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챔버 사운드이펙트서울 2019 리뷰

2020. 4. 1. 23:25

에코챔버를 독해하는 다양한 방식

2019년 11월 29일(금) 오후 7시 / 30일(토) 오후 3시 대안공간 루프, 화음 프로젝트 아카데미

 

사운드이펙트서울2019의 전시가 대안공간 루프에서 진행되는 가운데, 화음 프로젝트 아카데미의 작곡가들이 ‘에코챔버’를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였다. 에코챔버란 최근의 디지털 환경을 은유하는 용어로, 인터넷을 이용하는 개인이 자신의 검색기록, 구매내역, 위치 등을 기반으로 하는 선별된 정보만을 접하면서, 결국 편향된 사고로 구성된 각자의 ‘버블’ 즉 ‘에코챔버’ 안에 갇히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언뜻 ‘에코챔버’를 주제로 음악을 만드는 것은 꽤 까다로워 보인다. 하지만 ‘에코챔버’는 애초에 “공명, 잔향, 반복, 기억, 자기 반사, 확인 편향” 등으로 확장될 여지가 있기에, 음악과 만나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날 작품을 선보인 7인의 작곡가들은 ‘에코챔버’를 ‘편견, 과거의 기억 및 재구축, 불완전성, 대위법, 정보의 침해, 정보 속 길 잃음, 공명과 잔향’과 같은 독특한 관점으로 전유했다. 이 모든 시도는 ‘에코챔버’의 특정 면면을 날카롭게 파고든 것으로서, 그 문제의식과 표현방식이 지극히 음악적이었던 것은 물론 객석의 관객에게도 깊은 울림을 줬다.

 

권욱현, <Bias> for Violin solo

바이올린 연주자의 모습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다양한 방향으로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지판에 가 있는 왼손은 바이올린의 네크를 좌우로 오가며, 오른손으로 쥔 활은 위 아래로 움직인다. 여기에 이 작품은 몇 개의 벡터를 추가하는데, 첫째, 연주자의 몸 안쪽으로 향하는 다양한 강도의 활의 압력, 그리고 둘째, 활을 지판 가까이에 두었다가 다시 줄걸이 쪽으로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좌우 운동이 그것이다. 반면 이 곡에서는 선율이나 음정 등의 전통적인 파라메터는 상대적으로 단순하게 취급된다. 음악은 시종일관 글리산도와 중음 주법을 사용하고, 이따금 등장하는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큰 음량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연주자의 움직임과 퍼포먼스가 강조되는 방식으로 구현되며, 무엇보다도 이 소리를 직접 만들어내는 연주자 특유의 호흡과 부단한 기합이 청취의 중심이 된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물질성’이 연주자의 제스처를 통해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도 인상적이다. 흥미로운 것은 음악 속 모티브가 ‘전개’된다기보다는 강박적으로 ‘반복’되고 있으며, 대화의 ‘단절’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기승전결의 감각이 애매모호하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작곡가가 의도했던 것처럼 이 곡이 ‘편견’(bias) 즉 제한된 정보를 통한 소통의 불가능이라는 테마를 담고 있어서일 터다.

결국 이 음악은 수없이 많은 움직임의 벡터로 망을 만들어내고, 이 닫힌 세계 안에서 바이올리니스트로 표상되는 누군가의 계속되는 외침을 보여준다. 그는 제한된 음정과 선율로 둘러싸인 편향된 세계 안에서 유사한 제스처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서지웅, ... Moments Musicaux ...

작곡가는 본인의 경험을 관객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이 경험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마침내 아름다운 소리를 발견하는 과정’으로서, 그 결과물만을 제시하는 일반적인 작곡·연주·청취와는 구별된다. 작곡가는 ‘작곡하기’의 경험과 과정을 음악으로 엮었다. 이는 조명이 없는 상태에서 음악을 시작하라는 악보 초입의 지시사항을 통해 연주자에게 전달되며, 작품 맨 마지막에 적힌 암전 속 30초의 침묵을 통해 관객에게 제안된다.

