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발견된 소리, 현장 청취의 즐거움: 박정은 작곡발표회 리뷰

2021. 12. 30. 16:04

2021년 12월 13일 한남동 일신홀에서 박정은(1986~)의 두 번째 개인 작곡발표회가 열렸다. 독주에서 오중주까지 악기 편성이 다양했고, 총 다섯 곡 중 세 곡이 초연이었다. 각각의 곡마다 중점적으로 쓰인 주요 아이디어나 연주기법 등이 달랐지만, 몇몇 곡을 교차하며 나타나는 작곡가 특유의 음악 어법이 비교적 또렷했다. 특히 피아노 독주곡과 타악기 독주곡이 연주자의 비르투오소한 면모를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하나의 그룹으로 인식됐고, 삼중주는 음향이 회화적으로 전개된다는 점에서, 사중주와 오중주는 펄스를 중심으로 음향 블록이 나열된다는 점에서 또 다른 그룹으로 묶일 수 있었다. 이외에도 오래된 테크놀로지를 무대 위에 등장시킨다는 점, 일상적이면서도 재기발랄한 물건을 활용해 특수주법이나 프리페어드를 시도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주목할 점은 이런 다양한 속성이 ‘음악회’라는 전체 이벤트 안에서 만들어낸 효과다. 무엇보다도 이날 연주됐던 모든 작품은 소리의 ‘재발견’이라 할만한 속성을 드러냈는데, 낯선 소리나 새로이 조합된 소리, 더 나아가 이미 알던 소리까지도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로 다가왔다. 또 한편으로는 앞서 언급한 수많은 특성이 모여 음악회의 ‘현장성’을 강화하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런 분위기 안에서 관객이 청취의 즐거움을 만끽했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이는 동시대 현대음악 연주회장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으로, 단지 대중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날 관객은 화려한 음향과 폭발하는 에너지에 휩싸였고, 그 안에서 그로테스크함과 긴장감을 넘어 ‘시간의 확장’으로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감각을 경험할 수 있었다.

 

비르투오소의 부활: 독주곡 <몸짓들>과 <깊은 심심함>

피아노 독주곡 <몸짓들>(2021. 재연)은 미디어 이론가 빌렘 플루서의 『몸짓들: 현상학 시론』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된 곡으로, ‘글쓰기의 몸짓’, ‘음악을 듣는 몸짓’, ‘만들기의 몸짓’이라는 세 악장으로 구성된다. ‘글쓰기의 몸짓’에서는 “왼쪽 상단 모서리에서 시작해서 우측 상단까지 이동하고 (…) 우측 하단에 도달(…)”하는 행위가 글리산도 및 다양한 음정의 병진행 프레이즈로 표현됐다. 새삼스레 글쓰기와 피아노 연주 모두 두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행하는 일임을 인식할 수 있었으며, 정방향(왼쪽에서 오른쪽)과 다르게 나타나는 역방향(오른쪽에서 왼쪽) 그리고 어느 방향으로도 가지 못하고 맴도는 듯한 선율이 어떤 유형의 글쓰기를 의미하는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악장 중후반에는 피아노 안에 ‘컴퓨터 키보드’를 넣고 탁탁거리며 타자를 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는데, 먼 미래의 글쓰기에서 촉발될 몸짓이 손가락만을 이용한 수직 방향일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음악을 듣는 몸짓’은 피아니스트가 커다란 헤드폰을 낀 채 발로 구르며 시작했다. 음악을 ‘듣는’ 몸짓이 제목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음악을 들으며 연주자가 된 듯한 모습을 ‘상상하는’ 행위를 음악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보였다. 작품 안에 등장하는 프레이즈들은 피아노 협주자가 절정의 순간에 다다랐을 때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동작을 수초씩 잘라 재현하는 것 같았다. 특히 박수가 터져 나오기 직전 마지막 화음을 치는 듯한 행위를 글리산도, 주먹으로 건반 치기, 노크하기를 비롯한 다양한 퍼포먼스로 표현했으며, 피아노 뚜껑을 덮은 상태에서 무아지경에 빠진 듯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만들기의 몸짓’은 인사이드 피아노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마치 피아노라는 생명체의 배를 가른 후 맥박을 재고, 다양한 기구를 이용해 병을 진단하고 수액을 주사하는 모습이 연상됐다. 작은 플라스틱 진동기 두 개를 피아노 현 위에 놓자 ‘드르르르’하는 소음이 생성됐으며, 갑자기 꺼내든 아날로그 라디오에서는 백색 소음이 들렸다. 연주자는 주파수를 맞추는 듯한 제스처를 했고, 이는 마치 피아노의 건강을 원격으로 진단하는 퍼포먼스처럼 보였다. 이런 다양한 행위는 결과적으로 낯선 소리로 구현되어 관객에게 다가왔는데, 그냥 지나치고 말 일상의 수많은 ‘몸짓들’ 안에 행위의 기원과 본질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이 ‘소리’ 형태로 들린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타악기 독주곡 <깊은 심심함>(2021, 초연)은 역설적인 제목을 가진 곡으로서, 항상 분주하며 멀티태스킹이 일상인 현대인을 묘사한다. 기본적으로 이는 폴리포니 짜임새로 가장 쉽게 병치시킬 수 있을 터, 실제로 두 성부 혹은 세 성부 이상의 리듬이 타악기 주자의 왼손과 오른손 그리고 발 박자로 만들어졌다. 또한 여러 악기를 분주하게 오가며 연주하는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멀티태스킹을 퍼포먼스적인 맥락에서 제시하기도 했다.

