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음챔버오케스트라 제 42회 정기연주회 “모차르트 3대” 리뷰

2020. 1. 3. 04:38

현악오케스트라 자체 레퍼토리 계발의 가장 좋은 사례

 

하나의 악단이 긴 세월 유지되려면, 그리고 이들이 자신만의 색깔을 갖되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이 서로 다른 묘안을 제시하겠지만, 2019년 11월 24일 화음(畵音)의 정기연주회를 본 청중이라면 이에 대한 답을 ‘악단 고유의 자체 레퍼토리 계발’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편곡’과 ‘창작곡의 위촉 초연’ 그리고 음악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스토리텔링적 선곡’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이 긴 시간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재확인시켜줬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안성민 작곡가가 편곡한 프란츠 모차르트(F. X. Mozart)의 <피아노 사중주 Op. 1> 그리고 에르완 리샤(Erwan Richard)가 편곡한 쇼스타코비치(D. Shostakovich)의 <현악사중주 13번>이 관객을 만났다. 클래식 음악의 전제가 비록 과거 음악의 ‘불멸의 형태’라는 것은 이의가 없으나, 이런 ‘클래식’ 역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새로운 방식으로 연주됨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편곡은 악단의 편성에 맞게 원곡을 재가공하는 것이며, 클래식 음악 특유의 정격성을 숙고하게 함으로써, 신선한 청취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한편, 오랜 시간 앙상블을 맞추어 온 능숙한 연주자들이 작곡가에게 지속적으로 작품을 위촉하는 것은 작곡계에 좋은 창작환경을 제공하는 행위이며, 악단 고유의 레퍼토리를 만들고 이를 통해 특유의 정체성을 쌓아가는 여정이다. 특히 이날 공연에서는 화음이 위촉하고 초연한 곡이 200회를 맞게 됐다. 그리고 200번째 위촉곡의 영광은 젊은 작곡가 ‘김신’에게 돌아갔다.

 

초기 낭만주의 레퍼토리의 재발굴

<피아노 사중주 Op. 1>은 프란츠 모차르트가 11살 때인 1802년 완성한 곡이다. 프란츠는 모차르트의 6남매 중 막내로 비록 모차르트가 죽을 때 겨우 4개월 밖에 되지 않았지만 형제 중 유일하게 음악가가 되었다. 이날 음악회에서는 프란츠의 ‘4중주’가 작은 규모의 ‘피아노 협주곡’, 즉 <피아노와 스트링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으로 재탄생됐다.

프란츠 모차르트의 <피아노 사중주 Op.1> 첫 악장은 몰아치는 느낌의 다소 진지한 소나타다. 편곡 버전의 경우, 원작인 사중주과 크게 다른 점이 느껴지기 보다는 피아노에 중점을 둠으로써 음향적으로 보다 안정감 있는 구도를 만들어냈다. 2악장은 1악장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무게감 있는 아다지오다. 원곡에서는 피아노를 둘러싼 현악기의 음향이 단출한 느낌을 주는 반면 이를 현악오케스트라로 편곡함으로써 독주 피아노 패시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또한 원곡에 등장하는 소박한 선율이 충분한 루바토와 함께 표현됐고, 자칫 밋밋할 수 있었을 이런 선율에 스케일이나 꾸밈음이 추가되어 마치, 고전주의 풍으로 아름답게 ‘말하는 듯한’ 무드가 탄생했다. 트릴, 연타, 꾸밈음 등이 추가된 3악장 주제도 마찬가지다. 3악장은 주제와 변주곡으로서 프란츠의 원곡에서는 총 8개의 변주로 구성되어 있지만, 편곡 버전에서는 1변주 이후에 곧바로 5변주가 등장한다.

원곡의 2변주는 피아노 파트가 앞서 나온 테마를 유사하게 반복하며, 3변주와 4변주의 경우 피아노 파트는 단순히 반주만을 계속하는 가운데 현악기의 선율적 흐름이 강조된다. 아마도 이런 원곡의 짜임새 때문에 2~4변주가 편곡에서 제외됐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1변주 뒤에 5변주가 곧바로 배치되면서, 피아노의 빠른 음형과 현악기의 유려한 선율이 하나의 흐름으로 묶이고, 더 작고 섬세한 변주와 더 크고 격정적인 변주가 대구를 이루게 된다.

이처럼 무미건조한 반복과 부연처럼 느껴질 수 있는 몇몇 패시지가 사라지고 원곡의 사중주 구성에서 도드라졌던 현악기의 대위법적 선율이 삭제되어 음향의 뒤편으로 밀려난 가운데, 프란츠의 작품은 아름다운 선율과 이를 감싸주는 다소 호모포닉한 현악기 배경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안성민의 편곡과 윤철희의 해석으로, 프란츠의 음악은 지극히 매력적인 초기 낭만주의 음악의 전형이 되었다. 이는 프란츠의 작품이 아버지의 그늘 없이도 21세기의 청중과 만날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절정 이후에 찾아오는 생경한 아름다움 

김신의 음악은 지극히 회화적이다. 이는 작곡가가 제시한 프로그램 노트의 몇몇 키워드를 읽고 청자가 곡 전체를 오롯이 상상해 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김신은 중국의 화가 장 칭이(Zhang Qingyi)가 그린 <명상 중의 고행자>를 출발점으로 삼아 “번뇌, 인고, 찬란한 욕망의 유혹, 깨달음, 묵상과 찬가, 그리고 환희”를 음악으로 표현했다. 이와 같은 단어들은 극도로 추상적일 뿐 아무런 이미지도 제시하지 않지만, 작곡가가 디자인한 음향의 질감과 흐름을 통해 꽤 구체적이고 뚜렷한 상으로 재현된다.

