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교향악단 “아르스 노바 II - 관현악 콘서트: 현기증” 리뷰

2017. 4. 21. 16:25

음악에 서서히 밀착되었다가 멀어지는 경험

 

관객은 2017년 4월 1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아르스노바 II - 관현악 콘서트: 현기증”에서 자신의 감각이 음악에 서서히 밀착되었다가 다시 멀어지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음악회는 뒤카(Dukas)의 <팡파르>(‘Fanfare’ pour Preceder La Péri)로 시작했다. 이 작품은 금관 앙상블로 구성된 짧은 악곡으로 음악회 전체의 시작을 알리는 지극히 기능적인 전주곡으로 청취되었다.

이어진 라헨만(Lachenmann)과 백병동의 오케스트라 작품에서 관객은 조금 더 음악에 다가갔다. 특히 관객은 라헨만의 <회화>(Tableau for Orchestra)를 감상하며 지휘자로 표상된 작곡가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불쑥 튀어나오는 음향 조각을 친히 음악으로 호명해주는 존재, 제 멋에 날뛰는 소리를 내가 원하는 위치에 배치하는 ‘절대자’가 공연 내내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따라서 관객은 낯선 음향 재료가 새로운 음악 규칙에 종속되는 매 순간마다 그 강렬한 통제력을 자신의 힘으로 느끼며 이 음악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백병동의 <해조음>(Hae-Jo-Eum for Orchestra)에서는 악기 혹은 진동체가 갖는 자연스러운 울림과 리듬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작품 초입에 등장했던 ‘뱃고동’을 묘사하는 낮은 음은 베르트랑이나 라헨만의 작품에는 존재할 수 없는 종류의 소리였다. 이는 아마도 프로그램 노트에서 ‘한국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던 것들 중 하나였을 터다. 그리고 ‘한국인’ 관객은 이런 음향 안에서 그들만이 공유하는 풍경을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베르트랑(Bertrand)의 <현기증>(Vertigo for Two Pianos and Orchestra)은 증식하고 이합집산하는 모티브들, 서로 다른 위상으로 맹렬하게 질주하는 성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또 다시 밀려들어오는 곡이었다. 빠른 음형이 만들어내는 리듬적 격자무늬가 여러 개 겹쳐져 옵아트(Optical art)와 같은 음층을 만들어냈고, 이따금씩 도달하는 섹션 전환부에서는 이 흐름이 한 번씩 고꾸라지거나 형태를 바꾸어 새로운 질주를 시작했다.

특히 음악 안에서는 다양한 청각적 움직임이 꽤 선명하게 인지되었기에, 관객은 이런 소리 제스쳐를 쫒으며 자기 자신을 음향 안에 대입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관객은 첫 번째 피아노 독주를 자신의 페르소나로 설정할 수 있었는데, 일단 이 피아노 음향이 페르소나로 들리자 이를 반복하며 뒤따르는 두 번째 피아노가 페르소나의 복제로, 수많은 악기와 홀의 잔향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페르소나의 유령으로 청취되었다.

음악회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매혹적이었던 순간은 <현기증>이 정점에 다다라 고음의 화음을 연타할 때였다. 순간, 음악은 공포와 두려움 혹은 자기혐오와 같은 감정을 만들어냈다. 빠르게 질주하며 음향의 격자 사이를 떠돌던 수많은 페르소나들이, 돌연 단일한 형상으로 통합되었다. 이는 마치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 페르소나가 스스로에게 칼을 낭자하는 장면으로 상상되었다.

마지막 곡 버르토크(Bartók)의 <협주곡>(Concerto for 2 Pianos, Percussion and Orchestra)은 고도의 음악 구조를 드러내며 관객의 감각에서 멀리 떨어진 관조의 대상으로 존재했다. 따라서 이날 음악회는 관객과 음악이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던 뒤카의 곡으로 시작해 라헨만과 백병동의 곡에서 그 거리를 좁혀나가 베르트랑의 곡에 이르러 그 경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었고, 그리고 다시 버르토크의 곡을 통해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음악회란 것이 규범화된 절차를 통해 비일상적인 의식(儀式)으로 흘러들어갔다가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이라면, 이날 지휘자 로페(Pascal Rophé)는 다섯 곡의 감각적 층위를 표현하며 관객이 비일상적인 ‘현기증’을 체험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경험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셈이다.

「객석」, 2017년 5월 (2017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