곡 초반에는 콩가가, 그 이후에는 하이햇을 중심으로 작품이 진행됐다. 하드 말렛ㆍ손바닥ㆍ손톱ㆍ주먹에 이르기까지, 손의 다양한 부위를 교체해가며 콩가의 북면에서 태 부분 더 나아가 몸통에 이르는 영역에서 소리를 냈고, 하이햇의 경우에도 페달의 여닫음 여부, 하이햇의 중앙을 치는지 아니면 그 이외의 부분을 치는지에 따라 각기 다른 음고와 질감의 소리가 생성됐다. 특히 수많은 소리가 하나의 층위에서 또 다른 층위로 점진적으로 변화하고, 이따금 교차하는 흐름이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이날 연주된 두 개의 독주곡은 서로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연주자의 ‘비르투오소한 면모’를 부각시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날 연주된 독주곡들은 연주자들이 그들의 개인 연주회에서 다루어도 충분히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법한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 작품들은 연주자들이 학창 시절 연마했던 고전음악의 테크닉은 물론이고 그들의 기본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타악기 곡에서는 하이햇에서 행하는 극히 빠른 연타 주법과 3~4성부의 서로 다른 리듬을 독립된 성부로 구현하는 것, 그리고 피아노곡에서는 빠르게 움직이는 트릴이 곡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것이 그랬다.

독주곡들이 비르투오소한 속성을 갖추게 된 이유는 박정은의 곡이 시원하게 질주하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악기 본연의 가장 자연스러운 소리내기 방식을 정확히 알고 이를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비르투오소한 대목들이 주로 ‘과거의 음악적 유산’에서 기인한다는 점을 떠올려 보았을 때, 박정은의 음향 전개 방식이나 실험이 워낙 과격하기에 이런 전용(轉用)이 오히려 무리 없이 이루어졌다고도 추측할 수 있다. 피아노곡 <몸짓들>에서는 ‘냉담한(kalt)’과 ‘따뜻한(warm)’이라는 지시어, 그리고 ‘불안한 트릴’ 등의 표현을 통해 연주자가 해당 음향의 성질을 인지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도록 했고, 타악기 곡 <깊은 심심함>에서는 즉흥연주를 할 수 있는 구간을 정해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를 통해 연주자의 자율성을 부각시켰으며, 전반적으로는 퍼포먼스적인 요소를 다수 포함한 점도 비르투오소한 측면을 강화한 요인으로 보였다.

 

회화적 재현: <그 때, 그 공기들에 대하여>

아쟁ㆍ아코디언ㆍ피아노를 위한 <그 때, 그 공기들에 대하여>(2021, 초연)는 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독특한 편성으로, 앙상블을 이루는 세 악기는 음향ㆍ음역ㆍ연주방식에 있어 공통점을 교차하며 공유한다. 즉 아코디언과 피아노는 건반악기의 일종으로 음계와 화음을 연주할 수 있는 한편, 아코디언과 아쟁은 둘 다 지속음 안에서 강약의 다이내믹을 표현할 수 있고, 아쟁과 피아노는 둘 다 현을 기반으로 하는 ‘뜯는 행위’가 가능하다. 이처럼 박정은은 비슷하면서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세 악기를 토대로 다양한 음향 블록을 구성했고, 세 악기가 충돌하고 또 융합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균열을 적극적으로 부각시켰다. 그리고 이를 표제를 갖는 네 개의 악장 안에 회화적인 풍경으로 그려냈다.

