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음챔버오케스트라 화음 프로젝트 페스티벌 Day 2 

추상에서 구체로, 고립에서 소통으로

 

인왕산 북동쪽 바위산 기슭에 자리 잡은 석파정에서 화음 챔버 오케스트라의 <2014 화음 프로젝트 Day 2, 현대음악과 대중가요의 하이브리드> 공연이 열렸다. 1960~1990년대의 대중가요를 5명의 현대음악 작곡가가 재해석한 무대였다. 무대 뒤편으로는 희끄무레한 암벽들과 그 사이사이 뻗어 나온 짙은 녹색의 나무들이 보였고, 객석에는 젊은이들 · 아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멀찌감치 등산객들이 걸터앉았다. ‘석파’는 흥선대원군의 아호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흐름을 쇄국으로 막아섰던 그다. 대원군은 100년 후 자신의 정자에서 가을 산 · 한옥 · 대중음악 · 현대음악의 편린이 뒤섞여 혼종의 풍경을 만들 것을 알았을까? 세상의 모든 ‘새로움’은 다양한 요소의 조합과 충돌로 만들어진다. 풍경만큼이나 독특한 새로운 음악의 탄생을 맞이하는 자리였다.

 

뒤섞기와 독창성 

퓨전이 유행이다. 장르 간의 뒤섞기, 전통과 현대를 혼합하는 시도가 빈번하고, ‘하이브리드’나 ‘융합’ 혹은 ‘통섭’의 구호가 낯설지 않다. 하지만 세상 한쪽에는 자신의 결계를 닫은 채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는 이들이 존재한다. 현대음악이 그렇다. 현대음악은 오랫동안 자신의 순수성을 간직한 채 타 음악에 배타성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도 ‘대중음악’은 현대음악과 심리적으로 가장 멀리 있는 음악이다. 현대음악은 대중음악에 확실한 ‘거리 두기’를 함으로써 자신의 범위와 표현방식을 규정해왔다. 그래서 현대음악 안에 대중음악을 인용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날 공연에 참가했던 작곡가 유범석은 프로그램 노트를 통해 ‘대중음악 인용을 통해 위협받을 수도 있는 창작곡의 독창성 손실’ 여부를 조심스럽게 걱정했다. 비슷한 맥락으로, 적어도 국내 현대음악계에서는 ‘대중음악적 요소’를 인용한 곡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날 관객들이 <현대음악과 대중음악의 하이브리드> 창작곡에 보인 반응은 고무적이다. 첫 번째 연주된 임지선 작곡가의 화음 프로젝트 Op. 129, “퍼즐”은 1960년대의 대중음악 “동백아가씨”를 인용해 만든 작품이다. 관객들은 작품을 감상하면서 이 작품에 어떤 가요가 인용됐는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등장하는지 적극적으로 탐색했다. 가사 없이 음표만으로 이루어진 음악이 일종의 ‘추상화’라면, 이것을 해석하는 단서는 “동백아가씨”라는 ‘구체적인 상’이었다. ‘추상’이 ‘구체’로 변환되자, 중년의 관객들은 동석한 지인에게 소곤거리며 즐거워했다. 관객들은 익숙한 음향 조각의 인용을 통해 난해한 현대음악의 ‘구조’를 귀로 인지할 수 있었고, 작곡가가 이야기하고자 바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네 번째로 연주된 유범석 작곡가의 화음 프로젝트 Op. 132, “기억속에서 (In my memory)”에서도 일반적인 현대음악 청취와는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관객들은 음향적으로 낯설지 않은 음악을 들으며, 이 음향 속에 포착된 인용 조각들과 그것의 짜임새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대중음악 인용은 독창성에서 멀어지는 길이 아니라 작곡가의 독창성을 관객과 나눌 수 있는 소통 수단인지 모른다.
 