타악기의 날카로운 타격과 함께 쏟아져 내리는 음들, 그리고 귀를 사로잡는 마라카스 소리가 일종의 ‘번뇌’로 인지되는 가운데, 일정한 맥박 위에 천천히 진행되는 선율은 ‘인고’를 연상시킨다. 이 선율은 현악기의 고음과 피아노로, 때로는 타악기와 함께 겹쳐져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또한 이 선율은 수직적으로 엇갈려 결을 만드는 리듬, 타악기의 트레몰로와 현악기의 미분음, 그리고 규칙적인 리듬을 갖고 꾸준히 상승하지만 본래의 자리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는 음정에 휩싸여 있다. 

한편 빠른 음형의 등장으로 완전히 새로운 섹션이 시작된다. 이 부분은 아마도 ‘찬란한 욕망의 유혹’으로서, 모든 악기들이 작고도 큰 소용돌이를 이루며 끝없이 움직인다. 여기에 거대한 팀파니의 맥박과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선율이 추가됨으로써 드디어 작품 전체의 거대한 클라이맥스가 완성된다. 하지만 클라이맥스는 의외의 흐름을 맞는다. 클라이막스를 추동하던 힘이 사그라들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완전히 새로운 모티브가 등장해 생경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주목할 것은 “번뇌, 인고, 찬란한 욕망의 유혹, 깨달음, 묵상과 찬가, 그리고 환희”라는 흐름이 내재한 동양적인 혹은 비서구적인 서사 전개다. 우리는 ‘기승전결’에 익숙하며, 서양음악의 대부분은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리고 그 이후에는 서서히 마무리된다. 하지만 김신이 표현한 고행자의 여정 안에는 ‘욕망의 유혹’이 비록 서구식의 위기와 절정을 연상시킨다 할지라도, 그 이후에 닥칠 더 중요한 국면을 준비한다. 

따라서 클라이맥스가 긴 시간에 걸쳐 사라지고 나서야 깨달음의 순간이 등장한다. 깨달음은 초반으로의 지루한 복귀나 전형적인 인과성과는 관계없는, 그 자체로 독립된 음향이며, 이 때문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이제 깨달음을 거친 음향은 마지막 코랄로 이어지며, 미분음과 불협이 만들어내는 음향의 공간이 환희로 이어진다.

작곡가의 <명상 중의 고행자>는 시리즈로 작업되고 있으며, 이 작품은 그 중 세 번째다. 작곡가가 그리는 고행의 이미지가 어떤 방식으로 계속될지 알 수 없으나, 이 작품이 생경한 아름다움으로 화음의 200번째 위촉초연을 뜻깊게 만들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차르트, 그리고 계속되는 쇼스타코비치 시리즈 

할아버지·아버지·손자 모차르트의 작품이 동시에 무대에 오르는 기회는 흔치 않지만, 이날 음악회에서는 앞서 언급한 프란츠의 작품과 함께 비교적 친숙한 아버지 볼프강의 <세레나테 6번>(Serenata Notturna) 그리고 할아버지 레오폴트(L. Mozart)의 <신포니아>(Sinfonia in B)가 관객을 만났다. 이런 기획은 자주 연주되지 않는 프란츠의 작품에 역사성을 더하는 시도이며, 세 작품의 양식을 비교해보는 재미를 만들어낸다. 또한 음악회 안에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을 부여함으로써 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부여한다.

화음이 꾸준히 작업하는 쇼스타코비치 편곡도 관객과 비평가가 함께하는 좋은 스토리텔링 테마다. 화음은 이날 악단의 비올리스트인 에르완 리샤의 편곡으로 쇼스타코비치 <챔버 심포니 13번>을 비올라와 현악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초연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사중주 편곡은 화음의 대표적인 프로젝트로서, 관객으로 하여금 작곡가가 당면했던 음악과 사회의 관계를 반추하게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생애 말기에 <현악사중주 13번>를 작곡하면서 죽음에 대한 고민과 아끼던 동료에 대한 마음을 작품에 담아냈다. 이를 반영하듯 작품 안에는 비올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데, 이번 편곡에서는 비올라의 선율적 특성과 매력이 콘체르토 형태로 한껏 강조됐다. 특히 편곡 버전에서는 스네어 등의 타악기가 적극 활용됨으로써 보다 강렬한 느낌을 만들어냈고, 작품의 중반에 등장하는 빠른 섹션에서는 새롭게 추가된 저음 현악기가 원곡의 리듬과 호흡을 훨씬 더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악단을 이끄는 에르안 리샤의 연주력이 인상적이었다.

이처럼 화음챔버오케스트라는 편곡, 위촉초연, 스토리텔링을 가미한 기획을 통해 자체 레퍼토리 계발의 가장 좋은 사례를 보여준다. 이제 화음의 위촉초연작이 200개를 넘었고, 쇼스타코비치의 사중주 편곡도 곧 마무리될 것이다. 앞으로의 여정과 계획이 무엇이든 간에, 긴 시간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연주계·작곡계에 귀감을 보이는 화음의 행보에 박수를 보낸다.

 

2019년 예술작품지원사업 리뷰비평 (20191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