악장마다 ‘시그니처’라 불릴만한 대표적인 음향이 전면에 드러나는 것도 특징이었다. 이를테면 두 번째 악장 ‘그 겨울, 눈 오는 새벽’에서는 아쟁과 아코디언이 각각 저음과 고음에서 지속음을 연주하되 소리를 크고 또 작게 변화시켰고, 여기에 피아노가 작은 소리의 빠른 음형을 반복해 연주했다. 이는 아쟁과 아코디언이 만드는 정적인 음향 배경 위에 피아노로 눈이 내리는 듯한 제스처를 얹은 것처럼 인식되었다. 한편 세 번째 악장 ‘저 해저 같은 어둠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 내려갈 것인지’에서는 피아노의 저음 현을 신용카드로 긁는 소리와 활대를 이용해 아쟁을 수평 방향으로 긁는 소리가 동시에 사용됐으며, 여기에 아코디언이 건반 긁는 소리를 더했다.

하나의 악장 안에는 발전 개념이나 기승전결 등이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정지된 듯한 시간의 흐름 위에 표제로 삼은 다양한 텍스트와 거기에서 연상되는 이미지가 음향으로 섬세하게 묘사됐다. 따라서 이 작품의 청취는 시간 안에 갇힌 풍경이나 그림을 집중해서 바라보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이는 일반적인 녹음이나 중계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극히 섬세한 소리 안에 휩싸여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독특한 앙상블로 만들어낸 소리 오브제와 이에 대한 집중된 청취를 통해 작품의 현장성과 현전성이 강화되는 순간이었다.

 

타격과 중단 그리고 펄스: <소외>와 <얼룩진 잔향들>

클라리넷ㆍ바이올린ㆍ첼로ㆍ피아노를 위한 <소외>(2021, 초연)와 플루트ㆍ클라리넷ㆍ바이올린ㆍ첼로ㆍ피아노를 위한 <얼룩진 잔향들>(2019, 2021 개작 재연)은 각각 네 대와 다섯 대의 악기로 연주된다. 이 두 작품은 유사한 편성에다 작품의 전개 방식도 어느 정도 공통점을 지니는데, 다양한 악기의 특수주법을 화려하게 구사해 음향 블록을 만들되, 하나의 음향이 다른 음향으로 계속해서 교체되고, 때로는 강한 타격의 투티(tutti)가 맹렬히 반복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느닷없이 중단된다는 점에서 그랬다.

<소외>는 한병철 작가가 쓴 『피로사회』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된 곡으로 현대인의 과도한 열정과 그 이후에 뒤따르는 번아웃을 소외의 본질로 보았다. 따라서 작품 안에는 신경쇠약ㆍ고립ㆍ고독ㆍ광적인 노동과 같은 개념이 활로 현을 강하게 짓누르는 행위, 줄이 끊어질 듯 강하게 두드려대는 타건, 음을 한껏 밀어 올리는 글리산도 등으로 표현됐다. 특히 피아노 내부의 프레임을 딱딱한 말렛으로 빠르게 치는 것이나 피아노 현을 신용카드로 강하게 긁는 것 등은 일반적인 악기 주법으로 만들어내는 ‘더 세게’와 ‘더 빠르게’에서 한발 더 나아가 마치 번아웃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비정상적이고 광기 어린 분위기를 만들었다. 전반적으로는 현악기 하모닉스가 전면에 드러나는 여리고 투명한 짜임새와, 모든 악기가 투티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듯한 강하고 느린 펄스가 번갈아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작품 내내 긴장감이 이어져 연주자뿐 아니라 관객도 어깨에 힘을 주고 감상을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얼룩진 잔향들> 역시 다섯 악기가 만들어내는 화려한 음향과 빠르고 맹렬히 반복하는 음형들, 강력한 타건과 함께하는 투티가 특징적이었다. 이 작품에도 현악기와 관악기 및 피아노에서 사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특수주법이 활용됐으며, 음역과 타격 방식, 음질에 따라 구분되는 수많은 음향 블록이 만들어졌다. 짓누르는 소리와 가볍게 부상하는 듯한 소리, 박절적(metric)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 풍부한 배음을 가진 채 넓은 음역에 퍼져있는 지속음과 마치 사이렌을 울리듯 음산하게 반복하는 소리가 두루 사용됐고, 이를 통해 ‘쾰른성당’에 마주한 작곡가의 감정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특히 다채로운 음향 블록 사이로 다양한 유형의 펄스가 등장함으로써 수직적으로 구성된 총천연색 사운드를 앞으로 또 앞으로 전진시켰다. 화음을 반복하는 행위는 그 어떤 소리에도 시간 축을 부여할 수 있기에, 다소 공격적이기는 해도 작품 특유의 광적인 에너지를 전달하는데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은 느닷없는 중단과 짜임새 전환을 계속하다가, 먼 과거에서 울리는 듯한 작은 종소리로 분위기를 전환시킨다. 옅은 음향층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귀를 먹먹하게 하는 고주파의 극단적으로 단출한 음향이 등장한다. 여기에 오르골 소리,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는 듯한 치지직 거리는 소리가 간섭해오더니, 비틀거리며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듯한 ‘바흐 코랄’이 등장한다. 바로 이 지점부터 <얼룩진 잔향들>은 유사한 진행을 갖는 것처럼 보였던 <소외>와는 완전히 다른 층위의 음악이 된다. 코랄 인용 전까지는 앙상블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색다른 사운드를 마치 실험실의 과학자가 탐구하듯 순수하게 음향 그 자체로 전시했다면, 코랄 이후에는 ‘역사성’이나 ‘시간의 흐름’이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을 품은 듯 보였다. 더 나아가 연주회 내내 수많은 음향을 겪은 관객에게 좀 다른 방식으로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낡은 테크놀로지와 바흐, 그리고 프리페어드

