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우리가 즐기는 현대음악

2023. 8. 24. 14:55

최근 큰 사랑을 받는 현대음악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첫째, 어쿠스틱 위에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결합시킨다는 점, 둘째, 과거의 클래식 음악으로부터 가져온 재료를 활용한다는 점, 셋째, 영상이나 이미지 등을 음악과 결합시킨 작업을 선보이거나 영화음악 등의 형태로 대중을 만난다는 점, 넷째, 조성을 기반으로 하는 화성 그리고 반복을 통해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니멀 음악의 흔적을 보여준다는 점. 이런 음악들은 보통 포스트 미니멀 음악, 신조성주의, 포스트 클래식, 일렉트로니카, 앰비언트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대부분의 음악이 이어폰을 사용한 ‘개인적인 청취’에 적절한 사운드를 구사하며, 유럽 소도시의 테크노 클럽에서부터 아시아의 대규모 페스티벌에서 이르기까지 지역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오프라인 관객을 만난다.

따라서 불과 몇 십 년 전 ‘현대음악의 청중은 전부 어디로 가버렸는가?’ 고민하며 빈 객석을 바라보던 보수적인 작곡계는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제 대중이 떠올리는 현대음악 작곡가는 더 이상 ‘고루한 선생님’이 아닌, 전자기기를 능숙하게 다루며 이미지를 세련되게 활용하는 시류에 민감한 ‘청년들’이다. 혹자는 이런 음악들이 정통 클래식이 아니지 않느냐며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대 대중과 접속하는 이런 음악들은 21세기의 환경과 기술은 물론 대중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소재를 그들의 작업 안에 적극 반영함으로써 이미 시대성과 가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차갑지만 힙한, 현대음악의 또 다른 영역

: 료지 이케다 & 알바 노토

애플뮤직에는 ‘앰비언트’ 혹은 ‘퓨어 앰비언트’ 등으로 지칭되는 일련의 음악 카테고리가 있다. 이 음악들은 짜임새의 변화가 부재하고 전자적으로 직조된 몽환적인 분위기가 특징이며, 상당수는 ‘글리치’라 부르는 노이즈 사운드를 포함한다. 료지 이케다(Ryoji Ikeda, b.1966) 그리고 알바 노토(Alva Noto, b.1965)로 대표할 수 있는 이런 부류의 음악은 매끈하고 냉혹한, 마치 고도의 테크놀로지로 둘러싸인 무균실과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이케다는 공연장에서의 라이브와 미술관에서의 설치를 동시에 행하는 아티스트로 음반 [+/-](1996), [0°C](1998), [매트릭스](matrix, 2000)를 거쳐 명반인 [데이터플렉스](dataplex, 2005), 그리고 [테스트 패턴](test pattern, 2008), [슈퍼코덱스](supercodex, 2013) 등을 발표했다. 이케다는 “합리성, 정확성, 단순성, 우아함, 섬세함”을 아름다움으로 정의하며, 자신의 음악 안에 수학의 세계를 담는다. 예컨대 이케다는 “숫자, 크기 및 형태의 완벽한 조합은 우리와는 독립적으로 지속”되며, 그렇기 때문에 “수학에서의 숭고에 대한 미적인 경험이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 0과 1에 휩싸인 디지털 시대 인간의 일상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매개로 수학적 사운드를 선택했으며, 이를 통해 동시대 환경이 온전히 디지털 기반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2022년 발매한 음반 [울트라트로닉스](ultratronics) 역시 이케다 특유의 스타일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찌르는 듯한 컴퓨터의 잡음 등을 장인적인 기술로 직조한 짜임새는 리드미컬한 동시에 재기발랄하며, 비록 선율이나 화성이 부재하지만 흡입력이 상당하다. 음악은 그 자체로 21세기 대중이 거하고 있는 지금·현재의 공간을 그 안에 재현하고 있으며, 이어폰으로만 청취할 수 있는 세밀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칼스텐 니콜라이(Carsten Nicolai)라고도 알려진 알바 노토는 이케다와 마찬가지로 시각과 음악을 가장 뛰어나게 접합시키는 아티스트 중 하나다. 이케다의 음악이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이미지와 결합된 채 시청각 형태로 관객을 만난다면, 알바 노토의 음악은 콘서트 현장에서 화려한 디지털 이미지와 함께 거대한 음량으로 쏟아져 나온다. 분명한 비트감, 노이즈 사운드, 감각적이고 세련된 영상, 제한된 음색을 사용하되 독특한 질감으로 관객의 귀를 감싸는 입체적인 앰비언트 등. 압도적인 리듬의 향연을 만들어내는 알바 노토의 음악은 어떤 측면에서는 글래머러스하게 직조된 K-Pop의 묵직한 비트를 연상시킨다. 2020년 발매된 음반 [제록스 4](Xerrox, Vol. 4)는 지금까지 알바 노토가 보여줬던 음악적 강점을 총망라하는 수작으로, 드론 사운드의 풍성한 질감이 특징이다.

