링을 행할 수도 있으며, 커뮤니티 등을 통해 오페라단을 공격할 수도 있음.
물론 성녀와 창녀로 이분화된 전형적인 오페라 속 여성 주인공들을 이제는 모두 무대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것은 아님. 카르멘은 여전히 매력적인 여주인공이며, 그녀의 아리아를 듣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오페라 극장을 찾음.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의 경우 페미니즘적으론 논란이 있는 배역이며, 극의 전개 또한 요즘의 관점으로는 가스라이팅에 가까운 형태. 하지만 여전히 모두가 비올레타의 노래를 듣고 싶어함
-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고전 속 여성주인공들을 몰아내자는 것이 아니라, 여성주인공에 대한 묘사나 서술 등이 그 작품이 처음에 만들어질 때와 달리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음을 늘 유념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 비올레타가 창녀로서 남자를 위해 가련하게 죽는 스토리는 동일하지만, 비올레타의 주체성이나 여성으로서의 자기결정 등의 ‘새로운 관점’을 이해한 상황에서 극이 진행되면, 이 작품을 보는 여성 관객들은 깊은 감동을 받을 수 있음. 다만, 이러한 점을 생각하지 않은 채 극히 표면적인 텍스트에만 치우쳐 극을 올릴 때에는, 언젠가 문화예술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관객들에 의해 오페라는 ‘과거의 장르’로 치부되어 외면 받게 될수 있음.
최근의 예로, 국립오페라단에서 국립극장의 개관 70주년을 맞아 올렸던 한국오페라 베스트 컬렉션에 제기되었던 비판
- 장일남의 <원효>, 웨이드의 <순교자>, 임준희 <천생연분>, 이영조 <처용>을 무대에 올림
- 네 편의 작품을 올리는 탓에 부득이하게 작품의 하이라이트만을 선별하여 공연했는데, 하필이면 <순교자>를 제외한 세 작품에서 클라이맥스로 선택된 부분이 지극히 전형적이고 재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는 ‘보수적인 여성에 대한 입장’을 대변
- <원효>에 등장하는 여성은 원효대사를 유혹하는 역할이었고, <처용>에서는 역신에게 유린을 당하는 역할이었으며, <천생연분>에서는 가부장의 일부로서의 여성
- 작품 선정과 클라이맥스 선별이 몇몇 평론가들에 의해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지적받음.
이제 여성의 강간 장면이 작품 안에 등장해도 그것이 클라이맥스로 인지되지 않으며, ‘또 저거야?’라는 생각으로 응수하는 여성이 많아짐. 또한 가련한 여주인공이 남자를 위해 희생하고, 목숨을 바쳐 정절을 약속하고 하는 구도가 이제는 너무도 구태의연하게 다가옴. 고전의 대본을 바꿀 수는 없음. 대신 고전 텍스트를 유지한 상황에서 이를 새로운 방향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두어야 하며, ‘여성재현’에 대한 문제의식을 늘 가지고 있어야 함.
3) 지자체 등과 연계한 오페라 전후의 다양한 프로그램 계발의 필요성
고전오페라를 관람한다는 것은 단순히 오페라의 음악과 무대를 보는 것에 그치지 않음. 관객들은 오페라를 보러가는 과정에서 음악을 찾아듣고, 책도 읽어보고, 오페라가 끝나면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며 집에서는 DVD를 구매해 틀어놓는 일련의 과정을 거침. 단순히 15만원의 티켓 값으로 3시간 동안의 자릿값만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연관람 이전과 이후에 계속되는 수많은 ‘경험’을 사는 것.
→ 따라서 오페라단에서는 이와 같은 관객의 고전오페라 관람 경험이 ‘복합적이며 지속적인 일상에서의 경험’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공연 전후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계발 및 진행해야 함.