인용한 요소를 음향 전면에 노출시키지 않고도 <현대음악과 대중음악의 하이브리드>가 가능하다. 두 번째 연주된 김성기 작곡가의 화음 프로젝트 Op. 130, “Centonisation”은 1970년대 대중가요를 인용해 만든 작품이다. 이 곡은 바이올린 솔로를 위해 작곡되었으며, 유기적으로 통합된 음악요소와 함께 강력한 선적인 흐름을 만든다. 혼합과 합성은 작곡가가 곡을 작곡하는 순간에 집중됐다. 이 곡 안에서 대중음악은 작곡가에게 영감을 주는 ‘또 다른 세계’의 파편이었다.

 

기억 아카이빙 

작품 속에 인용된 음향조각들이 한국의 1960~1990년대 대중음악이라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새로운 창작곡 속 대중음악이 청각으로 ‘감지’되려면, 개별 음향 조각이 특정 ‘기억’을 수반해야 한다. 즉 음향의 기호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날 공연에서 관객들이 공연에 보인 열렬한 반응은, 각 시대를 상징하는 대중음악이 50년에 걸쳐 공동의 기억이 됐고, 그 기억이 청각으로 충분히 ‘식별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었다. 마지막 순서였던 오예승 작곡가의 화음 프로젝트 Op. 133, “Mash-up”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리듬 모티브가 광범위하게 등장했다. 부점 리듬은 서양 음악사에서는 전통적으로 ‘왕의 행차’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날 공연에서는 특정 화성과 결합되어 ‘난 알아요’, ‘신세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90년대’를 표상하고 있었다.
 
공연을 통해 한국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동시대의 소리와 기억을 다루고, 또 기록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세 번째로 연주된 김광희 작곡가의 화음 프로젝트 Op. 131, “세노야 세노야 2014”는 1970년대의 유명한 대중가요 “세노야 세노야”를 인용해 만든 곡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1970년대 “세노야 세노야”의 작곡가와 이날 초연된 “세노야 세노야 2014”의 작곡가가 동일인이라는 점이다. 44년 전 대학교 3학년이었던 김광희 작곡가는 고은 시인의 시에 음악을 붙였고, 이 곡은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큰 인기를 얻으며 ‘70년대의 대표 대중가요’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이날 연주된 “세노야 세노야 2014”는 한 작곡가의 창작물이 40년이 넘는 시간을 거쳐 세대와 공간에 뿌리내리고 다시 작곡가의 손에 들어와 새롭게 재창조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빚은 곡을 다시 거두어 변형하는 탓인지, 김광희 작곡가는 ‘원곡’을 인용하는 방식에서 다른 작곡가들과 차이를 보였다. 이날 프로젝트에 참가한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재료가 되는 대중가요를 자유롭게 자르고 부수어 작업했다. 반면 김광희 작곡가는 원곡 “세노야”의 선율들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전면에 당당하게 드러내 보였다. 어쩌면 동일한 작곡가의 ‘인용을 통한 창작’은 ‘편곡’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원곡 선율은 곡 초반에 오보에로 또렷하게 등장하며, 이를 주제로 하는 ‘변주곡’ 형식이 이어졌다. 음향 층 안에서 흐릿하게 부유하는 “세노야” 선율은 40여 년의 시간을 초월한 ‘공동의 기억, 공동의 선율’ 그 자체였다.

 

추상에서 구체로, 고립에서 소통으로

이날 공연은 화음 챔버 오케스트라가 이제껏 시도해 온 다양한 형태의 도전과 맥을 같이 한다. 이전까지 화음(畵音)의 시도는 추상적 음악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매개해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반면 이날의 시도는, 기호화된 음향 조각을 현대 음악 안에 직접 이식(移植)하는 것에 가깝다. 이로써 음악은 ‘추상’의 외연을 가지고 동시에 ‘구체성’을 띨 수 있었다.
 
2014년 가을 석파정, 대중음악을 매개로 한 현대 창작음악은, 그 난해한 ‘추상’에서 빠져나와 ‘구체적인 상’으로 관객 앞에 섰다. 추상에서 구체로, 그리고 이를 통해 고립되고 소외된 현대음악을 ‘소통’으로 이끄는 시도. 화음의 시도가 관객과 멀어진 채 침체되어 있는 현대음악계에 주목할 만할 대안이 되길 바란다.

 

화음챔버오케스트라, (2014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