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를 통한 음악 읽기

 

전통적인 음악 해석은 음악의 표면을 파헤쳐 그 안에 내재한 소리 구조를 탐구해왔다. 음악의 의미는 텍스트(music itself)에 있다 믿었고 특정 음형에 의미를 실어 작곡가의 의도를 표현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음악 해석은 다원론적인 접근이 점점 더 중요해지는 현시대에서는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이제 쌍방으로 소통하는 음악들, 의미가 유동적으로 변하는 음악들 그리고 청자의 다양한 해석을 이끌어내는 음악들이 도처에 산재한다.

작곡가 유진선의 2015년 작 <화음 프로젝트 Op.158 ‘전람회의 그림’ 주제에 의한 변색>은 동시대적인 음악 해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탁월한 예다. 이 작품은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층위의 재현들과 이 음악을 청취하는 다양한 방식 그리고 이 음악에 대한 청자의 수용사를 고유의 관점으로 포착한다.

유진선의 작품을 받아들이는 청자의 태도도 흥미롭다. 그들은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표지(標識)를 기준 삼아 수많은 ‘전람회의 그림’ 사이를 오가며 ‘차이’를 읽어낸다. 청자의 기억과 유진선의 작품이 끊임없이 경합하고, 청자는 이를 토대로 고유의 음악읽기를 시도한다. 이들의 능동적인 해석은 음악의 의미가 항상 불안정하고 변하는 것이며 어떻게 수용되냐에 따라 일시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 재현의 결

화음(畵音) 챔버 오케스트라는 미술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창작곡을 지속적으로 위촉 · 초연해 왔다. 유진석의 <화음 프로젝트 Op.158 ‘전람회의 그림’ 주제에 의한 변색>(이하 변색) 또한 그 흐름 안에 놓여있다.

유진선의 <변색>은 좁은 의미에서는 과거의 작품을 패러디하는 ‘인용음악’이다. 이때 작곡가 유진선이 떠올릴 수 있는 인용의 원곡으로는 1874년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가 작곡한 피아노 버전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 12년 후 편곡된 투쉬말로프(Mikhail Tushmalov, 1861-1896)의 오케스트라 버전, 그리고 36년 후인 1922년 편곡된 라벨(Maurice Ravel, 1975-1937)의 오케스트라 버전 등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유진선의 작업에서는 과거 작곡가들의 ‘악보’ 뿐 아니라 무소르그스키가 만든 ‘표제’나 그 표제의 토대가 된 또 다른 이미지까지 영감의 원천으로 사용된다.

무소르그스키는 친구였던 화가 하르트만(Victor A. Hartmann, 1838-1873)이 젊은 나이에 죽자 그의 유작전시회에서 그림 10점을 골라 피아노 모음곡을 작곡했다. 모음곡에는 관객이 그림 사이를 걸어 다니는 동작을 묘사하는 다섯 개의 <프롬나드>를 포함해서 <제1곡 난쟁이>(The Gnomus), <제2곡 옛 성>(The Old Castle), <제3곡 튀일리의 정원>(Tuileries), <제4곡 우마차>(Bydlo), <제5곡 껍질속의 병아리 춤>(Ballet of the Unhatched Chicks), <제6곡 사무엘 골든베르그와 쉬밀레>(Two Jews: Rich and Poor), <제7곡 리모쥐의 시장>(Limoge), <제8곡 카타콤 - 죽음의 말로 죽은 자들에게 하는 대화>(Catacombae - Con Mortius in lingua mortua), <제9곡 닭발 위의 오두막집: 바바야가>(The Hut on Hen’s legs: Baba-Yaga), <제10곡 키예프의 대문>(The Great Gate of Kiev)라는 열 개의 그림이 묘사됐다.

