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서울국제음악제 실내악 시리즈 3 ‘신비로운 놀이동산’ 리뷰

2021. 11. 24. 22:18

지금, 여기의 새로운 음악경험

20211028()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2021 서울국제음악제는 코로나 19로 얼룩졌던 긴 시간을 지나, 이제는 다시 약동하고자 하는 음악계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특히 신비로운 놀이동산이라는 타이틀로 열렸던 28일의 실내악 공연에서는 브람스(J. Brahms)와 드뷔시(C. Debussy)의 작품에 대한 재해석과 함께 남상봉 작곡가의 플루트,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타악기, 피아노를 위한 기묘한 놀이공원이 위촉초연되었다. 익숙한 곡에서는 참신한 경험을, 신작을 통해서는 동시대의 현실을 성찰하게 만든 레퍼토리로서, 지금여기에서 행해질 수 있는 새로운 음악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했다는 점에서 값진 시간이었다.

 

새롭게 다가온 브람스와 드뷔시

브람스의 6중주를 상상할 때 가장 먼저 기대하게 되는 것은 4중주에 비해 보다 복잡해졌을 대위법적 테크닉과 풍부한 화음의 울림일 것이다. 이날 연주된 브람스의 현악6중주 2앞에서 이런 추측은 경탄으로 바뀌었는데, 숙련된 연주자들이 여섯 성부를 독립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다채로운 짜임새 변화와 균형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특히 바이올린 2, 비올라 2, 첼로 2대가 등장하는 편성의 특징을 살려 한 종류의 악기가 각각 배경과 선율을 나누어 연주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즉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각 한대가 반복하는 음형이나 물결치는 듯한 아르페지오를 연주하면, 이런 배경 위로 또 다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가 화려한 선율을 겹쳐 노래하는 식이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각기 고음과 저음에서 주제 선율을 주고받는 부분, 그리고 여섯 연주자가 선율단편을 번갈아 연주하며 돌림노래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습도 기억에 남는다.

이와 같은 형태의 음악을 구현하기 위해 제1바이올린뿐 아니라 제1비올라와 제1첼로의 역량이 부각됐다는 점도 지적할 만하다. 육중주가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울림과 탁월한 해석은 깊고 풍부한 음색을 들려줬던 제1비올라, 그리고 바이올린 파트와 대칭을 이루며 저음에서 화려한 선율을 들려줬던 제1첼로의 활약을 통해 구현됐다.

2악장에서는 다수의 연주자가 동일한 리듬꼴로 호흡을 맞추어 연주하는 부분이 많았다. 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두터우면서도 호모포닉한 선율선이 그 자체로 독특하게 다가왔다. 한편 6명을 3:3, 2:2:2 등 다양한 방식의 소그룹으로 나누어 음향 덩어리를 구성하는 것도 자주 관찰됐다. 이는 단지 성부의 조합 방식을 늘린다기보다는, 소리의 움직임을 공간적으로체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이를테면 바이올린 두 대와 제1비올라가 팀을 이루어 연주를 하면, 이에 대응하여 제2비올라와 첼로 두 대가 응답을 하고, 1바이올린에서부터 도미노를 만들듯 제2첼로까지 선율이 흘렀다. 이는 유튜브를 통한 청취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입체적인 소리의 향연으로, IBK홀을 터질듯이 채운 여섯 대의 악기에 의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좌우 대칭으로 번갈아서, 때로는 양 옆과 가운데로 분리된 채 관객의 몸을 감쌌다.

드뷔시의 가곡 잊힌 노래들’(Ariettes oubliées)은 피아노로 반주되던 원곡을 현악4중주로 편곡했다. 무엇보다도 피아노 성부 사이사이에 숨겨져 있던 길고 짧은 선율조각들이 네 개의 현악기로 분리된 탓에 음향의 선적인 청취가 훨씬 수월했다. 이를테면 고음역에서부터 점진적으로 하강하는 화음의 움직임 등은 화음 반주라기보다는 성악성부와 대위적인 관계를 이루는 거대한 선율처럼 들렸다. 예컨대, 흔히 몽환적인 화음 덩어리로 기억되는 드뷔시의 음악이 실제로는 고도로 대위법적이며, 시차를 두고 등장하는 어슷한 성부들의 겹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명주의 목소리 또한 드뷔시 음악에 대한 어떤 정형화된 감상, 이를테면 "예쁜 화성과 감성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것이었다. 전반적으로는 진중하며 때로는 어둡고, 격정적인 표현에서부터 창백하고 찌를 듯한 날카로운 선율까지를 표현해내는 이명주의 음색은, ‘가곡이 진폭이 큰 감정 변화를 표현하는 극적인 매체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

