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악회 제47주년 기념 작품발표회 리뷰

2016. 6. 28. 16:08

동시대 음악을 엿보는 만화경

 

2016년 6월 1일과 2일 세종체임버홀과 연세아트홀 금호에서 21세기악회 제47주년 기념 작품발표회가 열렸다. 이 땅에서 ‘현대음악 작곡가’라는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음악회에서 발표된 작품들은 일관된 양식을 사용한다거나, 공통의 주제를 다루진 않는다. 대신 작품들은 ‘실내악 편성’이라는 소규모 앙상블로 제한된다. 양일에 걸친 음악회에서는 독주에서부터 사중주까지의 편성이 선보여졌으며 세계초연된 윤성현의 <트롬본 트리오>와 김청묵의 <몰로키니 분화구>를 비롯해 정세훈, 이해미, 김은영, 배동진, 류창순, 이재신, 강동규, 김효주, 우미현, 김효진, 이은지, 이일주의 최근작 재연 혹은 개작 곡이 포함됐다.

작품들의 스타일과 형식은 다양했다. 주요한 음소재의 성격이 불협화적인 것, 협화적인 것, 더 나아가서는 미분음적인 것 혹은 음향 위주의 것 등이 공존했다. 음악 안에 특정 관념이나 이미지를 재현하는 작품이 있었고, 음악 그 자체로 구조적인 완결성을 이뤄내는 작품, 공연을 하나의 퍼포먼스 형태로 발전시킨 작품이 존재했다. 종교적인 지향을 갖는 작품, 국악기를 이용한 작품, 인용음악의 범주로 볼 수 있는 작품 등도 있었다.

작품들의 다양한 스펙트럼은 동시대 현대음악의 경향이기도 하다. 현대음악은 20세기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작곡되고 있으며 한 작곡가의 음악 안에서도 다양한 양식이 발견된다. 이를 반영하듯 20세기를 다룬 존 록웰의 『모든 미국 음악』 같은 책들에서는 동시대 음악을 무려 20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하기도 한다. 양일에 걸친 음악회에서도 총 세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에 서로 다른 세계관을 지닌 14개의 곡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음악회 첫날, 첫 번째 순서로 연주된 곡은 정세훈의 첼로 독주를 위한 <세이렌>이었다. 곡은 작은 소리로 길게 지속되는 고음의 하모닉스로 시작한다. 하모닉스는 이따금씩 음정을 이루기도 하고 빠른 트레몰로 등과도 섞이며 상당 시간 지속된다. 작품의 시작 부분에 등장한 이 하모닉스는 멀리서 어른거리는, 명확한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운 대상을 빗대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를 작품의 제목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세이렌’이 먼 거리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장면이 연상된다. 이어 넓은 음역을 넘나드는 빠른 하모닉스 제스쳐가 등장하는가 싶더니, 그 뒤를 이어 첼로가 본격적으로 ‘첼로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때의 ‘첼로다움’이란 악기 특유의 표현적 속성을 과감히 드러내는 낭만주의적인 색깔의 선율이다. 그리고 이 선율은 그제야 형체를 드러낸 ‘세이렌’처럼 들린다.

하지만 세이렌에 대한 ‘표현’을 청자가 인지하는 것이 작곡가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작곡가는 ‘세이렌’ 그 자체를 청자 앞에 소환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작품이 무엇을 의도했든 간에 작품의 체험과 그 효과는 청자의 의식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작곡가는 이 영역을 통제할 수 없다. 따라서 작곡가가 작품에서 세이렌, 즉 ‘청자 매혹하기’를 작품의 의미로 전면에 배치했다면, 이 작품의 궁극적인 실현은 청자에 따라, 그리고 매 공연에 따라 각기 다른 결과를 불러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동진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리플렉티브(Reflective)>에서는 가브리엘 포레의 <꿈을 꾼 후에>(1865)의 단편이 새로운 곡의 재료로 확장된다. 작곡가는 포레 곡의 특정한 화성진행이 만들어내는 ‘감각적 측면’, 즉 소리가 주는 울림 그 자체의 미적인 경험을 발췌해 이것을 극대화한다. 곡 안에는 포레의 펄스, 리듬적 특성, 성부 진행, 하프를 뜯는 듯한 아르페지오 제스쳐 등이 각각 분리되어 있으며 이는 작곡가에 의해 자유롭게 운용된다.