이런 의도는, 사실상 일반 관객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채 신의 영역에 작곡가를 위치시키는 낭만주의 미학, 그리고 이를 토대로 쌓아올려진 현대음악의 추상적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다만, 작곡가가 그렇게 경험하여 그려낸 것들이, 낭만주의 미학을 통해 신화가 된 조성체계 및 그 안의 ‘긴장과 이완’ 법칙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예컨대 이 작품은 텍스트나 개념이 아닌, ‘화성진행의 쾌감’ 그 자체를 재현한다. 이제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악흥의 순간’이라는 제목도 이런 상황을 묘하게 암시한다. 심지어 음악 속 특정한 화성진행은 낭만주의 음악을 직접적으로 회상하며, 어떤 측면에서는 ‘인용음악’처럼 들리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를 재현하는 과정이다. 연주자들은 꽤 빽빽한 악보의 아티큘레이션을 하나하나 조합하여 특정한 무드에 도달하는데, 이는 작곡가가 적어 놓은 섬세한 지시어와 함께다. 때때로, 음악은 실어증적이며 동적이고 간혹 폭력적이기까지 한 ‘반복’을 긴 시간 등장시킨다. 그러다가 어느새 낭만주의 화성진행이 주는 그 짧은 순간의 쾌감으로 곧바로 접속한다. 이런 흐름은 전통적인 서양음악의 문법과는 사뭇 다르며, 마치 퍼즐을 맞추듯 혹은 테크놀로지에 의해 오작동 하듯 생경하게 들이닥친다.

그 순간은, 낯선 길을 더듬고 헤쳐 도달한 잘 아는 장소 같다. 또는 강박적인 파편의 반복이 떠올려 낸, 예기치 않은 과거의 추억과도 같다. 객석의 관객 또한 작품을 들으며, 그리고 마지막 화음이 끝난 후, 낯설고도 익숙한 아름다운을 느낄 수 있다. 음악 안에는 수백 년간 축적되어 온 서양음악의 과거가, 그리고 인터넷과 테크놀로지에 매개된 동시대의 음악청취 방식이 담겨있다. 말하자면 이 음악은, 선별적인 정보를 통해 편향적인 청취세계를 구축한 누군가의 기억으로서, 현대인이 음악을 접하고 느끼고 회상하는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유소정, <Incompleteness> for String trio

‘불완전성’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곡은, 세 가지 층위에서 이런 테마를 짐작케 한다. 첫째는 곡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이어지는 ‘해결되지 않는 긴장감’의 감각이다. 음악은 수없이 많은 리듬적 분절과 음향적인 실험을 행하며, 이를 다소 절박한 느낌으로 전개한다. 적어도 이 음악은 단 한순간도 뒤쳐지거나, 느긋하게 모티브를 재현하거나, 안정적인 펄스로 숨을 고르지 않는다. 이런 흐름은 ‘당면한 음향’의 불완전성을 회피하고자, 계속해서 ‘그 다음의 음향’으로 치닫는 움직임으로 읽힌다. 즉, 쏟아져 내리듯 출현하는 수많은 음들과 모티브의 연속은, 모든 구간에서 긴장감을 유지한 채 그 해결을 쫓아 영원히 질주하는 느낌을 준다.

두 번째, 이 작품에서는 비이산(非離散)적인 공간이 만들어내는 불완전성이 존재한다. 7연음, 5연음, 8연음 그리고 그 이상의 분할이 수없이 겹쳐지며, 현악기의 특수주법이 다수 등장하고, 반음의 규격 안쪽을 파고드는 4분의 1음, 그리고 그 이하의 미분음이 존재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12반음과 규칙적인 펄스 그리고 정기적인 박자가 사라진 음향은, 그로인해 어딘가에 고정되지 못하고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인상을 준다. 리듬과 음정, 악기법 그 어느 것도 정률적인 것을 따르지 않기에, 그 사이공간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이산적인 공간에서 소외되어 불완전성의 공간에 거하게 된 음들로 지칭할 수 있다.

세 번째 불완전성은, 아마도 이 곡의 리허설 과정에서 가장 먼저 감지되었을 것이다. 박자와 주법이 계속해서 변하는, 한 번에 소화하기 힘든 선율이 가득한 악보. 실제 리허설에서 울린 소리는, 작곡가가 구현하고자 했던 상상 속 음과 동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작곡가의 구상과 악보가 소리로 전환될 때 나타나는 필연적인 불완전성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유형의 불완전성이, 이 작품을 ‘완전’하게 구현하고자 할수록 저절로 스며나온다는 점이다. 기보된 음을 완벽하게 재현하면 할수록 그 음이 품은 비이산적인 공간이 펼쳐지며,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오류가 동반된다. 그리고 이런 모든 흐름은 작품 전체의 긴장감으로 작용해, 영원히 완전에 이르지 못하는, ‘해결되지 않는 불완전한’ 음향의 질주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나상윤, Reverberation

아마도 작곡가는 ‘반향’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고, 오랜 서양음악의 역사를 거쳐 완성된 대위법을 떠올렸던 것 같다. 이 음악에서는 다성부의 짜임새 안에 모방적 진행이 강조되며, 최초로 등장한 첼로의 선율이 마치 푸가의 주제처럼 그리고 이어지는 선율의 도입이 각각의 모방기점처럼 청취된다.

