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대한민국 실내악 작곡제전 V 리뷰

2020. 1. 2. 00:40

퍼포먼스의 다양한 층위들

 

작곡가와 연주자의 입장에서 ‘퍼포먼스’(performance)라는 단어는 너무도 흔하기에, 이 말이 가진 함의를 짐작하기에 오히려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이 개념은 다양한 단계의 음악활동을 지칭하며, 최근 연극 및 미디어연구 분야에서 새롭게 조망되고 있는 연구 주제이기도 하다. 특히 연극계에서는 형식주의적 접근과 구분되는 ‘퍼포먼스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20세기 후반 생겨났다. 이에 따르면 퍼포먼스란 “무엇인가 행하는 것으로서의 액션들, 혹은 액션의 주체로서의 인간과 상관관계를 맺고”있는 것이며, “재현도구로서의 육체와, 현재의 액션으로부터 기인하는 시간성과 공간성을 포함”하는 것이다. 한편 퍼포먼스라는 개념을 음악에 한정했을 때에는, 연주자의 연주행위 혹은 연주 그 자체, 그리고 음악과 극이 섞인 복합적인 무대극을 지칭한다.

이렇게 다양한 퍼포먼스의 층위가 존재하는 가운데, 2019년 11월 13일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에서 열린 ‘대한민국 실내악 작곡제전’에서는 총 세 종류의 퍼포먼스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이날 연주된 작품은 첫째, 사회를 반영하는 음악을 통해 사회적 퍼포먼스의 은유를 경험케 하거나, 둘째, 작곡가의 표제적 심상에 의해 청자의 인식 속에 퍼포먼스를 체험하게 하며, 셋째, 다매체 혹은 복합매체로서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첫 번째 층위의 퍼포먼스에 속하는 김수혜 작곡가의 플루트, 바이올린, 첼로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사중주>는, 소리나는 음악 그 자체가 한 사회를 반영한다. 이 경우 하나의 음악작품은 사회 전체의 움직임과 역동성을 보여주는 매개가 된다. 무엇보다도 김수혜 작곡가는 수년 전부터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는 테마로 작업을 해오고 있는데, 이 작품 역시 이런 관점 안에서 2019년의 현재를 그린다. 특히 연주자들이 활시위를 당기듯 서서히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섹션의 막바지에 이르러 활을 쏘듯 클라이맥스를 만드는 모습은, 이들이 누구보다도 이 작품의 흐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이는 연주자들이 작품 속 사회의 반영을 무의식적으로 체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설수경 작곡가의 베이스 클라리넷과 스트링 트리오를 위한 <수원화성문>은 나혜석이 그린 동명의 그림을 ‘세계’로 삼아, 그 안에서 느낀 감정을 음악으로 구현한다. 무엇보다도 설수경의 작품에는 그림 표면에 등장하는 상이나 채색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다채로운 프레이즈와 이따금 감지되는 규칙적인 펄스의 음향이 있을 뿐이다. 이는 화가가 그림을 그려나가듯, 작곡가가 음향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는 ‘수행성’ 안에서 생겨난 흔적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행위가 실제 관객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전달됐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이복남 작곡가는 클라리넷, 2대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타악기를 위한 <순례(巡禮)>를 통해 ‘순롓길과 얽힌 다양한 장소와 사건’을 그가 상상한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특히 이 작품은 초현실적인, 그리고 일상에서 쉬이 경험할 수 없는 장면 및 감정을 그린다. 따라서 관객은 작곡가가 만든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 그가 경험한 방식으로 순례의 여정을 돌아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는 ‘순례’라는 제목이 가진 동적인 이미지가 관객의 청취 안에서 비로소 온전하게 의미화되는 순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의진은 바이올린, 클라리넷, 피아노를 위한 <Encore avec...>를 통해 드뷔시를 직접적으로 지칭한다. 특히 작곡가는 8음 음계를 작품 전반에 사용했다고 진술하며, 이를 드뷔시와의 연결고리로 언급했다. 하지만 실제 연주에서는 작곡가가 선언한 ‘드뷔시의 유산’을 포함해, 드뷔시에게 영향을 받았던 다양한 작곡가, 그리고 작곡가 특유의 작법이 모두 함께 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설수경, 이복남, 이의진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음악으로 지시하고 있었으며, 청자가 이를 듣고 가상의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했다.

한편 오예민과 김승림의 작품에는 ‘직접적인’ 의미의 퍼포먼스가 부각되며, 무대 위 연주자의 존재가 보다 힘있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오예민의 소프라노와 라이브 비디오 그리고 전자음악을 위한 <A Girl in Time>에서는 노래하고 움직이는 성악가 뒤에 영상과 인터뷰가 흐르는 스크린이 세워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오예민이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삼아 ‘시간성’을 탐구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피해자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것’으로 고정했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피해자를 무대 위 오브제로 전시함으로써 지극히 절대음악적인 시각으로 고통을 대상화했다는 비판을 지울 수 없다. 동시에 레트로한 영상 이미지와 역재생되는 인터뷰 음성을 통해, 이 작품이 지극히 아름다운 시청각적 퍼포먼스로만 남게 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살아있는‘ 성악가의 현전(現前)으로 작품의 어조가 달라질 수 있다. 이는 퍼포먼스를 이끄는 성악가의 힘을 보여준다.

김승림의 작품은 표제적 의도가 부재하며, 음악 속 그 어떤 요소도 외부의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다. 특히 작곡가는 이 작품을 타악기 듀오 ‘모아티에’에게 헌정했는데, 이 팀이 두 명으로 구성됐다는 점에 착안해 작품 안에 대칭 및 대조의 구조를 포함시켰다. 한발 더 나아가 이 작품에는 실시간으로 제어되는 전자음악적 장치가 있으며, 이는 어쿠스틱한 악기로 만들어 낸 복합적인 음향을 한층 더 세분화된 층위로 나눈다. 그리고 이렇게 구성된 추상적인 음의 세계는, 악보를 보고 쉬이 연주할 수 없는 고난이도의 작품으로 연주자 앞에 존재하게 된다. 예컨대 이 작품은 순수하고 추상적인 소리 그 자체를 들려주고자, 역설적이게도 그 다른 반쪽의 세계, 즉 타악기 주자들의 부단한 움직임과 제스쳐를 필요로 한다. 다만, 공연 당일 전자음악 파트가 제대로 재생되지 않아 음향의 다양한 실험을 관객이 함께 체험할 수 없었다는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퍼포먼스가 가진 연주자의 육체성 그 자체를 전면에 드러내고 있었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음악춘추」, 292호, 2019년 12월 (2019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