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길 위의 천국> 리뷰

2022. 2. 25. 23:21

음악으로 경험하는 순교의 길

2021년 11월 20일(토) ~ 2021년 11월 21일(일)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수많은 관객이 어두운 극장에 앉아 천주교인의 죽음을 숨죽여 바라보는 행위는 극히 제의적이다. 특히 일반적인 서사구조와는 다른 형태로 배열된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 그리고 바르바라를 비롯한 순교자의 박해사를 그린 줄거리는 관객에게 꽤 직접적으로 종교적인 층위의 감동을 준다. 해설자가 등장해 역사적인 배경이나 장면의 전환을 상세히 설명해준다는 점, 계단식 구조물 단 한 개가 장면마다 그 노출면을 달리하며 반복되는 배경이 된다는 점 역시 이 작품을 일반적인 오페라보다는 종교적인 오페라 내지는 오라토리오에 더 가깝게 만든다.

하지만 이 작품이 기존의 오페라와 다른 이유는 서사나 해설자의 존재, 연출 등의 외적인 요소보다도 박영희 작곡가 특유의 음악을 오페라로 고스란히 구현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기존의 대극장 오페라에서는 보기 드문 오케스트라 편성을 토대로 독특한 형태의 선율과 리듬, 화성을 들려줬으며, 성부의 구성과 음의 움직임 등에 있어 완전히 새로운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박영희 스타일의 노래와 합창을 통해 초기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관객에게 생생하게 각인시켰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독특한 선율과 리듬, 화성으로 그리는 ‘목소리’

극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독창은 반주를 최소화한 채 대부분 무반주로 혹은 비슷한 음조의 악기 한 대와 짝을 이루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천주교 특유의 낭송조 그리고 서양의 레치타티보를 연상시키는 이런 선율은 말하는 것과 노래하는 것 사이에 머물러 있다. 이를테면 최양업 신부의 노래는 처음에는 무반주로 그 이후에는 베이스클라리넷과 함께 연주됐는데, 이따금 현이나 관의 옅은 오케스트레이션이 잠시 곁들여짐으로써 그 노래에 어스름이 드리웠다가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한편 이성례 마리아의 독창에는 바이올린 독주가 동반됐는데 자식의 죽음을 대하는 어머니의 고통이 음폭이 큰 비브라토, 큰 음량, 과격한 프레이징 등으로 표현됐다.

선율은 어떠한 목표를 향해 진행한다기보다는 좀 전에 들려줬던 것보다 조금 더 높은 음, 그리고 이제껏 들려주지 않았던 음 등을 다양하게 등장시켰다. 또한 음의 도약 간격을 조금씩 변형하며 반복시켰고, 비교적 좁은 음 간격을 맴돌듯 움직이며 상당수의 패시지에서 열두 반음을 거의 다 들려줬다. 유사한 처리가 리듬적인 측면에서도 발견됐는데,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맥박이나 일정한 호흡이 존재하되 이것이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대신 한 마디 안에서도 4연음, 3연음, 2연음 등으로 잘게 쪼개진 음들이 모두 뒤섞여 관습적인 리듬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이런 선율과 리듬의 처리는 남이 닦아 놓은 쉬운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닌, 좁고 험한 길 중에서도 ‘아무도 밟지 않은 땅’을 거니는 천주교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삶이 음악의 성부진행을 통해 묘사되는 것이다.

합창에서는 3화음을 비롯한 듣기 편한 울림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모든 성부는 대부분 동일한 선율을 부르되 간혹 두 성부나 세 성부가 쪼개져 나와 앞선 선율을 뒤따르거나 조금은 변형된 선율을 겹쳐 불렀으며, 이를 반주하는 악기 역시 마찬가지의 짜임새를 갖고 있었다. 이따금 풍성한 화음이 등장할 때에도 긴장된 느낌을 주는 음정이 중심이었다.

결국 이와 같은 선율적‧리듬적‧화성적 장치를 통해 오페라 ‘길 위의 천국’은 순교자와 민초의 개별적인 ‘목소리’를 생경한 방식으로 객석에 전달한다. 이런 소리들이 일반적인 형태의 오페라 아리아나 합창과는 거리가 멀기에, 객석에 앉은 많은 이들은 이를 단지 ‘노래 감상’으로 치부해버리지 않았으며 소리가 들리는 매 순간 무대에 이목을 집중했다.

 

해설자의 개입과 독특한 오케스트레이션

이 작품에서는 해설자가 등장해 극 안에 흐르는 사건의 배경과 당대의 상황 등을 설명해준다. 해설자는 주인공과 같은 공간에서 움직이지만 마이크를 차고 말한다는 점, 말의 톤이 다큐멘터리의 내레이터 혹은 전형적인 아나운서 같다는 점, 무용수와 분장 방식 및 동선이 유사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런 모습은 해설자가 무대 위의 시간을 정지시키고 ‘다른 차원’의 초월자처럼 개입하는 인상을 만들어냈는데, 그 강렬함이 주인공 이상이었다. 이처럼 해설자의 존재감이 워낙 컸기에 성별, 목소리 톤, 동선, 출연 지점, 말의 억양 등을 새롭게 연출함으로써 오페라 전체의 색깔을 변화시킬 수 있어 보였다.