도입부의 현악기는 메마른 느낌의 펄스를 반복하는데, 이는 곧 피아노의 타격으로 그 성질이 변형된다. 타격은 기계적인 펄스를 특정 화음의 잔향 같은 형태로, 그리고 노이즈에 가까운 음색을 화성이 포함된 ‘악음’으로 변화시키며, 이어지는 타격에서는 포레 음악의 기시감을 끌어낸다. 불분명하게 느껴지던 포레의 단편이 특정한 형상으로 인지되는 순간, 그리고 피아노의 타격이 무대 위를 압도하는 순간, 포레의 곡과는 또 다른 새로운 감상이 가능해진다. 청자는 작곡가가 경험했던 낭만주의 화성의 매혹을 천천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엿볼 수 있다. 또한, 청자는 특정 대상을 고도로 확대했을 때에야 발견되는 독특한 층위의 형상을 마주할 수 있다.

 

류창순의 클라리넷 독주곡 <처세술(處世術)>에는 다양한 클라리넷 기법들이 자연스럽게 그리고 특수주법의 표현적 특성을 잘 살린 채 등장한다. 이를 연주하는 연주자의 테크닉과 작품에 대한 이해도도 높은 느낌이다. 작품은 3악장으로 구성되며, 첫 악장에서는 선율들이 대조되는 형태로 등장하고 반복되며 이는 간혹 말을 건네거나 독백을 하듯 이어진다. 2악장의 선율들은 보다 비르투오소적이고 긴 길이로 등장하며, 마지막 악장에서는 지속음과 특수주법이 두드러진다. 특히 이 작품이 클라리넷 ‘독주’라는 점, 연주자의 ‘목소리’를 이용하는 주법을 사용한다는 점, 그리고 적당한 길이의 프레이즈들이 마치 문장처럼 나열되고 대조된다는 점은 이 작품이 청자에게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말’하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아마도 작곡가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프로그램 노트에 적혀있던 다양한 개념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청자가 이 음악을 프로그램 노트와 연계해 해석하려고 할 때, 프로그램 노트는 역설적이게도 이 음악을 프로그램 노트의 텍스트들로부터 분리하는 역할을 한다. 작곡가의 프로그램 노트에는 ‘서태지’, ‘소녀시대’, ‘걸스데이’라는 대중음악 뮤지션의 이름과 ‘득템’(tem), ‘RPG’ 같은 게임용어들 그리고 ‘혐오’, ‘욕망’, ‘이상’, ‘거짓’, ‘순응’, ‘자위’ 등의 단어가 섞여 있다. 각각 강렬한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이 수많은 단어들은 하나의 뜻으로 합치되기보다는, 각기 다른 잔상을 갖는 불균질한 키워드들의 조합으로 느껴진다. 서두에 인용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 가사 역시 이런 상황을 강화한다. 여기에 각기 ‘기만’(欺瞞), ‘위선’(僞善), ‘체념’(諦念)이라 이름 붙은 3개 악장의 표제까지 덧붙여진다.

프로그램 노트를 열심히 읽은 청자는 그 어떤 음향이라도 이 글귀들과 연관 지어 해석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음악으로 건네는 말’은 ‘텍스트로 제시된 말’에 비해 극히 음악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음악이 흐르면 흐를수록 프로그램 노트 속 다양한 텍스트들은 음악과 점점 더 대조되는 것으로 인지되며, 음악은 점점 더 조형적이고 구조적인 것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작품의 제목인 ‘처세술’은 작품에 대해 지시적이라기보다는 ‘수행적’인 것이 된다. 작곡가는 혼란한 속세에서 벗어나는 방편으로 매끈한 현대 음악 안으로 도피하고, 이를 일종의 ‘처세술’이라 명명한 것처럼 보인다.

