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 리뷰

2017. 4. 22. 16:28

2017년 4월 9일 오후 5시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Dennis Russell Davies, 1944-)가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연주로 통영국제음악당에서 2017 통영국제음악제 폐막공연이 열렸다. 1부에서는 존 아담스(John Adams, 1947-)의 <빠른 기계를 잠깐 타다>(Short Ride in a Fast Machine, 1986), 윤이상의 <서주와 추상>(Fanfare and Memorial, 1979), 윤이상의 <클라리넷 협주곡>(1981) 및 클라리넷 협연자 만츠(Sebastian Manz, 1986)가 앵콜곡으로 준비한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의 <클라리넷을 위한 세 개의 소품>(1919) 중 3악장이 연주됐고, 2부에서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 1913) 및 앙코르곡으로 차이콥스키(Tchaikovsky)의 <호두까기인형> 중 “파드되”(Pas de deux)가 연주됐다.

앙코르를 포함해서 이날 연주됐던 여섯 곡이 가진 공통점이 있었다. 음악이 불협화적이든 비교적 조성적이든, 혹은 원곡의 분위기가 무겁든 가볍든 간에 연주된 모든 곡이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느낌으로 표현됐다. 존 아담스의 첫 곡은 금관 팡파레로 밝은 분위기를 만들었고 이어진 윤이상의 곡들은 역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너무 무겁지 않은 느낌으로 연주됐다. 대부분의 곡이 근대음악 내지는 현대음악으로 분류되지만 청중이 음악을 들으며 축제를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보통 빠르기의 시원한 드라이브 - 존 아담스의 <빠른 기계를 잠깐 타다>

<빠른 기계를 잠깐 타다>는 목탁을 두드리는 듯한 우드블럭의 펄스(Pulse)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 리듬은 작품 내내 거의 변함없이 유지된다. 그런데 작곡가는 이 리듬을 오케스트라 전체의 진행과 ‘맞지 않게’ 작곡해 놓았다. 언뜻 들으면 우드블럭 주자는 홀로 틀린 음을 연주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은 우드블럭 리듬과 전체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어울리느냐에 따라 긴장감이 넘치는 리듬적 난곡으로 들리기도, 혹은 각기 다른 리듬을 성부별로 연주하는 편안한 곡으로 들리기도 한다. 만약 작곡가가 프로그램 노트에 써 놓은 것처럼 이 곡에서 ‘스포츠카를 타고 달리며 느껴지는 아찔함’을 경험하려면 우드블럭이 전체 오케스트라에 대항해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날 청취된 음악은 스포츠카를 타고 달릴 때 느껴지는 ‘아찔함’ 보다는 보통빠르기의 ‘시원한 드라이브’와 유사했다. 옆 차선에는 내 차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리는 차들이 있고, 서로 다른 속도로 달리던 차들이 가끔씩 동일한 지점을 통과하는 것처럼 음악이 흘러갔다. 섹션 전환부에 이르러 짜임새가 완전히 교체될 때에는, 터널을 막 통과해 새로운 풍경이 쏟아지는 장면이 연상됐다. 데이비스의 지휘는 보통빠르기의 풍경을 교차해 보여주며 다양한 팡파르를 들려주고 있었다. 음악은 전반적으로 밝은 분위기를 유지했다. 음악회를 여는 첫 곡으로 손색이 없는 선곡과 해석이었다.

 

단축된 2분 30초가 의미하는 것 - 윤이상의 <서주와 추상>

가장 널리 청취되는 <서주와 추상>은 1988년 로린 마젤(Lorin Maazel)이 베를린필하모닉과 녹음한 버전일 것이다. 이 음악은 대략 19분 정도의 시간으로 녹음되어 있다. 반면 이날 연주된 <서주와 추상>은 16분 30초 정도의 길이로 연주됐는데, 단악장 곡임을 감안하면 마젤의 버전에 비해 대략 2분 30초 정도가 단축된 셈이다. 따라서 이날 공연에서 단축된 2분 30초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주와 추상>은 제목이 암시하듯 서로 대조되는 세계로 구성된 작품이다. 작품 초입에 등장하는 금관악기 팡파레는 ‘서구적인’ 음악 단편으로 읽히며, 수평으로 진행하는 목관악기 및 현악기 선율은 ‘동양적인’ 것으로 들린다. 특히 이 동양적인 제스쳐는 길고 구불구불한 형태로 되어 있으며 비교적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요소가 추가되는데,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듯한 하프의 소리다. 음악은 하프 독주의 등장으로 계속해서 중단되며, 일단 하프가 연주를 시작하면 그 위에 다양한 선율이 얹혀 곧 복합적 요소로 구성된 음향이 완성된다.

따라서 <서주와 추상>을 이해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서주’와 ‘추상’(推想)이라는 두 개의 대조적인 토픽과 더불어, ‘서양’과 ‘동양’이라는 이분법적 세계를 작품에서 발견하고 이것들이 서로 얽히고 융합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살피는 것이다. 실제로 앞서 언급했던 마젤의 연주에서는 능숙하게 표현된 동양적 암시를 읽을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현악기와 목관악기 패시지가 동양적 정취를 가진 것으로 아름답게 표현된다.

