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 복합 미디어 작품 병치 리뷰

2023. 8. 24. 15:18

복합 미디어 작품 ‘Juxtaposition of Macro Cosmos’

2022년 12월 16일(금) ~ 2022년 12월 17일(토) 국립극장 하늘극장

 

‘Juxtaposition(병치)’는 작곡가 이현민이 시리즈로 선보이고 있는 ‘Macro Cosmos’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작곡가는 병치를 “두 가지 이상의 것을 한 곳에 나란히 두거나 설치하는” 것으로 보고 다양한 미디어를 동시에 제시했을 때 관객이 이를 ‘인식’하는 행위에 집중한다. 50분가량의 공연 전체가 하나의 음악으로서, 원형의 무대 위에는 스크린과 소량의 객석이 설치되었다. 비올리스트 라세원과 세 명의 무용수(최지원, 민경원, 전혜정)가 등장하며, 공간 전체를 활용하는 음향세팅과 조명이 특징적이다.

강렬한 연출로 진행되는 50분 동안의 흐름은 무언의 서사를 만들어낸다. 특히 중후반에 이르러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비올리스트의 ‘육체’가 관객 앞에 드러나는 순간이 드라마틱하다. 이를 통해 이 작품은 다양한 유형의 무대극이 품고 있는 퍼포먼스의 원형, 즉 제의를 작품 안에 작동시킨다. 이러한 특성은 총 세 개의 파트로 구성된 작품의 전개와 그 안에 활용된 다양한 미디어의 병치를 통해 구현된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

‘Juxtaposition(병치)’는 공연장의 천장에서부터 아래로 내리꽂는 푸른색의 핀 조명과 함께 시작된다. 징 소리에서 발생한 금속성 앰비언스를 동반하는 이 조명은, 정면에서의 관람을 전제로 하는 프로시니엄 무대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다. 객석은 무대 중앙을 바라보고 부채꼴 모양으로 ‘무대 위’에 설치되어 있기에, 관객의 지근거리에서 빛이 보인다.

조명과 함께 무대의 막이 오르면, 본격적으로 ‘오디오비주얼’ 작업이 펼쳐진다. 일반적인 스크린이 가로로 길다면, ‘병치’의 스크린은 이것을 세워 놓은 듯 세로로 긴 형태다. 사운드는 전자적으로 합성된 소리와 녹음된 소리의 변형 등을 다양하게 활용하며, 이미지와 단순히 싱크를 맞춘다기보다는 다양한 형태의 결합을 보여준다. 복잡한 이미지가 전개될 때에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거나, 하나의 사운드에 완전히 다른 질감의 이미지가 차례로 결합하는 식이다.

주로 등장하는 이미지는 두 가지로, 첫째는 빨려 들어갈 듯 움직이는 프렉탈이며, 둘째는 ‘실제’인지 ‘가상’인지 구분이 아리송한 검은 형상이다. 작곡가는 후에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후자의 형상이 “아주 작은 대상을 확대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번쩍거리는 검은 돌기 수십 개가 일제히 움직이는 이 기이한 형상은, 엉겨 붙은 시멘트 덩어리가 온도 변화에 의해 미세하게 꿈틀대는 모습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현실세계에서 육안으로 볼 수 없으며, 그 움직임의 궤적이 순행과 역행으로 조작되어 있다는 점에서 언캐니(uncanny)한 느낌을 준다.

 

무녀들

두 번째 파트 역시 공연장의 천장으로부터 방사형으로 펼쳐지는 핀 조명과 함께다. 어둠 속의 한 점에서 흘러나와 부채꼴 모양으로 객석을 둘러싸는 이 빛이 점차 밝아지면, 그 끝자락에는 무용수가 서 있다. 앞선 파트의 음악이 음향의 질감을 중심으로 진행됐다면, 이 부분부터는 규칙적인 펄스를 동반한다. 관객을 둘러싼 수 개의 스피커가 입체적인 음향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리드미컬한 성부와 길게 지속되는 전자적 드론이 합쳐져 공연장 전체를 음악으로 꽉 채운다.