특히 작곡가는 오보에에게 매끄럽고 달콤한 솔로를 부여했으며, 이와 결합하는 현악기의 앙상블을 다양하게 변화시켰다. 고음의 트레몰로로 옅은 음향적 배경을 만들어 오보에를 돋보이게 하거나, 첼로에 대선율을 추가하거나, 중음으로 두텁게 울려주는 화음 반주를 넣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따금씩 등장하는 현악기의 이중주 구간도 흥미롭다. 애초에 16분음표 네 개로 이뤄진 테마의 첫 모티브가 강렬한 탓에, 이 네 음이 두 개의 악기에서 번갈아 나오는 것만으로도 지극히 모방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런 가운데 현악기들이 만드는 유니즌/대위법적인 구도의 변화, 선율/대선율 역할의 교체, 호모포니 음향에서 폴리포니 음향으로의 전환이 뚜렷하게 느껴지며, 이런 모든 짜임새의 변화가 지극히 조형적인 느낌을 준다. 물론 이런 인상에는 2도와 5도, 4도 위주로 울리는 메인 테마도 일조를 한다.

무엇보다도 구별되는 음색의 오보에를 앙상블에 포함시켜 다섯 성부의 독립된 청취를 강화한 점, 시작에서부터 계속되는 테마를 오보에의 선율적인 흐름과 결합시키고,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균형감 있는 꽉 찬 앙상블을 만들어 낸 점이 흥미롭다. 이는 ‘에코챔버’가 내포하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를 걷어내고, ‘에코’와 ‘챔버’를 지극히 음악적인 견지에서, 즉 ‘반향으로 가득 찬 실내악’으로 재해석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장승현, Intention of slowdown

연주 직전 이뤄진 작품해설은, 관객이 이 곡을 들으며 작곡가가 언급한 ‘의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침범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우선 관객은, 이 작품을 구성하는 음악요소를 두 개의 카테고리로 나눴고, 각각의 특성을 작곡가가 이야기한 개념에 투영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음악적 서사를 읽고자 노력했다.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특정 음향을 구성하는 리듬이, 비교적 동일한 음가의 반복 및 이것들의 점진적인 속도변화를 포함한다는 점이다. 16분음표의 트레몰로, 8분음표의 단호한 튜티, 16분음표와 5연음부로 구성된 음계들. 이런 소리들은 네 개의 현악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되어 지극히 고른 음향을 만든다. 물론 연주자가 리듬과 속도를 자유롭게 조절하는 부분도 있지만, 이는 대부분 점진적으로 표현되기에 하나의 음향은 음의 출현 빈도가 일정한 음뭉치를 갖게 된다.

한편 음악 안에는 짐짓 말하는 듯한, 넓은 음정을 도약하는 선율이 존재한다. 이런 선율은 다양한 음가를 사용하며 등장할 때마다 그 형태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또한 이런 선율은 비교적 짧은 길이를 갖고 있으며, 이 때문에 전체 음향 안에서 그리 잘 부각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전자의 음향이 강렬해질 때에도 그 사이사이에 등장해 이따금씩 고유의 호흡을 드러낸다.

따라서 관객은, 짧고 불규칙한 형태로 등장하는 후자의 선율에서 ‘의지’라는 인간적인 요소를, 이와는 대조되는 매끄럽고 찬란한, 고르게 질주하는 쏟아지는 음향에서 ‘침범하는 외부의 정보’를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인터넷 공간에서의 정보란, 그 데이터의 수학적 성질로 인해 좀 더 규격화된 무엇가로 표상된다. 그리고 이런 정보를 흡수하는 누군가 혹은 누군가의 ‘의지’는 나약하고도 아날로그적인, 비정형적인 무언가로 표상될 수 있다. 결국 작품의 음악적 흐름은, 이처럼 성질이 다른 두 가지 음악 요소가 얽히고, 종국에는 변형된 의지로 끝을 맺는 은유의 서사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세영, <be broken...> for Piano solo

넓은 음역에서 단단히 울리는 화음,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인 짧은 음가의 파편적인 선율이 음악을 시작한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립하며 축을 이루는 것으로서, 아마도 청자는 후자를 새로운 정보의 침범, 그리고 전자를 그것에 대항하는 개인으로 치환하여 이해할 수 있다.