반면 이날 데이비스의 해석 안에서는 국악기에 기원을 두는 다양한 선율적 제스처가 그 기원과 어느 정도 ‘분리’된 채 무척 단호한 형태로 표현됐다. 이를테면 한 음을 목적지로 삼아 계속 상승하는 형태의 제스처들이 무척 꼿꼿한 형태로 연주됐고, 이런 패시지에 ‘서정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였다. 따라서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으로 양분되던 구도 역시 어느 정도 허물어져, 사실상 이날 청취한 음향은 성부가 종횡으로 얽혀 움직이는 소리 응집체 그 자체로 느껴졌다. 특히 여러 가지 요소가 번갈아 등장하며 복잡하게 발전된 클라이맥스의 풍경은, 넝쿨이 뻗어나가고 나무줄기가 무서운 기세로 솟아오르는 동색(同色)의 여름 숲을 보는 것 같았다.

즉 마젤이 동양적 패시지를 충분히 표현하기 위해 긴 시간을 할애했고 이를 통해 동서양의 전형적 세계를 그려냈다면, 이날 데이비스는 현악기나 목관악기의 동양적 제스쳐를 보다 간소하게 표현함으로써 전체 연주시간을 줄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달리 말하면 데이비스는 그간 ‘윤이상’이라는 이름에 묻어있던 동서양의 이분법적 구도 및 동양적 선율을 해석하는 스테레오타입을 벗겨내 2분 30초를 단축시켰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런 광경은 하나의 작품이 작곡가의 품에서 벗어나 다양한 해석을 만나며 홀로서기를 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이어지는 <클라리넷 협주곡> 및 <봄의 제전>과 어우러져 음악회 전반을 관통하는 활기차고 역동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젊은 연주자의 분투와 선율의 역동성 - 윤이상 <클라리넷 협주곡>

윤이상의 선율은 서구전통에서처럼 완결된 형태를 지향하지 않는다. 윤이상의 선율은 중심음을 축으로 다양한 음이 계속해서 움직이며 이때 하나의 음에서 다른 음 사이의 공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 마치 국악 작품에서 하나의 음을 중심으로 떠는 음과 꺾는 음, 흘러내리는 음과 구르는 음 등이 다양하게 형성되는 것처럼, 윤이상의 음과 음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움직임이 들어있다. 한편 독주악기로서의 ‘클라리넷’은 음역이 무척 넓은 편에 속하며 각 음역에서 다양한 아티큘레이션을 민첩하게 바꿔가며 연주할 수 있다.

이날 청취한 윤이상의 <클라리넷 협주곡>에서는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사항, 즉 윤이상 특유의 선율적 특성과 클라리넷 고유의 특성이 효과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이날 클라리넷은 가장 높은음을 ‘중심음’으로 설정해 놓고, 가장 낮은 음에서 이 가장 높은 음까지 단숨에 뛰어올라가기를 반복했으며, 가장 낮은 음과 높은 음이 만드는 공간 전체를 화려한 움직임으로 민첩하게 누볐다. 음과 음 사이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역동적 움직임이, 한 악기가 보여줄 수 있는 음역 전체를 통해 가장 확장된 형태로 드러난 셈이다.

협연자였던 클라리네티스트 만츠(Sebastian Manz, 1986-)의 존재감도 상당했다. 이 젊은 비르투오소는 난곡이라 일컬어지는 이 작품을 고도의 테크닉으로 무난히 소화해냈다. 특히 연주를 듣는 내내 연주자가 상당히 어려운 테크닉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계속해서 특정 패시지를 ‘성공’시키고 있다는 점이 계속해서 부각됐는데, 바로 이 점이 윤이상 특유의 선율과 결합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눈앞에 선 연주자의 ‘시도들’은 윤이상의 선율이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지점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일종의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젊은 비르투오소의 분투(奮鬪)가 윤이상 선율에 내재한 부단한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젊은 연주자가 더 어려운 테크닉을 보여주고, 곡예에 가까운 제스처를 소화해내는 매 순간마다 청중은 윤이상 음악 속 음과 음 사이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역동성에 점점 더 주목하게 됐다. 이 경우 만츠가 해석한 선율이 동양적이었는지 혹은 재즈적이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가 클라리넷의 전 음역을 누비며 존재를 과시하면 할수록, 그는 윤이상 선율의 힘을 형상화한 화신(化身)으로 존재하는 듯 보였다.

 

이교도의 제전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축제로 -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이날 연주된 <봄의 제전>은 이교도의 제전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축제를 연상시켰다. 청중은 연주를 들으며 스트라빈스키가 표현하고자 했던 기이한 음들이 100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편안한 소리가 된 것인지, 아니면 100년 후의 청중은 가상의 이교도가 되어 이 음악을 진정 즐길 수 있게 된 것인지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날 연주는 청중이 ‘제전’이나 ‘원시주의’ 같은 낯선 개념에서 벗어나, 음과 음의 연결과 선율 그 자체 그리고 리듬 및 짜임새에 집중하도록 했다. 특히 통영국제음악당 콘서트홀이 만들어내는 깔끔한 울림은 <봄의 제전>의 중음역과 내성을 유난히 깨끗하게 청취할 수 있게 해주어 이런 청취를 도왔다.

이런 접근이 청중의 관점에서 항상 옳은 것인지는 자신할 수 없다.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격하게 연출된 자극적인 <봄의 제전>을 듣기 위해 연주회장을 찾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기존의 강렬한 해석들이 100년 내내 이어져 식상한 측면도 없지 않기에, 이날 연주가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어둡고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축제 현장의 흥분으로 느껴졌으며, 전반적으로는 쾌활하고 즐거운 분위기가 배어나왔다. 음악제의 ‘폐막’ 보다는 긴 여름의 ‘개막’에 더 어울리는 연주였다.

 

웹진 [그라모프], (2017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