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악작곡제전 II 리뷰

2018. 9. 9. 22:49

현대음악의 재연에 관한 몇몇 기록들

 

‘실내악 작곡제전’은 작곡가협회의 산하단체에서 한번씩 연주되었던 작품들을 모아 연주곡목을 꾸린다. 따라서 실내악 작곡제전의 리뷰는 특정 작품의 재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공간이기도 하다. 이에 본 글에서는 2018년 5월 9일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에서 열렸던 ‘2018 실내악 작곡제전 II’의 리뷰를 진행하되 이 음악들의 ‘재연’(再演)이라는 측면에 집중하고자 한다. 다만 이날 음악회에서 발표된 공모작(임주광) 및 ‘재연’이라는 카테고리로 묶기 어려운 몇몇 작품들에 대해서는 인상 깊었던 순간을 꼽아 기록해 보고자 한다. 

박지수의 <번짐>은 필자가 ‘순간의 시간성’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던 작품이다. 필자는 이 작품이 “수평적이기보다는 수직적인 타격에 기반”하며, 수직의 타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이 부차적으로 수평의 흐름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음악이 “타격과 잔향의 구조 위에 특유의 화성적 색채, 화성의 변화 정도, 지속음이 만들어내는 무드와 결합해 일순간 정지된 시간을 만들어낸다”고 해석했다.

이번 음악회에서 다소 놀라웠던 지점은 이 작품이 필자가 청취했던 이전의 연주에 비해 연주속도가 빨라져, 연주시간이 1분가량 단축된 채로 청중을 만났다는 점이다. 이런 다소 과격한 재해석은 필자가 이 작품에 대해 고민했던 ‘순간의 시간성’이 빠르기의 변화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영향을 받았다면 어떤 방식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하게 했다.

순간의 시간성 혹은 작곡가가 디자인했던 음악적 아이디어는 비교적 빠른 연주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다만 필자가 ‘쏟아지는 소리’라 묘사했던 음의 흐름들 그리고 선적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긴 지속음의 풍미를 충분히 느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연주시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기존에 청취했던 음원에서는 긴 시간이 불과 몇 초의 시간으로 체감되었다면. 이날 연주에서는 실제 흐르는 시간 자체가 짧았기에, ‘순간’이라는 키워드가 미학적으로 뿐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강조되어 느껴졌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김수혜의 <레크레카>는 공연 전 반복청취 했던 음원과 현장에서 들었던 연주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작품 중 하나였다. 이 작품은 필자가 프리뷰에서 언급했듯 “음악 전체를 통해 삶을 관조하는 한 명의 ‘인간’”을 떠올리게 했던 곡이다. 무엇보다도 필자는 음원을 반복 청취하며 작품 속 클라리넷 선율이 다소 진중하고 차분한 이야기를 건네는 ‘사람’ 그 자체를 표현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번 연주회의 클라리네티스트 김욱은 이 음악을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로 해석해냈다. 김욱이 표현한 ‘나’는 훨씬 활달하고 건강하며,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재즈 음악 속 관악기 연주자들이 그렇듯 고도의 테크닉를 갖춘 채 여유와 자신감을 드러냈다. 공연 전에 상상했던 작품 속 ‘내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모습이었다면, 실제 공연에서 마주한 작품 속 ‘나’는 훨씬 젊었고 ‘레크, 레카’라는 텍스트가 의미하는 ‘묵상’ 개념에서도 어느 정도 탈피한 모습이었다.

김명순의 <3개의 어린이 연습곡>은 ‘어린이’가 현대적 화성을 익힐 수 있도록 작곡된 곡이다. 다만 이 작품이 초연되었을 때에는 작품 속 어린이 파트를 성인이 연주했기에, 이번 공연은 어린이를 위해 쓰여진 음악을 어린이가 직접 연주하게 된 최초의 현장이 되었다.

그 나이 또래 아이가 그렇듯 무대 한 가운데에 앉은 어린이는 앙상블에 집중하거나, 작곡가의 의도대로 작품 속 불협화음을 순순히 학습하지는 않았다. 이런 모습은 이 음악의 악보만을 읽었을 때 어린이 파트가 다소 수동적이라고 느꼈던 것과는 정반대의 광경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어린이 중 한명은 악기전공 학생들이 보여줄 법한 연주자 특유의 제스쳐를 행하지 않고 있었다. 이 어린이는 선율을 연주하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노골적으로 객석을 응시하며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 순간 리사이틀홀에 앉아 있던 대부분의 관객들도 느꼈겠지만, 이제껏 보아왔던 수많은 음악회의 연주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객석을 응시하지 않는다. 어린이의 시선은 이 연주회가 ‘관객이 보는’ 자리가 아니라, 무대 위 ‘어린이가 보는’ 자리이며,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이 역전되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예컨대 이날 공연은 리사이틀홀의 어둠 속에 앉아 어린이에게 집중하는 수십 개의 눈동자들을, 바로 ‘어린이가’ 경험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발생하고 있었다.

