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새겨진 이름들

2023. 8. 24. 14:29

알파벳을 ‘계이름’으로 변환해 음악 안에 집어넣는 작곡기법은 오랜 시간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절대음악과 표제음악, 성악음악과 기악음악의 긴 줄다리기 안에서 ‘텍스트에 기반한 순수한 선율’이라는 독특한 영역을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음악이론가 자를리노(Gioseffo Zarlino, 1517-1590)는 이 기법을 ‘단어에서부터 유도해낸 주제’라고 설명하며 ‘소제토 카바토’(Soggetto Cavato)라 명명했다. 이를테면 바흐를 의미하는 알파벳 “B-A-C-H”는 독일어 계명으로 “시♭-라-도-시”가 되는데, 이 음들을 작품 속 주요 선율 동기로 사용하는 것이다. 음악적 모노그램으로도 불리는 이 기법은 단어의 알파벳 중 계이름과 일치하는 것을 추려 음의 열로 만든다.

이와 같은 ‘글자와 음의 병치’가 시대를 불문하고 ‘사람의 이름’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 경우 음악은 단지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누군가를 연상시키거나 특정 인물에 대한 작곡가의 열렬한 마음을 드러내는 매개가 된다. 현장에서의 청취만으로는 그 ‘이름들’을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나중에 숨겨진 이름을 찾아내고 확인함으로써 독특한 이해에 다다를 수 있다는 점도 청중의 구미를 자극한다. 작곡가도 이를 알고 있었을 터, 이 기법은 다양한 작곡가의 손에서 긴 시간 활용되어 왔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후원자가 된 “에르콜레 1세”

데스테 가문의 에르콜레 1세(Ercole d'Este I, 1431-1505)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 페라라 지방의 공작이다. 귀족의 후원으로 예술이 융성했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로, 최고의 작곡가였던 아그리콜라(Alexander Agricola), 오브레히트(Jacob Obrecht), 이삭(Heinrich Isaac), 빌라르트(Adrian Willaert)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사실 에르콜레 공작의 영향력을 가장 두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작곡가 조스껭 데 프레(Josquin des Prez, 1450-55년경-1521년)가 그의 이름을 따서 미사 <페라라의 헤르쿨레스 공>(Missa Hercules dux Ferrariae)를 쓴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에르콜레 1세는 명실상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후원자로 남게 되었다.

조스껭의 삶 자체가 비밀에 싸여 있기 때문에 공작과 조스껭이 어떤 관계였는지, 이 작품이 몇 년도에 작곡되었는지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공작의 비서가 남긴 편지 속에는 당시 플랑드르 지방에서 활동하던 조스껭이 “200두캇(ducats)을 요구하고, 이삭은 120두캇을 요구한다”며 궁정에 이삭을 고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하지만 에르콜레 공작은 조스껭을 데려왔고, 1503년 거처를 옮긴 조스켕은 공작 밑에서 최고수준의 급여를 받으며 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전염병을 피하고자 이듬해인 1504년에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며 공작 또한 1505년에 사망하게 된다.

미사의 제목으로 사용된 “Hercules Dux Ferrarie”(페라라의 헤르쿨레스 공)이라는 단어는 각각 “e, u, e, u, e, a, i, e”의 모음을 갖고 있는데 이것을 ‘도’의 옛 계명인 ‘ut’을 포함하여 유사한 발음을 갖는 계이름으로 변환하면 각각 “레(e), 도(ut), 레(e), 도(ut), 레(e), 파(a), 미(i), 레(e)”​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선율이 미사곡 전체에서 등장하며 ‘정선율’로 사용된다. 이 경우 신을 찬미하기 위한 ‘미사’라는 장르에 신이 아닌 후원자의 이름이 제목에 등장하고 이를 정선율로 삼는 것이 사뭇 파격적이다. 이를테면 미사의 시작을 여는 ‘키리에’ 악장에서는 고음으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Kyrie, Kyrie eleison)라는 가사를 길게 노래하는데, 이 선율이 바로 “레-도-레-도-레-파-미-레”의 계이름을 갖는다. 그리고 이 선율은 다른 악장에서도 주요하게 등장함으로써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이 곡을 시작으로 다수의 작곡가들이 존경하는 후원자나 왕의 이름을 작품 안에 넣었으며, 이로부터 음악에 ‘이름을 담는’ 긴 전통이 시작되었다. 이 경우 ‘음악에 새겨진 이름들’이란 작품의 음악적인 진행이나 표현과는 상관이 없는, 일종의 음악 외적 표식에 가깝다.

