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서울 국제 컴퓨터 음악제 리뷰

2015. 11. 2. 09:46

공간, 오브제, 이미지, 상호작용으로 체험하는 소리

 

이제 소리들은 발광하는 오디오비주얼의 형태나 일종의 소리 오브제가 되어 공연장에 놓인다. 청자도 관습적인 청취 방식을 버리고 ‘공간’이나 ‘신체’ 혹은 ‘자극’과 ‘반응’이라는 새로운 은유로 음악에 접근한다. 전통적인 음악회가 음악의 제의성과 커뮤티타스를 전달해왔고 그것이 태고부터 이어져 온 방식이었다면, 동시대 컴퓨터 음악제에서는 공간화, 대상화, 시청각화, 상호작용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음악이 무엇인지 다시 질문한다. 음악을 만드는데 극히 진보적인 테크놀로지가 사용되지만 그 결과물이 체험가능하며 무척 매혹적이라는 점도 인상적이다. 컴퓨터 음악제는 현대음악의 난해함이 그 막다른 골목에서 청중과 화해하는 기묘한 현장이다.

 

공간

예술의 전당 자유 소극장은 300명 정도의 청중을 수용할 수 있는 3층 높이의 공간이다. 이 공간에 1층 객석을 둘러싸고 전면, 좌우, 후면에 8채널 스피커가 설치됐다. 완벽한 음향 설비는 길쭉하고 깊숙한 직육면체 공간을 그 부피 그대로 소리 덩어리로 만든다. 특히 무대의 조명이 모두 꺼진 채 스피커에서만 재생되는 ‘테이프 음악’(tape music)은 소리의 공간적 체험을 극대화한다. 청중은 암흑 속에 앉아 자신의 신체를 감싸는 소리의 거리와 질감에 집중한다.

 

그림 자유 소극장 구조 (사진 출처: 예술의 전당 홈페이지)

 

작곡가 베르거(Ludwig Berger)의 테이프음악 <1대 1 비율로 가상의 섬 지도를 그리다>(“Mapping of hypothetical islands on the scale of 1:1” for tape)는 소리 체험을 ‘공간’이라는 키워드로 은유할 수 있는 좋은 예다. 이 곡은 공연장의 여러 지점에서 각기 다른 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소리들은 비교적 단일한 질감으로 이뤄져 있으며 멈추었다 다시 다른 지점에서 불현듯 시작하길 반복한다. 특히 각각의 소리는 ‘이동’하거나 형태를 변형하기 보다는 ‘지속’되는데, 이런 과정은 암흑으로 가득 찬 3차원 공간에 소리 ‘좌표’를 찍는 행위와 유사하게 느껴진다. 간혹 이 소리들이 한꺼번에 울려 통합적인 음향을 형성할 때에는 점으로 들리던 소리 좌표들이 일제히 선으로 확장되며 그 형체를 드러낸다. 그 순간 청자는 자신이 담겨 있던 소리의 깊이와 넓이에 대해 새롭게 고찰하게 된다.

베르거의 작품이 청자의 신체와 그 신체를 둘러싼 외부 공간과의 거리를 가늠하게 한다면, 작곡가 이병무의 테이프 작품 <작은 창들>(“tiny windows” for 4ch. tape)은 한 유기체의 내부로 파고드는 느낌이다. 이 작품에서는 서로 다른 여러 음소재가 얽혀 하나의 견고한 세계를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소리 세계는 완전히 닫힌 새로운 공간으로, 특별한 소리 파편들로만 구성된 비가시적 장소다. 청자의 지각이 거하는 곳도 완전히 닫힌 이 세계의 내부다. 마치 유기체의 뱃속 같은 이곳에서, 청자는 각각의 파편이 연결되고 작동하는 방식을 근거리에서 관찰한다. 음악은 외부로 확장되기보다는 청자의 내면 혹은 무의식으로 침잠한다.

 

소리 오브제

공간과 결합함으로써 깊이와 넓이를 갖추게 된 소리는 이제 이 공간 안에 구체적인 ‘대상’을 빚어낸다. 이 대상은 암흑 속에서 시각의 도움 없이 귀로만 감지되는 ‘소리 오브제’다. 소리 오브제는 섬세한 음향으로 정밀한 형체를 암시하기도, 때로는 흐릿한 형체를 한 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작곡가 제임스(James O’Callaghan)의 테이프 음악 <몸 울림>(“Bodies-Soundings” for tape)은 생동감 있는 섬세한 소리 오브제를 소환한다. 작곡가는 몇몇 어쿠스틱 악기 소리를 채집해 작품의 기본 재료로 삼았다. 현의 압력이 증가되는 찰나 그리고 이 현이 튕겨져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순간 등이 녹음됐다. 이런 재료 안에는 육상선수가 스프린터를 밟고 튀어나가는 동작처럼 강렬한 진행감이 녹아있다. 재료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되어 전체 음악을 이끌어나간다.