한편, 이 작품은 대형 합창단과 풍부한 관악기 그리고 다채로운 타악기를 활용한 반면, 현악기는 축소된 편성을 사용했다. 이 때문에 관악기가 중심이 되는 선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이 부각됐으며, 전반적으로는 모든 성부가 섬세하게 청취되는 실내악적인 음향을 만들었다. 투명한 음향 뒤로는 빗소리, 바람소리 등이 간섭해 들어왔고, 때로는 부엉이 우는 소리나 풀벌레 소리 등이 어우러지곤 했다. 이런 독특한 오케스트레이션은 합창이나 노래를 압도하지 않는 가운데 배경이나 그림자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장엄함이나 거대함이 배제된 소탈한 음향을 통해 극 중 반복해서 재현된 교우의 고통을 날것으로 바라보게 만든 것이다.

현악기의 배음을 이용해 극히 높은 음을 소리냄으로써 마치 성스러운 이에게서 나타나는 후광과 같은 ‘빛’을 상상케 한 점, 넓은 소리 공간을 고음에서부터 저음까지 얼기설기 채워 투명하고도 아름다운 음향적 짜임새를 경험케 한 점도 기억에 남는다. 특히 대부분 지속음으로 표현된 이런 음의 덩어리들은 마치 누군가를 압박하듯 점점 크게 혹은 점점 작게 소리를 냈으며, 그 안에서 특정한 음고 하나가 절대자의 의지인 양 미끄러지듯 움직이곤 했다. 무엇보다도 헤테로포니(heterophony)를 기반으로 하는 소리덩어리들은 그 안에 지속적으로 어디론가 ‘가고자 하는’ 개별적인 악기소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비록 한포기 풀에 불과하지만 긴 생명력을 가진, 그리고 종국에는 죽음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끊임없는 여정을 계속하는 순교자의 삶처럼 다가왔다.

 

따로 또 함께 불리는 노래들

바르바라의 노래는 단순한 리듬과 편안한 음계로 구성됐으며 마치 옛 노래를 듣는 것과 같은 소박함이 일품이었다. 노래가 주는 힘이 워낙 컸기에, 적어도 이날 객석이 가장 집중한 음악이기도 했다. 아마도 무조의 음악 가운데에서 이 노래가 주는 따뜻함이 도드라졌을 것이며, 이 때문에 바르바라라는 인물이 유독 강조되어 보였다. 특히 무반주 독창으로 시작됐던 바르바라의 노래는 어머니와의 이중창으로, 그리고 선율의 발전을 거쳐 여성합창으로까지 확장됐다. 이런 흐름은 바르바라의 청혼자가 등장하고 최양업 신부가 나오는 장면으로까지 이어졌는데, 일련의 과정이 극 내부의 작은 클라이맥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붉은 천을 머리에 쓴 채 무대 위 계단으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바르바라의 옆모습은 이날 경험한 제의성의 극치였다. 바르바라의 뒤로는 올리브색 그리고 푸른색 옷을 입은 알 수 없는 존재가 추상적인 몸짓을 하며 뒤따라갔고, 무대 정면에는 최양업 신부가 노래를 하며 이 의식을 관장했다.

국악창법으로 불린 ‘사향가’도 흥미로웠다. 최양업 신부가 직접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이 노래는 이제까지 들을 수 없었던 규칙적인 리듬과 전통음계를 사용함으로써 민족적인 정서를 강하게 표출한다. 특히 “어화우리 벗님내야 우리본향 찾아가세,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 곳이 본향인고”라는 텍스트 속 ‘고향을 찾는다’는 표현은 구원이나 천국을 찾아 고난의 길을 가는 천주교 신도의 ‘여정’을 은유한다. 특히 이 음악은 몇 차례 등장할 때마다 무거운 분위기의 극을 환기시키고, 등장인물의 고난을 회환의 정서로 위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마지막 장 ‘미세레레 노비스’에서는 이제까지 홀로 불렸던 민초의 노래가 다성으로 발전한다. 특히 초반의 합창 이후에 최양업 신부가 ‘오늘도 내일도 길 위의 천국을 걷고 있지요’라는 가사를 독창으로 노래하면, 다시 모든 성부가 동일한 리듬으로 즉 ‘합치된 상태’로 노래를 시작한다. 이처럼 모두 함께 부르는 마무리는 풀뿌리 같았던 천주교도의 고생스런 삶이 단단하고 두터운 흐름이 되었음을, 그들 각자의 목소리와 신앙이 오늘날 더 큰 울림으로 남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객석에 자리했던 천주교 신자 뿐 아니라 순수한 음악의 감상자들도 마지막 합창을 음미하며 순교자의 희생이 만들어낸 ‘결과’를 소리로 경험하고, 감명 받을 수 있었던 이유다. (글 이민희/음악평론가)

「월간리뷰」, 2022년 1월 (2021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