 

이재신의 현악 4중주 제2번 <세월호>에는 다양한 층위의 직접적인 표현이 두드러진다. 우선 작품의 제목인 ‘세월호’ 그리고 무대에 설치됐던 ‘노란 리본’은 세월호 사건에 대한 노골적인 언급이다. 음악 속의 표현방식과 애도 행위도 상당히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다.

작곡가는 이 작품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첫 부분은 “세월호의 침몰이 주는 위급함과 혼란을 겪는 탑승자”를 묘사하고 있고, 두 번째 부분은 “사망자를 위로하는 살풀이 구음”으로 구성된다고 설명했다. 작곡가가 언급한 두 부분에는 주요한 화성진행과 리듬적 아이디어가 뚜렷하게 반복된다. 또한, 작곡가가 언급한 두 부분 이외에도 이 두 부분을 연결해주는 연결부가 도드라져 들리는데, 이 연결부에서는 단 두 개의 화음만이 긴 시간 반복된다.

흥미로웠던 것은 반복의 효과다. 어느 정도의 반복이 지속되자 반복되는 화음이나 리듬 등의 특성은 점점 의식에서 멀어지고, 이것을 연주하는 연주자의 ‘연주 행위 자체’가 점점 더 강조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적어도 작품의 목표였던 희생자에 대한 기억과 애도는 이 작품을 연주하는 연주자들에 의해 충분히 수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연주자들은 작품 안에 등장하는 국악적인 뉘앙스의 선율들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표현해내고 있었다. 이 또한 연주자가 주체가 되어 행하는 온전한 애도 행위를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해미의 두 대의 첼로를 위한 <도플갱어>김은영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facie ad faciem)>는 각각 첼로 두 대와 바이올린 두 대라는 동일한 악기로 구성된 이중주곡이다. 이 작품들은 편성에서 오는 ‘대칭’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해미의 작품은 ‘도플갱어’라는 제목이 보여주듯 두 대의 첼로가 대치와 결합의 과정을 거치며, 김은영의 곡은 “마주하는 대상이란 자신인가, 타인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인상 깊었던 것은 김은영 곡의 연주였다. 특히 바이올리니스트 이보연은 이 음악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중후반에 등장하는 클라이맥스지점까지 청자를 매끄럽게 인도하고 있었다. 현대음악 연주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수동적인 연주가 아니라, ‘비르투오소’라 충분히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개성적인 그리고 능동적인 해석과 표현력이 돋보이는 연주였다.

 

음악회 첫날 마지막으로 연주된 곡은 윤성현의 <트롬본 트리오>다. 곡 안에서는 세 대의 트롬본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표현들, 음역, 주법, 아티큘레이션을 중심으로 몇몇 섹션이 구성되며 이것들이 매끄럽게 정렬 · 반복되며 흐른다. 슬라이드를 빠르게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반음계 클러스터 위에 카랑카랑한 뮤트 선율이 뚫고 나오는가 하면,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조성의 화성진행이 몇 번의 간격을 두고 등장한다. 무조의 화려한 솔로 패시지가 나타나는가 하면, 모든 성부가 스타카토로 된 음을 연타하기도 한다. 이따금 긴 지속음이 등장해 음향 전체를 사로잡는 두터운 바탕을 만들어줄 때는 이 악기가 가진 본연의 힘과 표현력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했다. 후반부에 이르러 상행 글리산도의 점진적인 사용으로 다양한 여정을 거친 음향이 정점에 다다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트롬본이 부드럽고 눅진한 음색으로 조성적 혹은 유사조성적 음향을 연주할 때는 묘한 낯섦이 느껴졌다. 기억 속 트롬본 합주는 늘 다른 악기와의 조합으로만 존재한다. 따라서 트롬본으로만 구성된 화음들은 익숙한 음역과 선율형태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어딘지 생경한 느낌을 준다. 이때 유사조성적인 화성들이 갖는 조성과의 거리감은, 트롬본 트리오라는 독특한 편성과 결합하어 곡 전체를 오묘한 풍경으로 만든다.