제임스의 음악이 극사실주의 회화처럼 무척 정교하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의 음악은 수십 배로 확대된 파리나 나방의 더듬이, 돌기들, 점액, 그리고 징그러운 눈알의 격자무늬처럼 세밀하고 복합적인 질감으로 청자를 자극한다. 제임스의 음악은 마치 어둠 속에서 마주하는 거대한 곤충들 같다. 그들은 기거나, 날거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급속히 튕겨 오르며 청자를 위협한다. 오브제들은 청중을 둘러싼 공기 안에서 돋아나 그들의 몸을 관통하며 생생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림 피아노 내부 (사진 출처: 제임스 홈페이지)

 

제임스의 음악이 현실 속 어딘가에 존재할 법한 생명체를 닮았다면, 작곡가 브로(Marie-Hélène Breault)와 베다르(Martin Bédard)의 음악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공물을 연상시킨다. 이들의 공동작업인 <복제품>(“Replica” for tape)은 조작된 소리로 이뤄져 있으며 이 소리들은 기계의 부속이나 모듈 같은 느낌을 준다. 작곡가들은 이 작품의 소리 재료가 어쿠스틱 악기 ‘플루트’ 녹음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이 음악을 듣고 그 근원을 떠올리기는 어렵다. 플루트 소리는 과도하게 변형되어 있으며, 음악은 쉴 새 없이 흘러 할리우드 3D 영화 액션신의 사운드디자인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자연에서 들어 본 적 없는 합성물이 모여 출처가 모호한 거대 소리덩어리를 만든다. 이 또한 공연장의 어둠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인공의 소리 오브제다.

 

이미지 

음악과 이미지의 결합은 청취 경험을 확장시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래서인지 오디오비주얼(audiovisual) 매체들은 우리의 일상에 산재해 있다. 하지만 평소에 자주 접할 수 있는 오디오비주얼 매체들은 그것을 구성하는 음악과 이미지로 손쉽게 분리되며, 그 두 재료의 독립성이 두드러진다.

음악학자 미셸 시옹(Michael Chion)은 오디오비주얼 매체의 효과나 의미는 시청각이라는 혼합 상태 그 자체로 분석할 때에만 유효하다고 이야기한다. 음악이나 이미지가 개별적으로 가졌던 효과는 그것들이 결합해 시청각 형태를 이뤘을 때는 전혀 다른 종류가 되며, 부분의 합은 전체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시옹의 주장은 일상에서의 오디오비주얼 경험과 컴퓨터 음악제에서의 오디오비주얼 경험을 구분해준다. 컴퓨터 음악제에서 선보인 오디오비주얼 작품들은 집중된 청취와 완벽한 음향 설비, 압도적인 대형 스크린으로 인해 음악과 이미지의 완전한 시청각적 혼합을 이끌어낸다. 청중은 오디오비주얼 작품을 감상하며 음악이나 이미지라는 요소를 분리해서 인지할 수 없으며, 시청각의 중개를 통해 완전히 새로운 감각으로 이행한다. 청중이 느낀 감각은 일종의 무아지경이나 종교적 황홀경으로, 이는 흔히 최면에 걸리거나 약에 취한 상태에 비교되는 것들이다.

작곡가 밀로세비치(Bojan Milosevic)의 오디오비주얼 작품 <에타르>(“Etar” for audio visual performance)에서는 시청각 체험의 순간이 철학적 성찰로 전이된다. 영상은 흑백의 점으로 시작해 점진적인 변화를 거쳐 우주의 형상을 한 이미지로 확장되고 이어 추상적인 도형의 나열로 변모한다. 이미지와 소리는 분명히 흐르고 있지만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새로운 소리나 이미지가 시작되는지는 알 수 없다. 음악은 정확한 음고나 음색으로 인지되기보다는 이미지와의 연계를 통해 일종의 ‘질감’으로만 느껴진다. 특히 어둠 속에서 도드라지는 스크린의 ‘발광’(發光)은 이 시청각 작품을 이해하기 보다는 ‘체험’하고, 숨죽여 ‘기립’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청중은 이 음악이 갖는 내러티브를 쫒거나 결과를 예측하지 않으며, 모두 멍하니 앉아 빛을 뿜는 스크린을 응시할 뿐이다.

작곡가 야기사와(Keisuke Yagisawa)의 오디오비주얼 작품 <엑스티엑스 투>(“xtx to” for audio visual media)는 프랑스 소설가 레몽 크노(Raymond Queneau)의 『문체 연습』(1947)을 음악화 했다. 이 소설은 짧고 무미건조한 이야기를 무려 아흔 아홉 가지 형식으로 변주해 반복한다. 작곡가는 이 작품의 일본어 번역본 이미지와 그것을 ‘낭독하는 목소리’를 작품의 주요 모티브로 사용했다. 작품의 아이디어도 레몽 크노와 유사하다. 작곡가는 동일한 이미지와 목소리를 수십 가지로 변형시킨다. 화면 속 글자들은 열을 지어 흘러가며 서로 겹쳐지고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한다. 잉크에서 색이 분리되듯 글자가 무지개 색으로 변하거나 이것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효과, 그리고 수면 밑에 가라앉은 듯 흐리게 보이는 효과도 등장한다.