Ryoji Ikeda, [Dataplex], Raster-Noton, R-N 068, 2005

Ryoji Ikeda, [Ultratronics], Noton, N+003, 2022

Alva Noto, [Xerrox, Vol. 4], Noton, N-049, 2020

 

넘쳐나는 음악을 멋지게 요리해 다시 대중에게로

: 아라시 사파이언 & 맥스 쿠퍼

바야흐로 음악의 재활용이 유행인 세상이다. 이는 21세기의 청중이 더 이상 베토벤의 교향곡을 1시간이나 걸려 들을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기존에 만들어진 클래식 음악이 너무나 많을 뿐 더러 그 재료에 누구나 손쉽게 접근할 수 있기에 벌어진 현상이다. 사실 작곡가의 입장에서 베토벤이나 바흐의 음악은 마치 과거 민속음악이 그랬듯 대중의 무의식에 남아있는 선율의 보고이기도 하다. 예컨대 누구나 그 선율을 알고 있기에, 이를 재료 삼아 새로운 음악을 만들 때 낯선 음악이 주는 불편함을 최소화할 수 있다.

아라시 사파이안(Arash Safaian, b.1981)은 이런 트렌드를 선도하는 작곡가 중 하나로, 2016년부터 취리히 챔버 오케스트라 및 피아니스트 제바스티안 크나우어(Sebastian Knauer, b.1971)와 함께 ‘음악에 관한 음악’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특히 [위버바흐](ÜberBach)는 바흐의 음악을 새로이 재탄생시키는 작업으로서 2017년 ‘ECHO: Krassik’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수 개월간 차트에 머물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어 2019년 발표한 [이것은 베토벤이 아니다](This Is (Not) Beethoven)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베토벤의 음악을 바탕으로 한 변주곡이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에 발표되었으며 독일 클래식 차트와 미국 빌보드에 등장한 것은 물론 다수의 국가에서 아이튠즈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사파이안의 ‘음악에 관한 음악’ 프로젝트는 클래식 음악의 일부분만을 발췌하여 청취하고 전체적인 구조를 도외시하는 지극히 대중적인 ‘듣기 관습’을 오히려 작곡 방식으로 확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를테면 <아다지에토>는 베토벤의 <교향곡 7번> 2악장을 피아노 독주로 편곡한 것으로, 주요 선율에 베이스 라인을 보강하고 재배치함으로써 ‘가장 아름다운’ 부분만을 압축해 들려준다.