 

사랑하는 그녀의 이름, “아베크”

19세기의 수많은 음악이 문학과 연관성을 갖고 작곡되었고, 특히 작곡가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음악의 본질을 포에지(Poesie) 즉 시적인 것으로 명명하였다. 이런 슈만의 음악적 색깔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으로 표제를 가진 피아노곡 <아베크 변주곡>(Variations on the name “Abegg”, Op. 1)과 <카니발>(carnival, Op. 9)이 거론되곤 한다. 흥미로운 것은 두 곡 모두 소제토 카바토 기법으로 만들어진 주제 선율과 모티브를 포함한다는 점이다.

<아베크 변주곡>의 ‘아베크’는 슈만이 만들어 낸 가상의 친구 메타 아베크(Meta Abegg)를 지칭한다. 다만 슈만의 아내 클라라가 정리한 판본에 따르면 ‘아베크’는 슈만이 흠모했던 파울리네 폰 아베크(Pauline von Abegg)를 의미하는데, 아래의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 악보 상단에는 “Der Gräfin Pauline von Abegg gewidmet”(아베크 백작부인에게 헌정함)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아베크’가 가상의 친구, 혹은 애정을 품었던 누군가를 지칭하든 간에, 단어 “Abegg”는 각각 “라(a), 시♭(b), 미(e), 솔(g), 솔(g)”이라는 음으로 변환되어 주제 선율이 되었다. 특히 이 작품은 ‘변주곡’ 형식이기에, 단순한 반주 위에 단독으로 제시되는 “라-시♭-미-솔-솔” 테마 선율이 모두의 주목을 받는 ‘주인공’처럼 화려하게 등장한다. 악보에는 최초의 다섯 음이 제시된 후 비슷한 윤곽을 갖는 다른 선율이 뒤따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방식을 통해 ‘아베크 선율’이 점점 더 강조된다. 이어 제1변주, 제2변주 등으로 이어지는 곡의 흐름 안에서 이 선율은 새로운 섹션의 뼈대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활용된다. 단어 ‘아베크’를 단지 음이름으로 변환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의 구성과 흐름을 지배하는 요소로, 궁극에는 작품을 ‘문학적 독해’로 이끄는 단서로 활용하는 것이다.

<카니발>에 등장하는 ‘이름’은 좀 더 복잡한 형태다. 이 작품은 ‘삐에로’, ‘아르깽’, ‘플로레스탄’, ‘쇼팽’ 등 총 21개의 표제를 갖는 짧은 곡의 연속으로 이뤄져 있다. 이런 다양한 표제가 어우러져 독특하고도 기묘한 ‘카니발’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 중 ‘스핑크스’ 섹션에는 슈만이 사랑했던 에르네스티네(Ernestine von Fricken, 1816-1844)를 상징하는 단어를 선율로 만들어 삽입했다. 당시 슈만은 귀족의 양녀였던 에르네스티네와 약혼을 했으나, 그녀의 양부가 그녀를 보헤미아 국경의 소도시 “ASCH”로 보내는 바람에 결혼하지 못한다. 후에 슈만은 “ASCH”라는 철자가 자신의 이름 “SCHUMANN”과 겹치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바탕으로 ‘스핑크스’ 속 느린 음들을 만든다. 즉 “ASCH”는 “미♭(Es)-도(C)-시(H)-라(A)”, “라♭(AS)-도(C)-시(H)”, “라(A)-미♭(S)-도(C)-시(H)”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변환됐다.