오페라관련 미리보기 강의들: 기본 중의 기본으로서, 이런 강의를 통해서 오페라에 대한 기대감을 높일 수 있는 것은 물론 ‘공부하면서 문화예술을 즐기길 원하는’ 문화예술향유자들을 오페라계로 불러들일 수 있음.
풍월당 or 무지크바움 등의 예: 오페라 관련 강의나 부대행사 등을 단독으로 진행하고 있는 장소로, 오페라에 대한 ‘열공’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음.
공부하는 청중들: 오페라는 한 번의 관람을 위해 수개월 전부터, 혹은 수년전부터 미리 곱씹고 공부하며 준비하는 장르로, 기대감과 함께 무대에 올라가는 오페라의 경우 티켓값이 얼마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구입
오페라단에서 운영하는 어린이합창단: 미래의 관객을 키우기 위해 필요
시민오페라합창단: 몇몇 지방오페라의 초연 때 운영. 1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자체와 협의하여 상시 운영되도록 해야 함. 성악 향유층 역시 오페라의 잠재적인 열혈 관객이기 때문
4) 지방인재보다는 스타캐스팅
지방의 오페라단의 경우 몇몇 학교에 학연 및 지연으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음. 하지만 지방 관객의 입장에서는 주민의 공연예술관람 욕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처사. 지방에 사는 관객이 굳이 서울에서 하는 오페라를 보러가는 이유는 오페라단의 네임벨류보다는 오페라 주역가수 때문
- 즉 현재 가장 높은 주가를 올리고 있는 김순영 소프라노, 길병민 바리톤, 연광철 베이스 등의 가수가 제주도의 오페라단에서 주최하는 오페라에 나온다면 전국의 수많은 관객이 표를 수 초 만에 매진시킬 것.
- 리허설마다 먼 지역에 연고가 있는 성악가를 데리고 와서 진행하는 불편함, 유명성악가가 원하는 컨디션이나 상황을 맞추어주기 어렵다는 점, 무엇보다 페이가 많이 들어 재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 등의 현실적인 문제가 있지만, 그럼에도 스타캐스팅은 가치가 있음.
다른 분야의 상황
- 오페라보다는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의 무용계 중 발레 분야의 경우, 몇몇 스타 무용수를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팬덤이 형성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기본적인 관객몰이가 가능
-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2000년대 중반 쇼팽 콩쿠르를 기점으로 등장한 ‘임동혁 피아니스트’를 중심으로 새로운 소비층이 생성됨. 임동혁은 ‘클래식계 아이돌’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인기몰이를 하며 새로운 클래식 관객을 대거 유입시킴
- 기본적으로 엔터테인먼트는 ‘스타’의 존재가 가장 중요하며, 그를 보고자 많은 관객이 멀리에서도 기꺼이 돈을 지불. 스타캐스팅의 중요성은 아무리 말해도 부족함이 없음.
3. 창작오페라의 발전을 위한 몇 가지 제안
창작오페라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지점은 오페라를 만들어도 보러올 관객은 없고, 제작비는 더 많이 든다는 점. 이런 상황을 기본 전제로, 어떤 발전방향이 논의될 수 있을지 고민.
1) 창작오페라는 국고로 운영되는 국공립 기관에서 주도적으로 창작
지방의 오페라단에서 대작 창작오페라를 제작할 경우 오페라단이 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부지기수. 사실 이런 경우 작품의 창작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노출되서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창작오페라가 흥행에 성공하기 어렵고 제작비를 회수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긴 문제. 특히 지방의 오페라단이 창작오페라를 만들고자 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악순환이 계속됨
첫째, 안정적인 자금 확보를 위해 지자체의 지원금에 의존하며, 이에 따라 지자체의 입맛에 맞는 소재와 주제로 오페라를 기획. 이 과정에서 오페라 자체의 작품성이나 작가적 의지 보다는 그 소재를 ‘지역의 향토 인물 캐릭터화 사업’이나, 지역의 ‘문화 컨텐츠 개발’과 맞물려 설정. 예를 들어 세종특별시가 시의 문화테마 발굴의 일환으로 최근 마을로 조성하고 있는 화가 ‘장욱진’과 연계하여 오페라 <장욱진>을 만든 것이 대표적. 이런 예는 수없이 많으며, 지방자치단체가 자리 잡은 2000년대를 기점으로 창작오페라의 반절은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창작
둘째, 지역테마를 동반한 오페라들은 서사적으로 관객을 설득시키거나, 극적인 구도를 뚜렷하게 만드는데 집중하기 보다는, 단지 ‘소재를 평이하게 제시’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음. 이미 존재하는 인물을 나쁘게 그릴 수도 없거니와, 그 인물에 대한 관점이나 해석의 방향이 너무도 뚜렷하기 때문에 ‘부침을 겪지 않는 인물’로 작품 안에 나타나게 되는 것.