<얼룩진 잔향들>은 코랄이 나오기 직전 라디오 노이즈와 오르골 소리를 들려주는데, 이런 ‘기계’가 만들어내는 음향적 신선함이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외계인처럼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라디오는 1980~90년대까지만 해도 실생활에서 한창 쓰이며 제 기능을 했지만, 이제는 ‘낡은 테크놀로지’의 하나로, 보다 정확하게는 ‘레트로한 무언가’로 취급받는다. 이는 21세기가 되어서야 이 기계의 조음 원리와 음향적 특성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그것이 이제는 낡은 것이 되었기에 실용성에서 벗어나 노이즈를 들려줄 수 있게 되었고, 무대 위에 전시됨으로써 과거의 시간을 의미하는 음향적 오브제로 기능할 수 있다.

다시 음악회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이날 등장했던 기상천외한 도구를 떠올려 보자. <그 때, 그 공기들에 대하여>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세탁기에 달려있는 플라스틱 호스를 쭈욱 잡아당기며 점점 높아지는 음을 들려주고, <몸짓들>에서는 피아노 현 위에 휴대용 진동기를 올려 두어 피아노 전체가 낮은 진동과 함께 울린다. 화장실 솔을 가져와 글리산도를 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서 연주를 하기도, 마지막 화음 대신 종이를 구기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한다. 이날 음악회 내내 여러 번 등장하며 가장 깊은 인상을 주었던 소리 중 하나는 신용카드를 피아노 현에 대고 수직 방향으로 힘껏 긁는 것이었다. 수십 년 동안 쓰였던 못이나 종이 등의 ‘식상한’ 프리페어드가 아니라, 일상의 소품과 단순한 기계를 활용한 특수주법들. 이런 시도는 ‘라디오’와 마찬가지로 ‘신용카드’의 소리를 처음으로 듣게 하고, 이 물체를 재발견하게 하며, 앙상블의 연주방식에 현재성을 부여한다.

예컨대 이날 음악회는 <얼룩진 잔향들>의 후반부에 이르러 다섯 작품 전체에 걸쳐 등장했던 다양한 물체와 소리의 역사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했다. 관객은 그제서 비로소 아날로그 테크놀로지의 소리를 청취할 수 있었고, 동시에 21세기의 음향 풍경을 섬세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오르골 소리로 인해 그로테스크한 투티가 보다 화려하게 다가왔으며, 격렬한 펄스를 들었기에 바흐의 삼화음이 주는 풍성함이 극대화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소리를 새로이 다시 경험하는 시간 안에서, 이를 청취하고 있는 ‘나’의 현재성이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바로ㆍ지금ㆍ여기에 앉아 있었기에 바흐와 세탁기 호스, 비르투오소한 제스처로 즉흥연주를 행하는 연주자를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단지 아방가르드한 음향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극히 다양한 소리를 다시 발견하게 했기에, 시간 축을 넘나드는 곡예를 감상하는 듯한 청취의 짜릿함이 공연 내내 가득했다.(글 이민희 음악평론가)

 

 "재발견된 소리, 현장 청취의 즐거움: 박정은 작곡발표회 리뷰",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22」(2023.02.2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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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22

한국 창작음악의 현재를 다루는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22호. 음악학자, 작곡가, 음악평론가로 구성된 모임 ‘오작’은 한국 창작음악의 현재를 기록하고 토론하는 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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