 

동시대의 음악경험을 상징적으로 풀어낸 기묘한 놀이공원

남상봉의 기묘한 놀이공원은 곡 전체를 통해 세 가지의 독특한 풍경을 그려낸다. 첫 번째는 저 멀리 보이는 놀이공원의 희미한 실루엣이다. 이는 작품의 초반에 가장 인상적으로 등장하는데, 긴 음가로 구성된 3화음과 7화음의 부드러운 음향이 어스름하게 보이는 놀이공원을 연상시킨다. 이런 풍경은 코로나 19가 초래한 놀이공원을 대하는 가장 일반적인 시선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2020년의 어느 순간부터 놀이공원은 자주 갈 수 없는 장소가 되었고, 그곳에서 일하던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내가 좋아했던 놀이기구가 아직도 작동하는지 알 수 없다. 놀이공원에 다가가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동시대인의 상념이 정지된 음, 제한된 음소재, 하모닉스 등으로 병치되는 것이다.

작품에서 감지되는 두 번째 풍경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해 결국 맹렬히 작동하게 되는 놀이기구의 모습이다. 처음에 몇몇 음이 등장해 느리게 반복될 때만 해도 공간 전체가 정지되어 있는 느낌이지만, 점차 음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무언가 깨어나는 인상을 준다. 악기들은 빠른 음형을 연주하고 타악기를 중심으로 같은 음을 연타하며, 음 공간 안에 점점 더 많은 움직임을 생성한다. 그렇게 점점 촘촘해지고 빨라지는 소리의 흐름이 폭풍처럼 다가오며,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일종의 점진적으로 채워나가기프로세스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작은 고비와 같은 몇몇 고조점을 지나 하나의 섹션을 마무리하는가 하면, 또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섹션에서도 다양한 악기의 짧은 음들이 질주하는 듯한 리드미컬한 음형으로 진화한다.

특히 관객이 음의 프로세스를 인지하는 순간, 음향 전체가 스스로의 규칙으로 작동하는 놀이기구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흥미롭다. 불규칙한 강세가 들어간 큰북의 강타가 계속해서 긴박감을 높여가고, 목관악기 선율이 작은 파편이 되어 톱니바퀴를 맞추듯 촘촘하고도 빠른 움직임을 쌓아간다. 이는 마치 소리 조각으로 구성된 거대한 놀이기구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해, 종국에는 기묘한 형체를 뽐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를 청취하는 경험은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아찔하고 자극적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세 번째 풍경은 옛 것을 회상하는 듯한 노스텔지어적인 무언가다. 다소 현대음악적인 흐름으로 진행하던 음악은 곡 후반에 이르러 왈츠가 섞인 파편화된 짜임새에 도달하는데, 이 순간 달콤한 화성과 편안한 3박자를 얼핏 들려줌으로써 안도감과 편안함을 갈구하게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다시 지나고 곡의 최종부에 이르러서야 완전한 왈츠를 등장시킨다. 이 왈츠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간성을 보여주며, 현재까지의 시간이 실제였는지 아니면 지금 등장한 이 달콤한 시간이 실제인지 혼란스럽게 만든다. 긴 과정을 거쳐 도달한 놀이공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마주한 조성의 향연. 전형적인 왈츠로 표현된 익숙한 아름다움은 그립고 아련하지만 동시에 낯선 무언가로서, 결국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는 노스텔지어적인 풍경을 그린다. 바로 이러한 감각. 편안하고 따뜻했던 과거의 무언가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는 동시대인이 직면한 환경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이 놀이공원이라는 테마를 통해 현재를 투명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이로 인해 시의성이라는 미덕에 접속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글 이민희/음악평론가)

「월간리뷰」, 2021년 12월 (2021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