→ 즉 재미없는 주인공이 만들어지고, 이런 작품들은 관객과 평론가들에게 외면
셋째, 지역기반으로 소재와 주제가 설정된 오페라 작품들은 그 이후 다른 오페라단이나 다른 지역에서 올리기가 어려워짐. 예를 들어 <선덕여왕>이라는 오페라를 부여의 문예회관에서 올리기는 힘든 법. 부여에는 부소산성이 있고, 계백장군의 신화가 있는 문화적으로 완전히 다른 경험을 공유하는 주민들이 살고 있기 때문.
→ 결국 지역기반으로 작곡된 오페라들은 해당지역에서만 공연되는 것이 보통이며, 보통 1회정도의 서울 공연을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지역공연이 힘듦. 결국 고전적인 레퍼토리로 남을 수 없음
위와 같은 악순환을 막기 위해 국내에서 운영되고 있는 대안적인 프로그램
- 국립오페라단에서 운영했던 창작팩토리 제작지원 사업
-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오페라 제작‧육성 프로그램인 공연예술창작산실
- 서울문화재단의 생애최초 창작지원 사업
→ 주로 젊은 작곡가들이나 오페라를 처음 써보는 작곡가들 등에 멘토를 붙여주고 코칭 등을 진행시키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대본가와의 긴밀한 협력을 지원.
이런 몇몇 지원프로그램은 계속해서 유지해야함. 다만 각 작품의 작품 질이 천차만별이기에 정식 오페라 레퍼토리로 생각하기 보다는 아직은 자라나고 있는 새싹 작곡가와 새로운 시도를 해보려는 프로덕션에게 많은 기회를 준다는 측면에서 운영되어야 할 것. 이 경우 실험성과 작곡가 작가의 자율성은 더 많이 보장하되, 단지 지원금을 타내려고 어설프게 무대에 한번 올리는 오페라가 아니라, 진정 창작오페라의 레퍼토리화와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작품을 잘 선별하는 것이 중요.
위와 같은 다양한 창작산실 공연이 주로 신인 작곡가들을 중심으로 ‘소규모’ 오페라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면, 그랜드오페라의 창작에 대해서는 국립오페라단과 서울시오페라단 등, 국립단체 위주의 보다 과감한 투자와 기획이 필요함. 그리고 국공립단체들을 중심으로 하는 그랜드오페라의 창작은 오페라 창작에 능한 중견작곡가를 기용하여 진행해야 함.
- 최우정 작곡가의 <1945> 그리고 이건용 작곡가의 <박하사탕> 등이 좋은 예
- 이 두 작곡가는 오페라 작곡에 잔뼈가 굵은 인물들
즉 지방의 오페라단에서 창작오페라를 올리는 것은 자금 문제 때문에 소재나 주제가 한정되고 결국은 고전으로 남지 못하는 경우가 많음. 그래서 창작오페라의 주된 주관기관은 국공립 기관이 되어야 함. 또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생애최초 창작지원이나 창작산실 등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오페라를 창작하는 ‘신인 작곡가’에게 더 집중해야 하며, 이와 별도로 국공립 기관에서는 경험 있는 중견작곡가를 기용하여 ‘그랜드오페라’의 수작들을 창작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함.