 

음악회 둘째 날 첫 곡으로 연주된 작품은 강동규의 트롬본 솔로를 위한 <노리>다. 한국적인 요소를 현대음악에 도입하는 시도는 보통 음계나 리듬, 음향의 특이성 등 음악 내적인 요소에 집중한다.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것은 판소리 <흥보가>를 소재로 삼되 판소리의 ‘퍼포먼스’적인 측면을 중심에 두고 작업했다는 점이다. 작곡가는 트롬본 연주에 내재하는 악기 특유의 연극적 측면을 판소리와 결합시킨다. 이를테면 트롬본 주자가 밸브를 슬라이딩할 때 만들어지는 독특한 시각적 이미지와 팔 동작은 ‘온전히 음향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음악 안에서는 불필요한 요소일 뿐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 ‘몸짓’이 중요한 사건이 된다. 작곡가는 연주자가 슬라이딩을 위해 팔을 움직일 때마다 이에 맞추어 쉐이커가 소리 나도록 설정하고 이를 ‘흥보의 박타기’에 병치시킨다. 또한, 트롬본 주자는 반음계로 된 선율들, 트레몰로로 연주되는 빠른 패시지들, 저음에서 길게 지속되는 음 등 다양한 양식의 선율을 연주한다. 이는 홀로 해설과 대사, 노래, 연기 등을 총괄하는 판소리의 노래 부르기 형식을 독주 트롬본 편성으로 옮겨와 구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웠던 것은 몇몇 지점에서 이 작품이 꽤 유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트롬본 주자가 연주 도중 바닥을 쾅쾅 구르는 부분에서는 브라스 밴드가 발 페달로 큰 북을 연주하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또한, 연주자가 팔을 앞뒤로 움직이며 쉐이커로 ‘쓱쓱’ 소리를 낼 때는 판소리에서보다도 한층 더 익살맞은 ‘박타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미 작곡가는 프로그램 노트에 “박타령을 들을 때마다 장단에 맞춘 박수가 절로 나오게 된다.”라고 적고 있다. 이런 측면들은 이 작품이 현대음악 음악회의 엄숙하고 관조적인 태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감상 태도를 요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 또한 ‘퍼포먼스’적인 측면을 중심에 둔 작업이 던지는 새로운 미학적 질문일 것이다.

 

우미현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테세라(Tesserae>는 곡 전면에 삼화음과 조성을 노출하고 이를 두 대의 피아노라는 편성을 이용해 막대한 음량과 다이내믹으로 쏟아낸다. 느린 화성 리듬이 흐르는 가운데 연타와 트릴로 생성된 지속적인 펄스도 인상적이다. 곡은 여러 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진행되는데, 각각의 섹션들은 포스트 미니멀리스트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음향에서부터 낭만주의적인 소리를 내는 음향까지 다양하다. 동양적인 느낌을 주는 음계들, 마치 건반 타악기를 연주하듯 지속해서 타격하는 피아노의 연주 방식, 그리고 이 안에서 마치 즉흥연주를 하듯 프레이즈를 주고받으며 연주를 행하는 연주자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음렬주의자들의 후예들이 발전시킨 ‘진지한 음악’은 어떤 측면으로는 일상 속에서 편하게 청취할 수 있는 음악이나 단순한 아름다움을 지닌 음악들 대부분을 음악회장에서 배격했다. 그래서인지 현대음악 음악회의 연주자들은 복잡한 리듬과 섬세한 표현을 구사하기 위해 늘 긴장한 모습이다. 하지만 우미현의 <테세라>에서는 이런 상황이 역전된다. 이 작품은 양일간에 걸쳐 연주된 14개의 곡 중에서 가장 청중 어필했던 곡으로, 현대음악 음악회가 아닌 좀 더 느슨한 경계의 음악회에서 연주되었어도 충분히 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법한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다양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이미 오래전에 일어나 이제 동시대 음악은 이렇게도 친밀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곁에 다가와 있는 것 같다.