무소르그스키가 음악으로 재현한 것은 화폭에 묘사된 ‘이미지’와 화폭 속 상이 지칭하는 실제 대상 사이를 오간다. 이를테면 <제4곡 우마차>에 등장하는 저음의 음형은 친구 하르트만이 그렸던 ‘우마차 그림’의 묘사지만, 동시에 ‘우마차’가 내포하는 사회 · 문화적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이 작품 안에 폴란드 농민의 힘겨운 삶이 드러난다 해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무소르그스키가 우마차를 표현하기 위해 우마차를 상징하는 소리를 사용했는지, 우마차의 외형이나 그 소음을 그대로 흉내 냈는지, 아니면 시골 마을에 우마차가 등장할 법한 분위기나 전조(前兆)를 그려냄으로써 우마차라는 대상을 청자의 인식 안에 불러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다. 한발 더 나아가 화가 하르트만의 그림 그리기 작업까지 재현의 논의를 확장하면 보다 복잡한 체계가 펼쳐진다.

결국 유진선이 바라본 ‘전람회의 그림’ 안에는 무소르그스키의 피아노 원곡과 이를 둘러싼 다양한 편곡 작품들, 무소르그스키가 바라봤던 전람회의 실제 그림들과 그것으로부터 추출한 표제들, 그리고 화가 하르트만이 그림 안에 표현했던 이미지와 이미지의 토대가 됐던 현실의 상과 상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따라서 유진선이 작업한 5개의 전주곡과 10개의 곡은 무소르그스키와 동일한 ‘표제’를 다루지만 그 안에 등장하는 음향의 약호화(略號化) 방식과 음악의 진행방식, 그리고 뉘앙스는 새롭게 구성될 수밖에 없다. 유진선의 작업은 ‘이미 재현된’ 전람회의 그림을 ‘또 다시 재현’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층위의 ‘전람회의 그림’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만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유진선이 자신만의 ‘전람회의 그림’을 구성하는 작업은 동시대 청자가 ‘전람회의 그림’을 청취하고 사고하는 환경과 닮아 있다. 유진선과 청자 모두는 다양한 층위의 ‘전람회의 그림’에 대한 조망을 바탕으로 이 작품에 다가간다. 또한 두 주체 모두 19세기 러시아 작곡가 무소르그스키가 음악 안에 담아냈던 사회 · 문화적 상징을 직접적으로 해독하지 못하는 21세기 인()이라는 점 그리고 이로 인해 특정 음향 안에서 전혀 다른 상징이나 의미를 읽어낼 가능성이 역력하다는 점도 동일하다.

 

2. 유진선과 무소르그스키의 거리

무소르그스키는 하나의 선율이나 음형을 등장시킨 후 이것을 나열하고 반복한다. 이는 음악을 제일 처음 듣는 사람이 계속적인 반복을 통해 이 음악이 무엇을 묘사하는가를 쉽게 알아채도록 하려는 방법이다. 무소르그스키가 곡 안에서 ‘발전’이나 ‘변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악장은 <프롬나드>가 유일하다.

하지만 140년 후의 청자는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에 익숙하다. 오히려 무소르그스키 원곡의 과도한 반복과 나열이 청자의 집중력을 떨어뜨리게 할 여지가 있다. 또한 대부분의 청자는 짧은 청취만으로도 기억 안에 잠재해 있던 무소르그스키의 모티브를 끄집어 낼 수 있다. 따라서 유진선은 각 악장의 초반에 무소르그스키의 모티브를 배치해 청자의 기억 속 원곡을 소환하는 ‘트리거’(Trigger)로 이용한다. 그리고 소환된 기억 위에 고유의 변주와 발전을 펼쳐놓는다.