2) 독립된 음악창작 카테고리로서의 ‘소극장오페라’에 대한 인식 강화
많은 오페라 프로덕션에서 ‘소극장오페라’라는 말을 듣고 대번에 생각하는 것은 ‘돈이 적게 든다’와 ‘대중성이 있다’ 두 가지. 전자의 경우 실제로 소극장을 대관하는데 드는 돈은 대극장에 비해 적으며, 출연 인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분명히 사실. 하지만 소극장오페라는 그저 ‘대중적인 영역’이 아님.
- 소극장오페라는 “오페라를 고급예술이 아닌 연극,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로 인식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거나, “오페라가 부르주아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는 서구에서도 소극장오페라 등 오페라 대중화작업을 과제로 삼고 있다”는 의견이 자주 등장
- 또한 많은 프로덕션들은 소극장에서 작은 규모의 오페라를 ‘장기간’ 즉 상설공연함으로써 오페라를 향유하는 인구를 늘리고, 성악인의 설 곳을 마련하고자 함.
→ 이런 주장들은 소극장오페라는 무조건 대중성이 있으며, 소극장에서 하는 오페라들은 뮤지컬처럼 두달 세달 동안 많은 티켓을 팔며 공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함.
‘소극장’을 전면에 등장시켰던 연극의 소극장 운동을 살펴보면 ‘소극장’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일각 오해라는 것을 알 수 있음
- 1980년대 미리내소극장, 국립극장 실험무대, 문예회관 소극장, 바탕골소극장, 산울림소극장, 그리고 공간사랑 등에서 연극의 소극장운동이 전개
- 그 중 ‘공간사랑’은 춤, 미술, 비디오아트 등 다양한 장르의 만남 및 실험적인 작업이 이뤄지는 소극장으로 주목을 받았음. 특히 공간사랑은 “적당히 현대적인 공간의 분위기는 공간과 인연 맺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엘리트 의식”을 심어줄 수 있었고, 그것은 “밥은 먹지 않아도 예술이란 무형의 기체와 검은 커피만 마셔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 등으로 기억됨
→ 이는 소극장이라는 공간이 소수 엘리트예술가와 향유자들의 아비투스(habitus)를 확인하는 ‘문턱이 높은’ 공간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또한 소극장오페라와 ‘대중성’을 문제의식 없이 연결시키는 것은, ‘고상한 관람이 일어나는 상위 체계’로 대형 오페라를 상정하고, 이에 도달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소극장을 상상하며, ‘소극장오페라’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상설공연되는 작은 규모의 오페라에 대중들이 몰려들 것이라는 낙관론을 전제로 함
→ 하지만 2021년 현재 소극장 문화가 독립적인 영역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연극 및 뮤지컬계의 상황, 특히 상업적인 연극 및 뮤지컬이 해마다 수백 편씩 관객을 만나는 대학로의 경우에도, ‘소극장’이라는 형태 자체가 ‘대중성’으로 전부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확인할 수 있음. 단순히 소극장에서 오페라 상설공연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대중성으로 이어지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는 대극장에서 하는 <아이다>와 같은 작품에 비해서 관객을 모으기가 더 어려울 수도 있음.
따라서 ‘소극장오페라’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 본 발표자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소극장오페라’는 기존의 오페라와는 구분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음.
첫째, 소극장오페라는 ‘작은규모’의 무대를 위해 작곡된 오페라로, 1000석 이상 규모의 극장을 위해 작곡된 ‘그랜드오페라’와는 구분된다. 소극장오페라는 ‘프로시니엄 무대’가 아닌 독특한 형태의 무대와 객석 구조를 갖고 있으며, 공간의 협소함 때문에 실내악 편성이 반주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주연성악가들의 숫자 및 전체 프로덕션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다.