 

김효진의 피리와 피아노, 타악기를 위한 <아함(我喊, A-喊)>에는 작품 내내 강렬하게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는 피리와 이 피리 선율에서 파생된 거대한 헤테로포니 음향이 어우러져 있다. 피리 고유의 진동형태와 비브라토, 플라터 텅잉 등이 피아노와 타악기의 트레몰로 음향으로 확장되고, 피아노와 타악기의 배음과 잔향이 피리 ‘불기’의 속성을 은유하듯 무대 위를 가득 채우고 있다. 특히 타악기와 피아노는 피리 주자가 만들어내는 리듬적 제스처와 미분음들 그리고 선율을 다양한 방식으로 증폭한다. 마치 작은 동물이 큰 벽 앞에 서 있고 이 동물을 등 뒤에서 불빛으로 비춘다고 가정했을 때, 동물의 미세한 몸짓이나 움직임이 벽면 가득히 거대한 그림자로 생성되고 이것이 시시각각 과격하게 흔들리는 것 같다.

이날 피리 주자는 무대 중심에 서서 작품 전체를 암보로 연주했다. 이는 연주자가 충분한 리허설을 통해 악보를 외운 것이겠지만, 그에 앞서 피리 주자가 선율을 기억하고 작품 전체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작품 전체가 유기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작품은 피리의 A 음에서 시작해서 피리의 A 음으로 되돌아온다. 곡의 시작에서 끝까지의 여정은 기승전결이나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가 아닌, ‘피리가 소리를 낸다.’는 행위 자체에 집중한다.

 

이은지의 현악사중주를 위한 <풍크툼>은 곡의 시작에서부터 몇 번의 정점을 거쳐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강도로 긴장감이 조절되고 통제된다. 이때의 긴장감은 일반적인 음악적 요소라 일컬어지는 음정 · 선율 · 화성 · 리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음향 속에서 음이 출현하는 빈도와 밀도, 트레몰로의 빠르기, 글리산도의 방향과 속도, 한 음향 내부의 단일감 혹은 대립감, 음역의 배분과 음역의 이동, 음의 강도와 질감 등에 의해 형성된다. 현악기가 소리 낼 법한 전통적인 음향은 거의 등장하지 않으며, 중후반쯤에 다다라 곡이 클라이맥스에 이를 때쯤 현악 사중주의 튜티 음향을 흉내 낸 독특한 표현이 등장할 뿐이다. 이 부분에서는 사중주의 단호한 튜티가 그 제스처만을 남겨 놓은 채 앙상하고 불완전한 모습으로 산화되어 있다.

작품은 ‘움직임’에 관한 곡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을 정도로 구석구석 섬세하게 조작된 다양한 움직임이 가득하다. 움직임은 일차적으로는 음의 고저와 시간 축으로 구성된 ‘소리 공간’ 내부의 것이며, 이차적으로는 연주자가 악기 위에서 구현하는 다양한 각도와 강도, 방향과 속도로 된 활 긋기에 의한 것이다. 작곡가는 이 작품이 ‘모자이크’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이 작품이 계속해서 서로 다른 음향을 끊임없이 경합시키고 이를 재조합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청자는 다방향의 움직임에 이끌려 어느 순간 난생 처음 보는 풍경을 ‘홀로’ 마주하게 된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경험으로, 작곡가가 제목으로 사용한 ‘풍크툼’이 청자의 청취 경험 안에서 순간적으로 구현됨을 의미한다.

 

이일주의 아코디언, 더블베이스, 기타를 위한 <피에타>에서 작곡가는 쉽게 결합하기 힘들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요소들을 한데 엮어 이를 ‘종교적인’ 그리고 ‘애도하는’ 악곡으로 버무려낸다. 우선 이 곡은 아코디언과 더블베이스 그리고 기타라는 독특한 편성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 타악기의 일종인 ‘종’(crotale bell)이 추가되어 전체 음향을 구성한다. 또한 작곡가는 이 곡이 “한국의 장례소리와 포레의 <자비로우신 예수<(Pie Jesu)를 변용”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실제로 곡 안에는 이 동서양의 소재들이 어렴풋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다양한 요소들은 이 새로운 음악 안에서 형체가 붕괴된 채 녹아 없어진 것이 아니라, 모자이크를 이루듯 본래의 기원과 아우라를 유지한 채 섞여 있다.