첫 화음이 등장하고 그 뒤에 이끌려 나온 소리들은, 사실상 첫 화음에 속해있었던 음의 조각이다. 그에 비해 작품이 진행되면 될수록 낯선 음들이 많아진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단지 낯선 음에 그치지 않고 연타 혹은 화음의 강타와 같은 새로운 차원의 모티브가 도입된다. 작곡가가 언급했듯 이런 요소들은 점점 더 강렬해지는 정보 및 자극을 은유할 것이다. 특히 중력에서 벗어난 듯한 파편적인 음향 안에는, 고음역에서 유독 잘 청취되는 특정 ‘반음’이 발견된다. 이 반음은 음악이 진행함에 따라 각기 다른 음의 짝으로 나타나며, 이런 변화는 이 음악이 계속해서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짐작하게 해준다.

특정 섹션에서는 음과 음정을 제한적으로 사용하다가, 후반에 가서는 이를 반음계의 클러스터로 확장시키는 것도 언급할만하다. 이는 12반음이라는 시스템을 ‘가장 꽉 찬 정보의 범람’으로 상정한다. 이는 지극히 고전적인 아이디어로 읽힌다. 유사한 맥락에서, 마지막 부분에서 재현되는 느린 화음의 울림, 그리고 코다를 연상시키는 최종부의 모습은, 이 음악을 서양음악의 오래된 문법과 연결시킨다.

그럼에도 작품의 최종부 화음이 첫 화음의 온전한 복귀가 아니며, 그것의 변형을 포함하고 있고, 결국은 증4도의 울림으로 끝난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도 동떨어진 두 개의 음으로 구성된 마지막 소리는, 정보 앞에서 체념해버린, 그 안에서 공허함을 느끼는 개인의 모습을 닮았다.

 

전다빈, 언젠가, 그것은 다시 돌아오게 될거야

소리를 추동하는 힘이 생겨나 음을 발생시키고 그것이 얼마간 지속되다가 사그라드는 과정. 이 작품은 바로 이와 같은 음의 생성에 관한 프로세스를 담고 있다. 이를테면, 작품 속에서 최초로 형성되는 수직적 음향은 피아노의 강한 타격과 뒤이어 등장하는 튜티다. 이 모티브는 일종의 ‘트리거’로서, 작품 내내 가장 중심적인 아이디어로 기능한다. 이어서 첫 모티브의 잔향이 잦아드는 과정은, 다양한 이야기를 포함하는 독특한 방식의 변주로 볼 수 있다. 때로는 동일한 음군을 각기 다른 악기가 연주함으로써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기도, 서로 다른 음군을 다양한 악기가 연주함으로써 군중의 소란스러움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타격의 잔향 이후에 생성된 이런 웅얼거림이나 소란스러움이 점차 쌓여 에너지를 비축하고, 이것이 그 다음의 타격과 폭발로 이어지는 점도 흥미롭다. 말하자면 작품 안에는 하나의 음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과정이 연이어 등장함으로써, 그 내부에서 일종의 ‘작용-반작용‘의 순환을 만들어낸다. 유사한 맥락에서, 작품 최종부에 이르러 도입부와 유사한 모티브가 뒤집어진 채 등장하는데, 이런 구도는 작품 전체를 대칭으로 보이게 한다.

음악의 구조적인 흐름과 더불어, 이날 ‘루프’라는 공간 전체를 꽉 채운 ‘음향 그 자체’도 언급할 만하다. 플루트와 클라리넷을 피아노의 현 가까이에 대고 연주한 점, 다양한 방식으로 배음 및 잔향을 증폭시키고 또 충돌시킨 점, 고음의 하모닉스를 성근 짜임새 위에 올려 두어 투명한 음향덩어리를 생성해낸 점. 이런 모든 음향적 디자인은 이 음악을 ‘소리 그 자체’로 대면하고 충분히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이는 공연장에 있던 이들에게 ‘에코챔버’라는 개념을 오로지 음향적인 방식으로 각인시켜 준 것이기도 했다. 예컨대 관객들은 이런 음향에 둘러싸인 채, 작품 속 소리의 순환이 그 자체로 닫힌 소리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 (2020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