단순하며 루핑에 적합한 반복 구조를 갖는 필립 글래스(Philip Glass, b.1937)의 음악으로 유사한 프로젝트가 진행되기도 한다. 피아니스트 브루스 브루베이커(Bruce Brubaker, b.1959)가 글래스의 음악을 연주하면, 일렉트로닉 기반 프로듀서인 맥스 쿠퍼(Max Cooper, b.1980)는 연주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조작하며 새로운 소리를 덧붙인다. 이를 통해 선율이 여러 성부로 확장되거나 노이즈와 함께 새로운 질감을 갖게 되며, 전반적으로는 디지털 기반의 음악으로 재탄생한다. 이 작업은 2019년 처음 발표된 이래 다양한 오프라인 공연장에서 대중의 호응을 얻었고, 후에 [글래스폼](Glassforms)이라는 이름의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글래스폼]은 편곡·샘플링·즉흥연주의 그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20세기 초 수많은 대중 음악가들이 글래스의 음악을 샘플링하여 힙합이나 댄스 음악을 만들어냈던 전통을 이어간다. 글래스의 음악이 노골적으로 반복을 활용하며 어딘지 모르게 ‘아방가르드한’ 느낌을 내비친다면, 쿠퍼가 매만진 음악은 보다 듣기 편하고 말랑말랑한 스타일로 변조되어 있다. 글래스 음악에 새로운 포장을 입혀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Arash Safaian, Sebastian Knauer, [This Is (Not) Beethoven], Modern Recordings, 538607292, 2020

Bruce Brubaker, Max Cooper, [Glassforms], Infiné, IF1059, 2020

 

다양한 씬을 종횡무진하는 미니멀리즘의 적자들

: 데이비드 랭 & 니코 뮬리

1960년대 뉴욕 다운타운에서 태동했던 미니멀리즘의 광풍 이후 후배 작곡가들은 조성주의를 부활시켰다. ‘포스트’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고민해봐야 하지만, 오늘날 콘서트홀과 영화음악, 대안적인 공연현장을 누비며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는 것은 포스트 미니멀 작곡가들이다. 데이비드 랭 역시 이들 중 하나로, 뱅온어캔의 공동설립자로서 <성냥팔이 소녀 수난곡>(The Little Match Girl Passion)으로 2008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대편성의 진지한 작품들과 오페라는 물론이고 소규모 앙상블 음악이나 가벼운 영화음악 작업에도 능한 작곡가로 2016년 영화 <유스>의 OST로 아카데미 상 및 골든 글로브 상 후보에 올랐다.

‘수난곡’이라는 카테고리를 선택하고 바흐의 <마태수난곡> 대본에서 가사를 가지고 온 <성냥팔이 소녀 수난곡>에서 볼 수 있듯, 데이비드 랭 역시 과거의 음악적 자원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작곡가 중 하나이다. 미니멀 음악의 후예답게 리듬적으로 화려한 짜임새를 보여주며 사람의 ‘목소리’가 가진 힘을 잘 이용함으로써 청중을 감정적으로 고양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나는 눕는다>(i lie, 2005)나 <속이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Cheating, Lying, Stealing, 1933/rev.1995) 등의 몇몇 음악은 전통적인 콘서트홀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다.

한편, 미니멀리스트 계보를 이야기하며 니코 뮬리(Nico Muhly, b.1981)를 빼놓을 수는 없다. 뮬리는 글래스 밑에서 키보드를 연주했고, 글래스 음악의 컴퓨터 사보가로 일함으로써 1937년생 글래스과 현재의 청중 사이를 잇는 가교역할을 해왔다. 디지털 미디어를 능숙하게 다루며 일렉트로닉, 팝 등을 혼합한 새로운 유형의 미니멀 음악을 작곡하는 인물로, 확장된 조성을 바탕으로 하는 리듬적 정교함이 돋보이는 사운드가 특징이다. 오페라를 비롯한 다양한 성악곡 작곡에 능하며 2008년 발매한 음반 [모국어](Mothertongue)가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 음반은 전통적인 조성어법과 다소 거리가 있는 신선한 음향을 갖고 있으며 따뜻한 어쿠스틱을 즐기고자 하는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는 세련된 소리를 들려준다.

David Lang, [The Little Match Girl Passion], Harmonia Mundi, HMU 807496, 2009

Nico Muhly, [Mothertongue], Bedroom Community, HVALUR5, 2008

 

"지금, 여기, 우리가 즐기는 현대음악", 월간객석, 2023년 3월호

Ryoji Ike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