임주광의 <3, 2, 1, 고!>는 퍼포먼스적인 측면 그리고 음계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운동적인 무드가 인상적인 곡이었다. 작품 초반에는 특정한 제스쳐가 셋팅되고 이 움직임이 음악에 추동력을 부여하는데, 일단 음악이 흘러가기 시작하면 8분음표 단위로 이루어진 펄스가 쉬지 않고 달리게 된다. 이 작품은 일정한 속도로 진행하는 성부 위로 제 3의 요소가 침범하는 구도를 갖고 있으며, 모든 경우에 8분음표의 펄스를 연주하는 성부는 짜임새의 중심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상대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음소재 덕분에 이 음들의 ‘움직임’ 자체가 작품 전면에 부각되어 작품 전체를 하나의 퍼포먼스로 보이도록 하는 측면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도 작품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무드는 연주자가 ‘각 활’로 연주하는 음계의 반복과 연관되어 있었다. 반복이 주는 몇몇 언캐니란 뉘앙스들, 이를테면 키네틱한(kinetic), 전체주의적인(totalitarian), 모토릭한(motoric) 그리고 실어증적인(aphasic) 면이 작품 내내 연상되었다. 특히 이런 감상은 작품에 삽입한 호루라기 불기와 발구르기 등을 만나 증폭되었다. 첼로주자의 연주는 ‘선율’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움직임’ 그 자체에 관한 것으로서, 이 연주자가 앉은 채로 호루라기를 부는 행위와 결합해 하나의 낯선 퍼포먼스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런 광경은 작품의 내적인 논리나 규칙을 압도했다.

박성원의 <도라지타령 환상곡>은 클라리넷과 피아노의 이중주로서, ‘도라지타령’의 선율적 변주를 행하는 클라리넷과, 두터운 화성적 짜임새를 가진 피아노로 구성된다. 이날 발표되었던 김수혜 작곡가의 <레크레카>와 마찬가지로 클라리넷 주자의 역량과 해석이 무척 중요한 곡이었다.

유명한 작품의 선율을 차용해서 만드는 ‘환상곡’ 혹은 ‘변주곡’은 독주악기의 리사이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음악은 원곡이 가진 선율의 아름다움을 유지한 채 고도의 테크닉을 보여주고 악기의 음역 및 역량을 최대로 들려주는 경향이 있다. 이런 측면에 비추어 볼 때 <도라지타령 환상곡>이 원곡을 최대한으로 변주하고 기교적인 측면을 이끌어내는 데에 있어 다소 소극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한 ‘도라지타령’이라는 선율이 그 스스로 힘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선율이 지극히 단순하고 평이하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었다. 따라서 ‘도라지 타령’의 선율을 비교적 ‘온전하게 제시’하는 부분이 작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는 점 역시 아쉽게 다가왔다.

최창석의 <조각들 I>은 음악회 전에 진행되었던 작곡가의 세미나가 작품 청취에 영향을 주었던 작품이다. 작곡가는 프로그램 노트에서 “독립적인 음악의 조각들이 [...]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움직임처럼 들리지만, 세부적으로 설계되고 정형화된 틀 안에서” 작곡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이날 음악을 청취하며 의도적 단절, 무맥락 등의 키워드가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음악의 작곡 단계에서 사용되었다고 알려진 다양한 수학적 논리 및 이론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이 작품의 음향이 낯설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이는 음악회 직전에 흡수한 다양한 정보들이 이 작품의 실제 음향과 충돌해 어떤 ‘거리감’을 만들어냈고, 바로 이런 격차가 작품의 청취를 흥미롭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운영의 <로맨틱>은 ‘실내악 작곡제전’에서 진행하고 있는 원로 작곡가 시리즈의 일환으로 준비된 곡이다. 나운영은 수많은 음악을 남기며 고유의 음악관을 성립했고 동시대 작곡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면 일평생 수많은 곡을 쏟아낸 원로 작곡가의 작품을 ‘단 한 곡만’ 골라 연주해야 한다면, 그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실내악 작곡제전은 독특하게도 나운영의 수많은 곡 중 가장 초기의 작품을 꼽았다. 현악4중주 <로맨틱>은 나운영이 20살에 작곡한 곡으로, 다양한 서양음악적 레퍼런스를 자기화하려는 노력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이 음악은 정제되지 않은 흐름과 다소 거친 화성적 울림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연주하는데 있어 음정이나 화음, 앙상블이 불안정한 부분이 여러 번 감지되어 아쉬움을 자아냈다.

 

나가면서 

한 곡의 현대음악에 대한 재연과 삼연, 그리고 지속적인 연주가 동반될 때 이 음악은 어떤 의미를 획득하는가? 반복 연주의 궁극적인 끝에는 무엇이 위치하는가? 현 시점에서는 이런 질문에 특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다만 계속되는 재연들은 이 음악에 대한 해석의 지평을 넓혀 주고, 작품이 가진 다양한 면면과 장점을 드러내어 보다 많은 대중들을 만나게 해준다. 실내악 작곡제전에서 이뤄진 재연들에서 각각의 음악은 캐릭터가 바뀌기도, 연주시간이 변화하기도, 혹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재연을 통해 보여준 변화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 음악이 또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긴 여정 중 한 걸음이었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음악춘추」, 274호, 2018년 6월 (20180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