김효주의 두 대의 클라리넷을 위한 <밤 깊은 밤에>는 연주됐던 모든 작품 중 가장 온건한 형태의 화성과 선율을 보여준다. 매끄럽게 흐르는 클라리넷 두 대의 조합은 이 작품이 ‘현대 음악’인지 아니면 20세기 초의 ‘조성음악’인지, 그리고 이 음악의 청중으로 설정된 대상이 이 장소에 모인 ‘고학력 작곡전공자’인지 아니면 다른 종류의 청중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아마도 이런 고민들은 현대 음악의 ‘다양성’의 한계에 대한 새로운 층위의 문제제기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양일의 음악회에서 마지막으로 연주된 곡은 김청묵의 바이올린, 피아노, 타악기를 위한 <몰로키니 분화구>다. 작품 안에는 특정한 모티브나 화음의 울림 등이 긴 호흡으로 제시되며 이것들은 반복된다. 이때의 반복은 강박적이지 않으며, 음악적 문맥을 형성하는데 꼭 필요한 반복만이 자연스럽고 예측 가능한 형태로 등장한다. 따라서 청자는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화음과 선율, 그리고 곡의 흐름을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천천히 인지하고 음미할 수 있으며, 작곡가가 제시하는 음악적 흐름을 잠자코 따라가며 곡을 관조한다. 그리고 이 행위는 어느 순간 작곡가가 ‘바라본’ 풍경에 대한 관조로 전환된다. 작곡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하와이의 자연과 아름다움이 청자 앞에 ‘음향’의 형태로 펼쳐진다.

일흔 살의 작곡가가 그려낸 자연의 아름다움. 이는 그 자체로 음악회에 등장했던 다른 13개의 곡과 이 곡을 분명히 구분 짓는다. 작곡가는 이미 다양한 음악에 대한 탐구와 고민을 마쳤을 것이기에, 곡 안에는 다양한 음악 어법들이 작곡가 자신의 것으로 소리 난다. 이를테면 곡 안에서 이따금 발견되는 특정 화음들과 익숙한 리듬형들은 낱개로 분리되어 연주될 때에는 특정 사조를 암시하는 음악 요소가 되겠지만, 이 곡 안에서는 단지 이 음악을 구성하는 음악 요소가 된다. 그렇게 작곡가는 한 개의 화음으로 구성된 아르페지오 음형으로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아르페지오 음형의 반복으로 특정 장면을 그려내는 것은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표현 방식일 테지만, 누구나 이런 방식으로 청자를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에필로그: 만화경, 혹은 탁하고 무거운 유화

음악회는 곡과 곡이 연결될 때의 감각, 혹은 연속적인 경험으로서의 ‘하룻저녁의 음악회’라는 개념보다는 각기 독립된 개별 작곡가의 작품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음미하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개별 곡 하나하나에 집중해 찬찬히 살필 때, 음악회는 마치 총 천연 색상이 동시에 빛을 발하는 만화경 같다. 청자는 음악 하나하나의 빛깔을 감지하기 위해 각기 다른 세계를 갖는 음악에 재빨리 몰입하고 다시 빠져나오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음악회는 각각의 음악이 화려한 색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색이 모두 뭉쳐져 불투명한 색상으로 인지되기도 한다. 음악회 전체의 색깔이 하나로 뭉뚱그려지면, 이는 탁한 색을 내는 덧칠한 유화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는 동시대 음악을 대하는 청자의 인식과도 유사하다. 이토록 다양한 음악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탁한 회색’으로만 인지된다. 어쩌면 모든 음악을 한데 뒤섞어 ‘회색’처럼 보이게 하는 음악회는, 어느 순간 이 모든 음악의 색깔을 처음부터 ‘회색’으로 주문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음악회장에 앉아 있는 청자의 상당수는 난생처음 듣는 음악에 대해 구조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소리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음향적 매혹에 이끌릴 가능성이 높다. 이는 필연적으로 음악회의 수많은 곡 중에서 감각적 측면이 도드라진 곡에 청자가 더 집중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작품 중 일부는 이와 같은 환경 안에서 그 곡이 가진 고유의 미학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다양한 미학을 기반으로 하는 곡들이 동일한 청취환경에 나열될 때의 문제점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 이 고민은 특정한 음악회 형식이 작곡가들과 작품에 끼칠 수 있는 장기적인 영향력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으로도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오작」, (2016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