유진선의 <제5곡 껍질속의 병아리 춤>과 <제7곡 리모쥐의 시장> 그리고 <제9곡 닭발 위의 오두막집: 바바야가>는 무소르그스키의 모티브와 유사하지만 어딘가 부서져 있거나 불완전한 형태의 소리로 시작한다. 무소르그스키 음악과 비교해 보았을 때 음정이 달라져 있으며 리듬이 절뚝거리고 좀 다른 뉘앙스의 화음으로 변형돼 있다. 그리고 이 모티브들이 발전되고 확대되어 유진선 만의 음악으로 변모한다. 발전과정은 다채롭다. 무소그르스키의 음악을 대략의 얼개로만 남겨둔 채 완전히 다른 형태의 음향에 도달하는가 하면, 원곡 안에 내재된 음악적 성격을 강화하기도 한다. 때로는 무소르그스키의 음형을 과도하게 반복함으로써 본래의 맥락이나 상징을 지워버리고 유진선 특유의 짜임새로 흡수한다.

한편, 유진선과 무소르그스키의 작업 안에서 주목할 지점 중 하나는 ‘다양함’을 표출하는 방식이다. 무소르그스키의 곡 안에는 19세기 말 러시아인이 느꼈던 다양한 사회 · 문화적 환경이 응축되어 있다. 무소르그스키는 작품 안에 폴란드의 생활과 폴란드의 유태인을 묘사한 <제4곡 우마차>와 <제6곡 사무엘 골든베르그와 쉬밀레>, 프랑스의 생활을 묘사한 <제3곡 튀일리의 정원>과 <제7곡 리모쥐의 시장>, 러시아의 옛 설화를 바탕으로 하는 <제1곡 난쟁이>와 <제9곡 닭발 위의 오두막집: 바바야가> 그리고 러시아적인 정취를 풍기는 <프롬나드> 등을 등장시켰으며 제목을 표기하는 언어도 러시아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다채롭게 구성했다.

무소르그스키가 표현하는 다양함은 19세기 유럽인이었다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 ‘폴란드적인 리듬’이나 ‘프랑스적인 상징’ 등을 통해 작동한다. 하지만 21세기에는 무소르그스키가 만들었던 10개의 장면들이 그저 ‘러시아적 기법’으로 작곡된 것으로 인지된다. 무소르그스키가 약호화했던 다양함이 표제 안에 귀속되어 ‘비-서유럽적인’ 특질로만 형상화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유진선의 작업에서도 악장 간의 다채로움이 도드라진다. 유진선의 경우 이 다채로움은 현대음악에서 자주 발견되는 ‘양식적 다원주의’라는 키워드로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제2곡 옛 성>에서는 리듬과 음향이 마치 ‘하와이안 음악’을 표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악장은 본래 무소르그스키가 ‘중세-이탈리아-음유시인’이라는 키워드를 표현하기 위해 구상했던 것으로, 원곡과 동일한 모티브와 리듬을 사용한 음악은 이제 전혀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유진선이 사용한 악기의 음향이 동시대 청자에게 ‘하와이’를 연상시키는 도구로 작동했을 것이다. 유진선의 <네 번째 프롬나드>도 다른 악장에 비해 협화적 음향과 온음계적 음계 진행이 두드러진다. 이 악장은 미니멀리즘 음악이나 보다 조성적인 흐름을 지지하는 음악과 닮아 있다.