첫 번째 파트가 스크린에 투사되는 오디오비주얼 위주였다면, 두 번째 파트는 객석을 포함한 보다 넓은 구역 전체가 무대가 된다. 세 명의 무용수가 관객을 감싼 채 사방에서 등장하며, 독특한 안무와 함께 관객 사이를 누비며 점차 무대 안쪽으로 이동한다. 무용수는 속이 비치는 검은색 장삼을 걸치고 소맷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안무를 행하는데, 그 모습이 흡사 제사를 주관하는 고대의 ‘무녀’를 닮았다.

주목해야할 것은 무대 중앙에 위치한 ‘스크린’의 형태다. 첫 번째 파트에서는 일반적인 의미의 ‘2차원’ 스크린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이 스크린은 이제 ‘3차원’ 형태의 육면체로 확장되었다. 곧 춤을 추며 모여든 무용수들이 각각 서쪽, 남쪽, 동쪽에 선채 그들 앞에 놓인 육면체의 각 면에 기립한다. 이들이 마주한 스크린이 면마다 빛을 발하고 있기에, 이 거대한 육면체가 마치 신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목소리는 들리되 보이지 않던 것

세 번째 파트에 이르러 무용수들은 퇴장하고 공간 전체는 어둠에 휩싸인다. 무대 중앙의 육면체를 향해 가느다랗게 발광하는 몇 가닥의 빛만 존재할 뿐이다. 연주자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고 음악만 들린다. 전자적인 비트와 길게 끄는 앰비언스 위에 결합하는 비올라 독주. 여기서부터는 오롯이 음악만의 힘으로 긴장감을 유지시켜야 하는 부분이다. 한편으로는 음악의 화성리듬이 너무 느린 나머지 진행 전체가 느슨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속음 위주의 음향은 점차 리듬을 쪼개나가며 비르투오소적인 패시지로 변했으며, 작품 전체의 흐름을 고조시켰다. 그리고 음악이 보다 화려해지려는 찰나, 관객의 눈앞에 있던 육면체의 스크린이 공중으로 올라가고 그 안에서 연주를 하던 비올리스트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제껏 소리만 들리던 것(acousmatic sound)이 그 출처와 함께 등장하자, 장내는 강렬한 제의적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 경우 ‘목소리는 들리되 눈에는 보이지 않던’ 신의 존재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았다. 비올리스트는 빛나는 드레스를 입고 맨발로 서서 반복적인 패시지로 구성된 격정적인 연주를 이어갔다. 그리고 이를 보좌하듯 다양한 각도의 조명이 연주자를 감쌌다. 비올리스트가 모습을 드러낸 뒤 진행된 연주 또한 음의 구성이 단조롭다거나 긴장감이 부분적으로 애매모호해지는 지점이 있었다. 순수한 음악적 세션이 복합 미디어 안에 놓일 때, 과연 어떠한 호흡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의 문제는 쉽게 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첫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언캐니한 형상을 보여주고, 둘째, 무녀와 같이 연출된 무용수의 움직임을 다리로 삼아, 셋째, 절대자의 음성과 그 실체를 ‘퍼포먼스 그 자체’로 현현시킨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일반적인 음악극이나 오페라가 갖고 있는 무대극으로서의 요건을 충족하게 된다. 특히 ‘제의’의 감각이 무언의 형태로, 기이한 영상과 안무 그리고 연주자의 ‘출현’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객석의 형태나 위치도 이런 제의에 적절하다. 수없이 많은 무대극에 내재한 퍼포먼스의 ‘원형’이, 빛과 소리 그리고 움직임의 병치로 나타나는 것이다. (글 이민희/음악평론가, 사진 김시훈)

"신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 복합 미디어 작품 병치 리뷰", 「월간리뷰」 2023년 2월호.

이현민의 Juxtaposition of Macro Cosmos ©Sihoon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