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대한민국 실내악 작곡제전 III 리뷰

2021. 9. 22. 01:41

최근 현대음악에서 발견되는 재현의 몇몇 양상들

 

최근 작곡되는 한국 현대음악의 특징 중 하나는 상당수의 곡이 재현적인 양상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작곡가의 연령이나 작곡가의 평소 작곡어법과 상관없이 실내악 분야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현상으로서, 2021년 9월 7일 대한민국 실내악 작곡제전의 일신홀 무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창회, 창연악회, 뮤지콘, 소리목, 창악회에서 각기 추천된 다섯 곡과 2020년 파안생명나무작곡가로 선정되어 작품발표의 기회를 얻은 박정은의 작품이 모두 표제를 갖는 재현적인 성격으로 관객을 만났다.

재현적인 현대음악이란, 기본적으로는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작곡가의 의지로 볼 수 있다. 20세기 후반 이후 작곡가의 음악어법은 각기 천차만별이기에, 청중의 입장에서 현대음악을 이해하려면 ‘제목이라도’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현대음악의 이러한 경향을 그저 대중을 위한 ‘표제적 가이드’로만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음악에 대한 접근 방식이 일견 비슷해 보이는 이런 곡들이 실제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재현이라는 개념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날 음악회에서도 시각적 도상과 음 공간 속 음형의 닮음을 병치시켜 재현하는 것에서부터(백자영), 자유로운 감정의 섬세한 표출을 행하는 것(이은재), 재현을 통해 오히려 그 원본을 소환하고(오이돈) 또 상상하게 하며(배진의), 재현으로만 구성된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임재경), 그리고 ‘녹음된 소리’를 통해 물리적인 층위의 재현을 노골적으로 제시하는 것(박정은)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채로운 재현의 양상이 발견됐다.

백자영의 플루트, 클라리넷, 피아노를 위한 <떨어지는 꽃잎>(2020)은 음악적 재현이라는 주제를 마주했을 때 가장 직관적으로 떠올릴법한 방식으로 ‘이미지’의 ‘음악화’를 이뤄낸다. 즉 이 작품은 이중섭의 <벚꽃 위의 새>라는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됐는데, 그림 속 떨어지는 꽃잎의 형상이 음 공간 속 음표의 하강 움직임으로, 쌓여 있는 꽃잎은 작품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클러스터로 표현됐다. 이렇게 시각적 형상에서 영감을 받은 몇몇 특징적인 움직임이 모티브로 등장해 작품 전체에 걸쳐 전개되며, 이것들이 A~E 섹션을 거치며 패턴과 흐름을 가진 논리적인 음의 조합으로 거듭난다.

이은재의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로스코 채플>(2020)은 미술가 로스코(M. Rothko)가 만든 “로스코 채플”에 대면한 작곡가의 인상을 표현한다. 흥미롭게도 이은재가 그려낸 것은 로스코의 단색 추상회화를 연상시키는 미니멀한 음악이 아니다. <로스코 채플>은 “로스코 채플” 앞에 선 작곡가의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며, 하나에서 시작해 그 다음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때로는 메아리처럼 서로 공명하는, 끝없이 가지치기해 나가는 복합적인 감정을 다루고 있다. 슬프다, 기쁘다 혹은 좋다, 나쁘다와 같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말로 형언하기에 불가능한 독특한 형태의 감정이 화려하고 다채로운 음의 조합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오이돈의 첼로 독주를 위한 <장씨 부인의 경우>(2020)는 이문열의 소설 <선택>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장씨 부인’을 소재로 한다. 이 경우 ‘가부장제’의 화신으로 언급되곤 하는 장씨 부인은, 오이돈의 음악 안에서 본인의 이야기를 스스로 털어놓는 새로운 포지션에 놓인다. 특히 첼로 독주가 행하는 다양한 테크닉들과 퍼포먼스 그 자체는 장씨 부인이 힘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 혹은 그녀가 겪는 고난으로 인식되며, 이를 통해 작품 전체는 장씨 부인이 행하는 삶에 대한 진실한 재현이되, 자기표현의 한 형태로 다가온다.

배진의의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성과 심의 관계>(2020)는 관념의 음악적 재현이 배태할 수 있는 표현 및 해석의 다양성을 보여준다. 청자는 작품 안에서 작곡가가 소재로 삼은 성리학의 성()과 심() 그리고 이()의 관계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계속해서 탐색하는데, 이 과정에서 바이올린과 첼로, 피아노의 흐름과 모티브를 개별 요소로 인식하고 그들 사이의 관계를 끊임없이 설정해나간다. 이 안에서 ‘유사한 것’과 ‘사실상 같은 것’ 등을 인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성리학의 아리송한 논리이기도 하겠지만, 음악적인 전개와 반복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음악적 귀’를 통해 성리학의 이론을 새로운 방식으로 탐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임재경의 현악 4중주를 위한 <도형놀이 I>(2019)는 음정의 반복과 성부의 대칭, 패턴의 반복 등을 통해 구상적인 형태로 ‘자연’이나 ‘사회’를 재현한다. 작품 속 반복과 조화, 음정의 도입과 변형 등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그 형태가 다르지만 나름의 규칙이 존재하는 일종의 ‘시스템’처럼 인식되며, 이 안에 등장하는 ‘음정’은 개성을 갖고 움직이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청취된다. 음의 조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추상적 체계와 그 안에 존재하는 개별 인자를 마치 시뮬라시옹처럼 재현해내는 것이다.

박정은의 플루트,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얼룩진 잔향들>(2019)은 작곡가가 유학시절 마주했던 쾰른의 대성당에 대한 기억을 표현한다. 이 경우 작품 안에서 재현되는 것은 작곡가 자신이 성당을 마주하고 느꼈던 기억들이다. 다양한 악기의 특수주법과 앙상블로 두려움이나 장엄함, 강렬함 등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물론, ‘녹음된 소리’를 등장시킴으로써 기억에 대한 물리적 재현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지지직거리며 등장하는 소리 오브제는 그 자체로 ‘낡은 테크놀로지’를 상징하게 되는데, 이는 잊힌 먼 과거의 성당을 감각적으로 소환하는 동시에 성당이 상징하는 ‘시간성’을 생경한 방식으로 무대 위에 펼쳐낸다. 무엇보다도 이런 일렉트로-어쿠스틱한 소리의 조합이 최근 각광받고 있는 21세기적 음향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글 이민희/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