곡의 후반부에 이르면 종교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3개의 한글 부제를 발견할 수 있다. 유진선은 <제6곡 사무엘 골든베르그와 쉬밀레>에 “부자와 거지 나사로”라는 부제를, <제8곡 카타콤 - 죽음의 말로 죽은 자들에게 하는 대화>에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그리고 “지옥에서 고통 받는 혼들”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종교적인 소재는 이미 무소르그스키의 작업에서도 등장하지만, 유진선은 무소르그스키의 악보에 있던 단어들을 토대로 한글 표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특히 <제8곡 카타콤 - 죽음의 말로 죽은 자들에게 하는 대화, 부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 지옥에서 고통받는 혼들>은 유진선의 작업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 악장은 무소르그스키의 원곡에서 가장 괴리되어 있다.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부분에서 등장하는 느린 선율은 일종의 ‘목소리’처럼 들리며 이어지는 “지옥에서 고통 받는 혼들”에서는 선율이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고음부로 모든 악기가 수렴해 진동한다. 곧 이 소리들은 바람소리와 함께 사라지며, 다시 선율이 등장하고, 그리고 이내 모든 소리가 사그라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길지 않은 악장이지만 짜임새의 교체가 잦으며 이를 통해 무척 극적인(dramatic) 구도를 연출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종교적인 분위기를 강화시킴으로써 ‘과거의 마스터피스’에 자신 만의 감각을 덧씌우는 것. 이런 방식은 무소르그스키의 원곡과 유진선의 ‘차이’를 좀 다른 측면에서 고민하게 한다. 이 땅에서 ‘한국적인 것’이나 ‘음악적 모국어’와 같은 기치들은 이미 너무 낡은 것이 되었고, 많은 한국 태생 작곡가들이 국내 · 외에서 공부하며 전 세계 작곡가들과 동일한 음악 어법을 공유한다. 하지만 국내의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행하는 경계의 넘나듦이란 ‘우즈베키스타인이 러시아어로 글을 쓰거나 체코에 살고 있는 유대인이 독일어로 글을 쓰는’ 것처럼 온전히 내 것이 아닌 것을 전유하는 소수자적인 행위 같은 인상을 줄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작곡가의 개성이 가미된 ‘종교적 표현’은, 서구 음악 - 러시아적 소리 - 이방인의 언어라는 타자의 벽을 ‘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것을 당당히 조작하고 장악했다는 표식처럼 보인다. ‘국적’이나 ‘민족’에 관련된 진정성이 모호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너무도 진부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종교적 가치관’이라는 관점이 작곡가의 근원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통로로 사용된 느낌이다. 애초에 ‘패러디’나 ‘인용음악’이라는 장르에 내포하는 타자에 대한 전유가 일종의 ‘비틀기’ 같은 형태로 감지됐다면, 작품의 중후반을 지배하는 종교적 감정은 단순한 비틀기 그 이상으로 느껴진다. 유진선 작품 속 종교적인 것들은 무소르그스키에서 떨어져 나온 ‘이방인의 것’과 양 극단에 배치됨으로써, 상대적으로 근원과 닿아 있는 유진선이라는 개성적인 ‘주체’를 소환한다.

 

3. 다양한 변색(變色) 읽어내기

유진선과 청자는 다양한 재현의 층과 지시(指示)의 혼재 안에서 ‘전람회의 그림’을 이해한다. 그러나 청자와 유진선 사이에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유진선은 자신의 경험을 <변색>이라는 새로운 악보로 ‘고정’시켰다는 점이다. 동시에 청자는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기억 속 풀(Pool) 안에 유진선의 음악을 또 다시 추가한다.

유진선은 자신의 작업을 두고 ‘변색’이라는 말로 지칭했다. 적절한 변색이란 있을 수 없고, 완료된 변색이라는 개념도 모호하다. 변색은 처음의 것에서 뭔가 변화한 상태를 지칭하지만, 그 상태가 정확히 어느 지점에 이르러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따라서 청자는 유진선의 작업을 들으며 자신이 마음속으로 상상한 다양한 ‘전람회의 그림’과의 거리를 가늠한다. 이때 청자들이 듣는 것은 무수한 ‘차이들’이다.

청자의 기억 속 원작은 화가의 상상 · 화폭 위 이미지 · 무소르그스키의 음표 · 라벨의 오케스트레이션 사이를 떠돈다. 자연히 청자가 감지하는 변색의 정도와 방식, 변색이 이끌어내고자 하는 의미는 시시각각 변한다. 청자는 이 새로운 텍스트를 앞에 두고 이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체하고 기억 안에서 또 다시 재조합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청자는 자신이 평소 즐겨 읽던 다양한 문학 작품의 몇몇 구절을 떠올리며 유진선의 작업을 탐독한다. 청자는 유진선 작업의 첫 부분을 들으며 최인호 작가의 『지구인』에 나오는 수은(水銀)의 변색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가 씹는 음식물을 침으로 녹이듯 수은은 금을 녹이는 유일한 타액이었다. 수은의 독은 전갈의 독보다 무서워 잘못 다루다가는 손톱을 까맣게 변색시키게 하고 마침내는 사람의 머리털을 갉아 내리는 마법의 물이었다...” (최인호, 『지구인』, 1980)