둘째, ‘소극장오페라’는 ‘작은 공간’에 모인 ‘소규모 관객’을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기존에 비판받던 ‘대극장’ 위주의 오페라와는 구분이 되는 소재 및 서사, 그리고 관점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기존 그랜드오페라에서는 고전문학, 영웅, 역사적 인물 등을 장엄한 오케스트레이션과 대규모 합창과 결합시킴으로써 대규모 관객의 ‘집단적 체험’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소극장에는 문학이나 철학 등에 기반하는 독특한 텍스트, 그리고 기존의 서사를 뒤집고 비트는 새로운 시선과 관점을 ‘개인이’ 감상하는 구도를 띈다.
셋째, 소극장오페라의 관객은 독특한 감각으로 무대를 바라보게 되며 이를 통해 강렬한 현전성을 체험한다. 이는 단지 라이브로 진행되는 공연을 보고 느끼게 되는 공연예술의 일반적인 속성으로서의 현전성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상자형무대, 개방형무대 등 독특한 형태의 작은 공간 안에 놓인 관객들이 제의성이나 비사실적 재현, 성악가의 육체 등과 대면함으로써 생성된다.
넷째, 소극장오페라에는 다양한 유형의 음악적이고 극적인 실험이 일어난다. 이런 실험은 소극장오페라의 제작비가 적고, 비교적 소규모의 인원이 프로덕션을 구성하며, 이미지·영상·소품 등을 다채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 기반한다. 특히 음악적으로는 무조에서 조성을 넘나드는 다양한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서부터, 극적으로는 전통적인 무대극의 형식을 빌려오는 등 다양한 방식의 실험이 시도된다.
다섯째, 소극장오페라는 변화한 연출을 통한 작품의 재해석이 자유롭다. 이는 연출가들이 ‘작은 무대’를 완전히 통제하는데 드는 장비 및 기술, 자본이 큰 무대에 비해 수월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비교적 신인 연출가에게 열려있고, 이들이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참신한 연출을 제시함으로써 극대화된다. 또한 그랜드오페라에 비해 ‘연극적인 부분’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며 관객과 밀착되어 있는 공간에서 진행된다는 점도 연출을 통한 재해석의 가능성을 증가시킨다.
예컨대, 소극장오페라는 단지 ‘대중성을 담보’하는 공간이 아님. ‘소극장오페라’는 대극장의 그랜드오페라와는 완전히 다른 창작분야로서, 그 카테고리를 구분하여 지원과 창작, 제작에 임해야 함.
3) 작곡가와 대본가의 자질이 가장 중요
너무도 당연한 사항이지만, 사실상 프로덕션에서 창작오페라를 올릴 때에 간과하게 되는 사항은 작곡가와 대본가의 자질
- 창작오페라는 오페라를 많이 써 본 작곡가가, 그리고 오페라를 잘 아는, 적어도 연극을 잘 아는 대본가가 협업해야 함
- 태어나서 단 두세 번 오페라 공연을 보았거나, 아니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연극을 본 적 없는 작곡가는 오페라 작곡을 하면 안 됨.
- 현재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오페라 작곡가 최우정의 경우 자신이 ‘음악극’ 유형의 작곡가로 특출난 평가를 받는 이유에 대해 “거의 10년 이상을 무대 마루의 먼지를 맡으며 극단 활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서울시오페라단장을 역임한 이건용 작곡가도 마찬가지. 이 작곡가의 경우 대학시절 연극반 활동을 했으며, 이십대 등 젊은 시절에서부터 중견 작곡가가 되는 과정 동안 음악극연구회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며 ‘극’에 대한 감각을 익힘.
→ 특히 대규모의 지원금을 받아 오페라를 올리고자 할 때에는 ‘중견 작곡가’를 기용해야 함. 단지 지역의 거점대학과 얽혀 있어 그 대학의 작곡가를 두고 작업을 진행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대본가가 없거나 기존에 생각했던 대본가가 수정에 대해 까다롭게 생각하는 상황에서 아마추어가 대본을 쓰는 일 등. 이런 일은 직접적이고도 가장 명확하게 창작오페라의 질을 망쳐버림.