 

그림 야기사와 작품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인터넷의 야기사와 홈페이지)

 

화면 속 이미지의 다양한 변형은 그것에 동반된 ‘낭독하는 목소리’의 변형까지 짐작케 한다. 과연 우리가 동일한 목소리의 아흔 아홉 가지 버전을 귀로만 구분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대신 목소리는 이미지와의 결합을 통해 ‘다른 매체’가 됨으로써 그 섬세한 변화를 청중에게 드러낸다. 작은 소곤거림이었다가 수십 번 복제되고 서로 겹쳐져 환청같이 들리기도 하며 때로는 그 의미가 제거된 채 노이즈처럼 변모하는 목소리들. 이들은 이미지와의 결합을 통해 ‘서로 다른 얼굴’이 되어 다가온다.

 

상호작용

테이프 음악이나 오디오비주얼 작품들은 작곡가가 계획한 결과물을 완제품 형태로 청중에게 제공한다. 하지만 라이브 일렉트로닉 음악(live electronic music)은 다르다. 이 종류의 작업들은 전자음향, 어쿠스틱 악기 그리고 컴퓨터가 상호작용을 하며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구현된다. 전체 소리를 조작하고 관장하는 ‘테크놀로지’가 비교적 전면에 노출된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특히 이번 음악제의 몇몇 라이브 일렉트로닉 작품들은 서로 다른 매체 사이의 ‘자극’이나 ‘반응’ 과정을 직접 관찰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이것은 청중이 소리의 변형이나 기계적 조작을 짐작하고 그 상호작용을 추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 오예민 작품 연주 모습 © 오예민 

  

오예민의 <공감각적 순간>(“Synesthetic Moment” for piano, live video and electronics)은 꽤 긴 준비 끝에 시작되었고 그렇게 울린 최초의 소리가 무척 인상 깊었던 작품이다. 피아노를 치는 연주자의 얼굴은 카메라에 의해 무대 앞 스크린에 투영됐고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잔향은 스크린 속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괴이한 이미지를 구현했다. 연주자의 소리신호가 미리 프로그래밍 해 놓은 방식으로 변형되며 실시간으로 이미지 위에 투사된 것이다. 작곡가는 시각과 청각 요소를 동시에 제어해 청중들이 ‘공감각적’ 심상을 느끼길 원했다. 연주자가 피아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현을 긁을 때에는 수십 개의 현에서 만들어진 소리가 컴퓨터를 거쳐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단출한 음들은 거대하게 증폭되어 공연장 전체를 메웠다.

청중은 연주자의 ‘행동’과 그에 따르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의 ‘변형’을 스크린 속 이미지 와 복합적으로 증폭된 음향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라이브 일렉트로닉이라는 구현 방식에 내재하는 ‘상호성’이 청중과의 소통이라는 화두를 껴안은 느낌이었다. 작곡가가 의도했던 ‘공감각’은 다양한 요소의 작용과 반작용을 한꺼번에 조망하는 행위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였다.

작곡가 부진스카(Nikolet Burzyńska)의 <플렉트로>(“Flectro” for flute and 4ch. live electronics)는 플루트과 테크놀로지 사이의 매력적인 상호작용을 보여준 곡이다. 이 작품은 플루트 소리를 실시간으로 조작함으로써 플루트의 소리내기 방식이나 음색, 질감 그리고 이 악기의 대표적 이미지와 신화적 기원까지 표현해낸다. 곡 초반에는 플루트 특유의 부드러운 음향이 편안한 협화 음향을 만들어냈고 이후에는 이 악기가 가진 다양한 소리들이 차례로 제시됐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이 연주하는 플루트 소리와 여기에서 기인한 전자 음향이 서로 소리를 주고받고, 한 소리가 다른 소리에 포섭되거나 때로는 통합되며 음악이 진행됐다.

문득 무대에 선 연주자가 플루트 불기를 멈추고 잠시 정지한 순간이 있었다. 연주자는 가만히 서서 소리로 가득 찬 객석을 바라보았다. 연주하지 않는 연주자, 그리고 그 연주자가 과거에 만든 소리로 가득 찬 공간. 소리에 포섭된 청자와 그것을 응시하는 연주자의 시선은 기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미 컴퓨터는 연주자 없이도 아름다운 음악을 손쉽게 만들어낸다. 이 광경은 기계에 의존하는 그리고 결국은 기계로만 작동하는 동시대 인간의 삶을 은유하는 것 같았다. 기민한 작곡가들은 자신의 음악에 당대의 기술과 환경을 투영한다. 18-19세기 음악과 현대음악이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컴퓨터 음악제의 젊은 작곡가들이 청중에게 선사하는 동시대 음악에 대한 통찰이다.

 

「플랫폼」, 2015년 11월, (2015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