잠시 닿기만 해도 치명적으로 뚫고 들어가는 독소의 변색. 유진선의 <첫 번째 프롬나드>는 단선율에서 시작된 변색이 전체 음악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그 음향의 내면으로 파고들어간다. 이 순간은 ‘패러디’라 불릴 수 있는 원곡에 대한 비틀기 행위가 최초로 자행되는 곳으로, 마치 손톱에 묻은 수은이 그 내부로 파고들어가는 끔찍한 장면과 유사하다. 그리고 청자는 변색이 일어난 이후에야 이 음악에 등장하는 음표 하나하나를 민감하게 청취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주제가 이내 중단되고 한 음정에서 시작된 어두운 음향이 관악기에 의해 계속 침잠하고, 동시에 다른 악기들이 합세해 ‘구멍’이 계속 확장되는 모습이 목격된다.

“...하루의 일이 끝나자 웅보는 잠시 허리를 펴고 서서 노을로 물든 서편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은 해가 떨어진 후에도 얼마큼 사라지지 않고 있다가 차차 보랏빛으로 변색해 갔다...” (한무숙, 『만남』, 1992)

한무숙의 글에서처럼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낯선 음향으로 이행하는 변색도 발견된다. 이때의 변색이란 ‘어느새’ 곁에 와 있는 것이다. <제4곡 우마차>에서 무소르그스키는 고된 노동을 하는 폴란드 농민의 모습을 시골 수레에 대한 묘사로 나타냈다. 유진선의 우마차도 처음에는 두 발로 걷는다. 그러나 이 짐승은 어느새 세 발로, 네 발로, 다섯 발로, 여섯 발로, 일곱, 여덞, 아홉, 열 발로 걷고 있으며 이 발걸음들은 한데 겹쳐져 특정한 방향으로 몰려 올라간다. 처음 대면한 짐승은 익숙한 형상이었지만 소리에 이끌려 가다보면 어느 순간 현실에서 괴리된 언캐니(uncanny)한 풍경이 펼쳐진다. 기억 속 어딘가에 저장된 라벨 편곡의 타악기 트레몰로 효과가 이 낯선 음향 안에서 떠오른다. 유진선의 음악은 라벨 오케스트레이션의 일부를 꿈속에서 재생하거나 혹은 다른 생명체의 시점에서 극도로 느리게 재현하는 것 같다. 모든 악기가 진동하는 가운데 청자는 이 음향을 들으며 아주 먼 과거에 들었던 강렬한 클라이맥스와 아주 잠시 조우한다.

“...여름햇살의 열기가 다 바랜 가을햇살은 미지근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여름햇살이 화살처럼 내리꽂힌다면 가을햇살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내려앉는다. 노릇노릇 변색한 잔디 위에 가을햇살은 골고루 내려앉는다...” (조정래, 『태백산맥』 제1부 신의 모닥불, 1986)

조정래는 단어 ‘변색’을 색상의 그릇된 변형을 지칭하는데 사용하지 않았다. 이때의 변색은 긍정적이고 포근한 느낌이다. 유진선의 <다섯 번째 프롬나드>도 마찬가지다. 이 곡은 작품 안에 등장하는 모든 프롬나드 중 가장 ‘빛나는 형태’로 표상됐다. 프롬나드의 선율은 아주 대략적인 음의 윤곽만 남겨 놓은 채 모두 다 산화된 상태다. 음은 하나하나 울리며, 바람과 타악기 소리가 눈부신 광택을 가진 울림과 잔향을 만든다.