이런 음들을 <카니발> 안에 등장시킴으로써 슈만은 에르네스티네와의 사랑과 이별 이야기를 작품 이면에 중첩시킨다. ‘스핑크스’라는 표제가 그 자체로 ‘수수께끼’를 의미한다는 점, 문학가 장 파울(Johann Paul Friedrich Richter, 1763-1825)과 유사한 방식으로 음악 전체의 내러티브를 다루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음악에 새겨진 이름’이 유기적이면서도 다층적으로 작동되며, 중요한 해석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이다.

 

음렬이 된 이름들, 현대음악의 경우

현대음악에서는 보다 자유로운 방식으로 소제토 카바토 기법이 활용된다. 작곡가 슈니트케(Alfred Schnittke, 1934-1998)는 <바이올린 소나타 1번>(Sonata for Violin and Piano, No.1) 안에 “BACH”(바흐)라는 글자를, 그리고 <쇼스타코비치를 추모하는 프렐류드>(Prelude in Memoriam Dmitri Schostakovich for 2 violins) 안에 쇼스타코비치가 스스로를 표현하는데 사용했던 글자 “DSCH”(D.쇼스타코비치)를 등장시킨다. 이 경우 “시♭​-라-도-시”로 나타나는 ‘바흐’는 그 자체로 ‘숭고함’을 상징하며, 쇼스타코비치를 의미하는 “레-미♭​-도-시”(DSCH)는 그에 대한 작곡가의 추모의 마음을 표현한다. 특정 작곡가의 이름이 현대에 이르러 그 자체로 사회문화적인 기호가 되었기에, 이것을 일종의 음렬로 활용함으로써 그 다중적인 의미를 취하는 것이다.

슈니트케의 <교향곡 3번>(Symphony No. 3)에는 그가 존경하는 서른 명의 작곡가가 빼곡하게 위치한다. 슈니트케는 다양한 작곡가의 이름을 계이름으로 바꾸되 이름 속 반복되지 않는 글자만을 선별하였는데, 헨델은 “GEFDCGHA”(Gorge Friedrich Händel)로, 하이든은 “SEFHAD”(Josef Haydn)로 축약한 후 이것을 음이름으로 다시 옮겼다. 이외에도 슈니트케는 <피아노 소나타 1번>(Piano Sonata No. 1)에 그의 친구였던 피아니스트 펠츠만(Vladimir Feltsman)의 이름을 집어넣는 것은 물론 자신과 친한 연주자, 작품에 관련이 있는 인물, 존경하는 선대 작곡가, 자신이 작품을 헌정한 인물의 이름을 ‘음으로’ 만들어 꾸준히 등장시켰다. 이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작품에서 확고히 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임과 동시에, 이와 같은 영적인 방식으로 서로를 연결하고자 하는 상징주의적인 접근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슈니트케의 이런 작업은 앞선 조스껭의 방식처럼 후원자를 노골적으로 치하하지도, 슈만처럼 문자의 해독에 공을 들이며 섬세한 내러티브 해석을 이끌지도 않는다. 하지만 청중이 ‘까막눈’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현대음악에 일종의 단서를 부여함으로써 청취의 즐거움을 부가시킨다는 점은 기억할 만하다. 덧붙여, 작곡가 스스로 음악이라는 매체를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무언가를 ‘담아내는’ 도구로 활용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이는 현대음악 작곡가이기에 가능한 ‘음악에 이름을 새기는 방법’이며, 동시에 긴 역사를 갖는 소제토 카바토의 전통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잇는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출처: 2022년 3월, "음악에 새겨진 이름들", 화음웹진 

http://hwaum.org/bbs/board.php?bo_table=column&wr_id=83

http://hwaum.org/bbs/board.php?bo_table=column&wr_id=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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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畵/音.zine vol.1] 음악에 새겨진 이름들 (2) 이민희 / 2022-03-03 / HIT :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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