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스 연주와비평 이민희 음악평론가 2023년 상반기 리뷰 모음
원문출처: https://blog.naver.com/yeonju_critic

 

테크닉 그 너머
2023년 2월 17일 다닐 트리포노프 피아노 리사이틀-대전 /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

피아니스트들은 음량, 음길이, 템포, 아티큘레이션 등의 정도를 조절하며 개성을 만들어낸다. 트리포노트는 여기에 하나 더, ‘건반을 누르는 깊이’를 섬세하게 차별화했다. 이를테면 차이콥스키의 <어린이를 위한 앨범> 안에서 그가 생각하기에 주변적이거나 브릿지처럼 지나가는 악장들은 최대한 얕게, 모음곡의 중심에 위치하는 중요한 악장에서는 릴렉스된 손끝이 피아노의 가장 깊숙한 곳을 타건했다. 그렇게 트리포노프는 개성 없어 보이는 짧은 악장마저도 ‘전체’의 음악을 구축하기 위한 필수적인 도구로 만들었다. 화음 연주의 경우에도 저음의 밀집화음을 생경한 느낌의 현대적 음향으로 만들거나, 내성을 모두 또는 일부만 부각시켜 연주하는 등 악장마다 미묘하고도 다른 화음 처리를 들려줬다. 

이는 결국 그가 곡을 구조적이며 계층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곡을 꿰뚫어보는 식견이 ‘연주자’보다는 ‘작곡가’에 가깝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랬기에 그가 이날 모차르트의 <환상곡 다단조>를 그토록 독창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으리라. <밤의 가스파르>는 음향적 아름다움에 매몰되지 않고, 마치 라벨이 애초에 설계했을 음향의 뼈대나 섹션의 연결, 그리고 구조를 되레 강조해 완성했다. 스크랴빈 역시 음향의 홍수 안에서 청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클라이맥스를 최대한 부각시킨 상태에서, 그 이외의 부분을 층층이, 그리고 입체적으로 깎아냈다.

10년 전 무대 위에 있던 앳된 청년과 그를 맞이했던 객석의 흥분은 이제 사라졌다. 하지만 테크닉 그 너머의 경지에서, 음악의 구문론을 완전히 이해하고 이를 자기의 목소리로 펼쳐내는 거장이 거기 홀로 서 있었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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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의 테크닉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다닐 트리포노프 피아노 리사이틀-대전] 리뷰

2023년 2월 17일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에서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Daniil Trifonov)의 피아노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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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흑인영가와 가스펠
2023년 ​4월 13일 서울시합창단 마스터 시리즈 - 흑인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만나는 미국 현대 합창 / 세종문화회관 세종체임버홀

짧은 곡이 여럿 이어지는 합창음악 연주회는 자칫 곡들이 끝없이 나열되는 느낌으로 지루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날은 총 네 개의 섹션으로 나눠진 프로그램이 전체 음악회를 드라마틱한 흐름으로 이끌었다. 전형적인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분위기에서 출발한 음악회는 세속합창과 흑인영가를 거쳐 어느새 격양된 감정으로 박수를 치는 가스펠 섹션에 도달해 있었다. 흑인 작곡가의 클래식한 성가를 연주했던 연주회 초반에는 긴장이 아직 풀어지지 않은 듯 리듬처리나 발음 등이 또렷하지 않은 부분이 종종 발견되었지만 음악회가 진행되면 될수록 호흡이 매끄러워졌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이르자 전반적인 공연의 분위기가 달아올라 다소 불명확한 발음표현 등이 딱히 감상을 방해하지 않았다.

공연 내내 인상적인 음악이 많았지만, 그 중 남성중창과 타악기 연주로 진행된 <스틸 어웨이>가 일품이었다. 이 작품은 사람의 음성으로 만들어내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보여주는 동시에, 대위법적인 진행과 성부 구성을 투명하게 드러내며 음악의 모든 요소요소로 관객에게 호소했다. 무엇보다도 지휘자 토마스 박사는 공연 중간에 흑인 노예의 역사와 그에서 비롯된 흑인영가의 기원을 이야기해주었다. 이를 통해 이날의 공연은 음악을 통해 전승되는 공동의 기억과 상처가 그 역사와 함께 소환될 때, 그 순간 특정 음악장르가 진정성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 주였다. 객석에는 백발의 노인에서부터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이까지 다양한 계층의 유료 관객이 가득했다. 음악적 완성도 뿐 아니라 관객의 만족도 또한 높은 공연이었다.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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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솔한 소통과 열망의 노래 [서울시합창단 마스터 시리즈 - 흑인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만나는 미

4월 13-14일 세종문화회관 세종체임버홀에서 안드레 토마스(Andre J. Thomas) 박사를 객원지휘자로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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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공연장에 방문한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2023년 6월 30일 잠들기 전 심야극장Ⅰ_김태형x김재영x송영훈-대전 / 대전예술의전당 앙상블홀 & 온라인생중계

드뷔시의 곡들은 프로젝터와 조명 등의 소음으로 인해 특유의 배음과 음색이 잘 들리지 않았다. 사실상 ‘중계를 위한’ 스튜디오에 청중은 그저 앉아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그 정도로 독주 피아노에 걸 맞는 음향이 구현되지 않았다. 김태형 피아니스트 역시 드뷔시를 가벼운 인트로 곡으로 준비한 것 같았다. <전설>에서는 김재영 바이올리니스트의 집중력이 아쉬웠다.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활이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크라이슬러의 곡은 이날의 기획이 ‘진지한 공연’이라기보다는 해설을 곁들인 쉬어가는 ‘토크 콘서트’라는 성격을 갖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곡은 마지막에 연주됐던 <피아노 트리오 ‘엘레지’>였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선율과 화성의 아름다움이, 그리고 앙상블의 힘이 느껴졌다. 공연 내내 부각되지 않았던 김태형의 호소력 있는 프레이즈와 해석도 돋보였다. 그는 라흐마니노프 특유의 감정적 격랑과 두터운 화음의 질감을 깔끔하게 표현해냈으며, 트리오 편성 전체를 음악적으로 이끌었다. 

이날 공연은 입문자에게 어필하기 위해, 그리고 연주자의 개인 팬들을 대상으로 기획된 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공연장에 밤 10시에 집합해 숨죽여 음악을 듣는 이들 중 상당수는 클래식 음악의 마니아가 아니었을까? 한 시간 넘게 이어진 가벼운 곡과 토크 사이에서 마음을 다잡지 못하던 청중이, 마지막 곡에 이르러서야 안도감을 느끼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무게 있는 곡을 하나정도 더 선곡했다면, 밤 공연장에 ‘실제로 모였던 이들’이 더 만족한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별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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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공연장이 주는 매혹 [잠들기 전 심야극장Ⅰ_김태형x김재영x송영훈-대전] 리뷰

코로나로 공연장 나들이가 중단됐던 시기, 대전예술의전당에서 기획하여 호평을 받은 ‘잠들기 전 심야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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