“...일어서면 머리를 숙여야 할 정도로 천장이 낮고 거기엔 육각형의 무늬 있는 도배지가 발라져 있는데 그것은 처음엔 푸른색이었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빗물이 새어서 만들어진 얼룩 등으로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김승욱, 『역사』, 1964)

<제6곡 사무엘 골든베르그와 쉬밀레, 부제: 부자와 거지 나사로> 악장에서는 셋잇단음표 덩어리가 곡을 덮는다. 지속적인 빗방울이 뭔가를 변색시키듯, 유진선의 곡에서는 원곡의 트럼펫 장식음이 소환되어 곡을 변형시키는 얼룩이 된다. 무소르그스키 원곡에서 뮤트 트럼펫이 덜덜 떨며 이 기이한 선율을 연주했다면, 유진선의 곡에서는 이 ‘떨림의 제스처’에 해당하는 셋잇단음표만이 증식된다. 아마도 이 음향은 유진선이 무소르그스키의 트럼펫 소리를 들으며 경험했던 것을 음악적으로 형상화시킨 것일 터다. 작곡가가 느꼈던 찰나의 인상이 섬세한 조작을 통해 새로운 음향으로 직조된다.

작품이 후반부에 이르면 유진석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혼들”이라는 표제로 강조했던 종교적인 느낌이 청자를 감싼다. 종교학자 엘리아데(Mircea Eliade)의 말처럼 현대의 모든 청자는 망각된 종교를 가지고 있다. 청자의 자의식 안에는 신의 흔적을 재발견할 수 있을 만큼의 지성이 있고, 유진선은 그의 곡 후반부에 이르러 종교적 ‘의식’을 집도하는 성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청자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혼들”의 클라이맥스를 들으며 세속적인 공간에서 일시적으로 초월적인 것으로 넘어가는 체험, 즉 엘리아데가 ‘입문식’이라 행한 것을 경험한다.

많은 소리들이 기억들 그리고 문장과 함께 조합된다. 청자는 기억에 떠돌던 ‘전람회의 그림’과 유진선이 작업한 다양한 음향의 호소에 이끌려 나온다. 그렇게 객체로 불려온 청자는, 곧 주체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하고 스스로를 주체로 재정립한다. 동시대 음악을 듣는 것은 한 명의 온전한 ‘주체적인 청자’를 만드는 행위다.

 

차이 음미하기 : 다원주의적 음악 청취

차이를 음미하는 것은 즐겁다. 유진선과 무소르그스키의 마주보기는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동일한 표지를 중심으로 이 둘의 ‘차이’를 드러낸다. 차이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이들의 음악을 듣는 청자의 감식력에서부터 이들이 음악을 기호화 하는 방식과 표현 대상에까지 퍼져있다. 유진선의 작업을 듣는 청자의 반응도 단일한 논조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양상을 띈다. 그들은 자신만의 음악을 구성하고 음향의 구석구석을 음미한다. 결국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작은 점’을 중심으로 다양한 관점이 경합한다. 모두를 한데 묶는 ‘전람회의 그림’이라는 표지는 이들을 구속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토록 다양한 시공간 그리고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예술에서의 ‘차이’는 더 많은 창작 방식과 더 많은 감상 방식을 제안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예술은 ‘차이’를 통해 좀 더 풍요로워 진다. 그리고 ‘차이’를 인정하는 예술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다원주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된다.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고 청자의 주체성이 강조되며 한 명의 작곡가가 시공간을 넘나들어 다양한 관점을 담아내는 음악. 이런 음악하기, 이런 음악 청취는 실로 다양한 사람 · 다양한 요소가 공존하는 다원론적 사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린다. 차이를 통한 음악 읽기는 동시대의 반영이면서, 다양함이 공존하는 동시대를 긍정하는 방법이다. 2015년 겨울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렸던 유진선 작곡가의 현대음악 <화음 프로젝트 Op.158 ‘전람회의 그림’ 주제에 의한 변색>이 청자에게 즐거움을 줬던 이유, 그리고 이 음악이 동시대를 반영한다고 느꼈던 이유다.

 

(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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