많은 대본가들이 오페라 작업에 비협조적이고, 중견 작가의 경우 오페라의 특성도 잘 모른 채 프로덕션에 불편함만을 주는 경우가 많이 있음. 자신이 쓴 텍스트를 한글자라도 수정하면 소송을 거는 식으로 오페라의 초연을 오랫동안 막아 온 사례도 발견.
→ 하지만 이런 상황 역시 여러 사람의 협업으로 진행되는 ‘오페라 장르’의 특수성을 모르는 시인이나 소설가에게 ‘오페라 대본’을 쓰게 한 것이 가장 큰 잘못
→ 다시 강조하자면, 오페라 작곡가가 오페라 작곡에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대본가도 오페라 대본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함. 이 두 가지가 선행된 사람들에게만 작곡과 대본을 맡겨야 함.
→ 가장 위험한 것은 작곡가가 대본을 직접 쓰는 것. 이 경우 대본의 퀄리티가 생각이상으로 좋지 않음. 아무리 음악이 감동을 주고 전체 오케스트레이션이 매끄러우며, 프로덕션 과정에서 아무 문제없이 무대에 작품이 올랐다 하더라도 그 작품은 사장될 수밖에 없음. 겉으로 티가 잘 안나는 것 같지만, 마치 목소리만 낼 줄 아는 평범한 사람을 무대에 불러 오페라 주역으로 쓰는 것만큼, 작곡가가 ‘아마추어로 쓴 대본’은 절대로 좋은 작품이 될 수 없음.
4. 고전오페라, 그리고 한국 창작오페라의 발전을 위하여
오페라라는 장르는 음악, 대본, 무용, 연기, 무대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종합예술의 결정체. 아무리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득세하고 있다고 해도, 뮤지컬은 결정적으로 ‘음악의 질’이 낮은 경우가 많음. 하지만 수준높은 오케스트라와 능숙한 지휘자가 통솔하는 오페라는 무엇보다도 ‘최상의 음악’을 중심에 두고 모든 문화예술의 영역을 한데 엮어 놓는 잘 차린 만찬과 같은 품격 있는 장르.
하지만 많은 통계가 증명하고 있듯, 오페라의 유료 관객수는 정말 처참히 적으며, 많은 지방의 오페라단은 늘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음. 국고에서 나오는 지원사업이나 오페라페스티벌 등이 현재 어떤 방식으로 어떤 오페라단에게 지원되고 있는지 잡음이 생기기도 하며, 생각했던 것에 비해 턱없이 적은 지원금만이 내려와 운영을 어렵게 함.
그럼에도, 한국의 문화예술향유인구는 꾸준히 늘고 있으며, 현재의 경제규모로 보아도 충분히 더 늘어날 여력이 있음. 1950년대 현제명의 <춘향전>이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을 때 우리나라에서 오페라 티켓을 끊어 관람을 올 수 있는 잠재 관객의 수와, 2021년 오페라 <사의찬미>를 공연한다고 했을 때 티켓을 끊어 공연장에 올 수 있는 관객의 수는 수십배가 아니라 수백배가 늘어났음
→ 이와 같은 상황 안에서 오페라를 직접 만들고 오페라단을 운영하는 다양한 관계자가 머리를 맞대고 한국 오페라의 발전방향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나눌 때에만, 이렇게 잠재력있는 시장의 진정한 발전을 마주할 수 있을 것.
글 이민희 음악평론가, "고전오페라, 그리고 한국의 창작오페라의 발전을 위한 고민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대한민국공연예술제 대구-유네스코 음악제 2021 대한민국 오페라 네트워킹 데이, 대구오페라하우스 별관 2층 카메라타, 2021.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