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어떻게 버려지는가?

2014. 12. 23. 00:00

용량이 꽉 찬 컴퓨터는 버겁다. 자연스럽게 몇 개의 폴더를 열어보고, 그 중 몇 개를 끌어다 ‘휴지통’에 떨군다. 익숙한 풍경이다. 휴지통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철 지난 노래들, 받아놓고 듣지 않는 노래들, 무엇인지 모르는 노래들이 너절한 파일명에 매달려 있다. 너무나 일상적으로 컴퓨터와 핸드폰 그리고 타블렛에서 주기적으로 폐기되는 것들. 음악은 어떻게 버려지는가?

 

음악의 육체

신촌 향 뮤직에 가면 아직도 레코드를 판다. 어머니의 20대가 이랬을까? 레코드 표지에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패션을 한 가수들이 보인다. 누렇게 바래고 쭈글쭈글해진 비닐을 벗기면 번쩍번쩍한 광을 내는 알맹이가 보인다. 레코드가 가진 ‘물성’은 탄력 없는 어머니의 피부 아래에 숨겨진, 생기발랄했던 어린 그녀를 닮았다. 그래서 베란다 구석, 텔레비전 수납장 안 먼지 묻은 레코드를 버리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 자신의 몸체에 홈을 파 음악을 ‘기록’한 레코드는, 음악이 갖게 된 물성의 최대치다. 레코드에 담긴 음악의 수명은, 그 판이 소멸될 때다. 레코드는 판이 깨져야 버려진다.

그래서 아도르노는 단단한 육체를 뒤집어 쓴 ‘물신화된 음악’을 두려워했다. 아도르노의 세상에는 레코드 가게가 넘쳐났고 너도 나도 축음기와 라디오를 사던 이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 빨리 변했다. 멋지게 물화되었던 음악은 너무도 빨리 육체를 빼앗겼다.

견고한 물성은, 개인이 그 매체를 손쉽게 조작하기 시작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성을 잃기 시작한 음악은 개인의 편의를 최대한 충족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변형됐다. 15년쯤 지났을까? 중·고등학교 ‘자습시간’에 즐겨 듣던 카세트테이프가 이렇게 금세 낡아버릴지 몰랐다. 어디든 가져가기 편리했고 한손에 쏙 들어오던 플라스틱은, 그만큼 쉽게 손때가 묻었다. 마그네틱 필름 여기저기에는 곰팡이도 슬었다. 열심히 모은 노래 모음들과 정성스러운 나만의 속지가 있던 테이프들은, 이제는 이사 때마다 ‘플라스틱 재활용’으로 처박힌다. CD도 마찬가지다. 취향 따라 사 모았던 CD들, 어디든 가지고 다녔던 CD플레이어는 순식간에 쓰레기가 되었다. 음악의 육체를 보다 손쉽게 다루면 다룰수록 이 음악들은 더 많이 폐기되었다.

 

육체 없는 음악

21세기다. 음악은 이제 남의 매체, 남의 육체에 세 들어 사는 신세다. 육체 없는 음악들이 도처에 떠돈다. 음악이 거하는 공간이 음악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을 때, 음악은 ‘음원’으로 명명되고, 집 없는 달팽이보다도 더 비참한 신세가 됐다. 음원은 쉽게 버려지고, 지워지고, 기억에서 사라진다.

음원에는 ‘어머니의 젊은 시절’이나 ‘자습시간’ 같은 기억이 없다. 대신, 음원에 대해서는 모두가 ‘소비’만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해야 음원을 많이 팔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가수가 음원 수익금을 높은 비율로 가져갈까? 음원을 정액제로 팔아야 할까 아니면 종량제로 팔아야 할까? 음원은 이제 콘서트 홍보 미끼상품이며, 한 달에 5000원을 결제하면 무한대로 흘러나오는 흡음제, 차음제다. 음원은 보존되거나, 기억되어야 할 이유를 상실했다. 오히려 열렬히 ‘잊혀지길’ 바란다. 가수들은 자신의 음원이 구입되고, 재구입되는 것을 환영한다. 비슷한 타입의 음원들은 대중의 기호와 취향을 파악한 채 재생산된다. 음원 구매를 망각하고 또 다시 그 음원을 구매하는 것. 소비의 유토피아다.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아이팟을 인터넷과 네트워킹 해보자. 순간 내가 3년 전 즐겨들었던 모든 음악의 리스트가 생성된다. 과거의 내가 떠올라 몸서리 쳐진다면, 아주 손쉽게 이 환영들을 쫒아낼 수 있다. 음악 리스트 옆에 붙은 별표를 다섯 개에서 네 개로 바꿔보자. 심연에서 불현듯 나타났던 음악은 다시 어디론가 사라진다. 음원이 ‘스트리밍’이라는 형태가 된 이후에는 음원을 버리는 행위조차 숭고하다. 폴더로 들어가 어떤 음악을 버릴지, 어떤 음악이 나에게 쓸모없는지 판단하는 노력을 할 필요조차 없다. 무의식에서 혹은 의식에서 그 음악을 생각하지 않는 순간, 음악은 ‘클릭’되지 않는다. 스트리밍이란 공간 속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음악은 무인도에 갇힌 음악이다. 그 음악은 거기 있지만,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기억의 폐기

음악은 이제 육체 없이, 그리고 심지어는 ‘파일명’도 없이 희미하게 부유한다. 이 공간 어딘가에 음악의 체취가 있다면, 그것은 어릴 적 들었던 음악에 대한 기억들이다. 보드라움, 따뜻함, 어딘가에서 맡아보았던 미색의 향기를 가지는 음악적 환영. 여기에 리메이크라는 행위가 개입한다. 리메이크는 이 잔상들, 향기들, 감촉들을 채집하고, ‘음원’이라는 형태로 재가공ㆍ압축해 대중에게 판매한다. 지나간 가요의 리메이크는 최소의 돈을 들여 최대의 이익을 얻는 행위다. 세기를 풍미한 최고의 노래는 리메이크되지 않는다. 저작권료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대신 고만고만한 인기를 얻은 곡들이 수지타산 맞는 범위에서 리메이크된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새로운 음원을 만드는 것보다, 과거의 환영에 기대어 청중의 감각을 순식간에 마비시키는 것이 훨씬 쉽다. 음원은 이제 과거의 기억을 뒤집어쓰고 장렬히 소비된다.

산울림의 음악을 리메이크한 아이유의 <너의 의미>가 인기다. 아마도 2014년 가장 많은 사랑을 얻은 곡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리메이크 음원’이 차트에서 내려오고, 그 음원을 아무도 찾지 않게 될 때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미색의 공기 속에 머물던 과거의 음악은 리메이크란 이름으로 여기저기 떠돌다 결국은 ‘그다지 클릭되지 않는’ 상태가 될 것이다. 되살려내고, 다시 망각해서 버려지는 일상이다. 요즈음, 음악이 버려지는 방식이다.

 

「플랫폼」, 통권49호, 2015년 1·2월, 82-85 (20141123)

사진출처: forums.stevehoffman.tv/threads/reddingtons-rare-records-in-birmingham-to-sell-75-000-records-at-1-each-in-unprecedented-fire-sale.373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