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스트롬, 박-파안 영희

2015. 8. 18. 01:31

스벤-다비드 샌드스트롬 (Sven-David Sandström)

 

현대음악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여전히 1908년 즈음에 머물러 있다. 쇤베르크가 현악 4중주 2번 마지막 악장에서 나는 다른 혹성의 대기를 느낀다는 문구를 등장시켰을 때다. 대중은 왜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듣기 어려운 곡을 계속해서 만드는지, 왜 현대음악은 사람을 감정적으로 끌어당기지 않는지 궁금해 한다. 설상가상으로, 현대음악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대중음악에 비해 점차 그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 어느 순간 대중이 바라보는 현대음악이란 복잡하고 난해한 특정 타입으로 응고되어 버린 것 같다.

그래서 작곡가 샌드스트롬’(Sven-David Sanström b.1942)은 중요하다. 그는 대중이 가진 현대음악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융해시키고, 대중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현대음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린다. 샌드스트롬은 동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스웨덴 작곡가이며, 모더니즘 · 신낭만주의 · 미니멀리즘 등 서로 다른 음악 양식을 능숙하게 구사한다. 그의 음악은 스웨덴 합창 음악 레퍼토리로 굳건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은 그의 작품 초연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의 음악세계를 형용하는 단어는 대중성’, ‘신낭만주의’, ‘음악의 표현성’, ‘스타일적 다원주의등 다양하다. 이는 그의 음악이 기존의 낡은 현대음악 미학을 대체할 새로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올해 74살을 맞은 샌드스트롬은 성실한 다작의 작곡가다. 그리고 그의 성실함은 단순히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많이 쓴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1970년대에서부터 2000년대까지 끊임없이 변화했으며 이 변화는 세상의 흐름과 작곡가 내면의 욕망을 솔직히 추구한 결과다. 세상과 꾸준히 소통해 온 작곡가의 음악 여정 안에는 동시대 현대음악의 거대한 흐름이 어렴풋이 새어 나온다. 이 또한 샌드스트롬의 음악이 매력적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유년 시절과 초기 음악활동

스벤-다비드 샌드스트롬(Sven-David Sandström)1942년 스웨덴 부렌스베리(Borensberg)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 시절 음악 경험은 가족과 함께 다녔던 침례교 계열 교회에서 이뤄졌다. 그는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트럼펫과 기타를 연주했으며 소규모 앙상블 활동을 했다.

1963년 샌드스트롬은 스톡홀름 대학(Stockholm University)에서 음악학(Musicology)과 예술사(Art History)를 전공하며 이즈음 처음으로 작곡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왕립 음악원(Royal College of Music, Stockholm)의 구나 북트(Gunnar Bucht b.1927)가 열었던 제 2비인악파에 대한 세미나를 들으며 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 베베른(Anton Webern 1883-1945)의 음렬 작법을 응용한 작곡을 시도한다. 그는 1965년 무렵에는 매일 작곡을 했으며 우연성 음악(aleatoric music) 그리고 그래픽 기보 등에도 관심을 갖는다.

1966년 샌드스트롬은 잉게마르 몬손(Ingemar Månsson b.1929)이 이끄는 합창단 “Hägerstens Motettkör”에 들어간다. 이 합창단은 프로 못지않은 고도의 테크닉을 구사하는 아마추어 합창단이었고 샌드스트롬은 이 합창단과 수십 년의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합창단 활동을 통해 체득한 다양한 성악 레퍼토리와 가수로서의 경험은 샌드스트롬이 이후 다양한 합창음악을 작곡하는데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 ‘합창 음악은 그의 음악세계를 논의할 때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분야 중 하나다.

1967년 샌드스트롬은 스웨덴의 첫 모더니스트 작곡가인 힐딩 루센베리(Hilding Rosenberg 1892-1985)에 대한 논문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1968년 스톡홀름 왕립 음악원(Royal College of Music, Stockholm)에 작곡 전공으로 다시 입학한다. 샌드스트롬은 잉가 리드호름(Ingvar Lidholm b.1943)의 제자가 되었고, 피아 네어걸(Per Nørgård b.1932), 몰튼 펠드만(Morton Feldman 1926-1987), 아네 노트하임(Arne Nordheim 1931-2010), 리게티(György Sándor Ligeti 1923-2006) 등의 다양한 초빙 강사들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리게티와 네어걸의 음악은 샌드스트롬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당시 샌드스트롬이 작곡했던 16명의 성악가를 위한 <인벤션>(Invention, 1969)은 리게티의 <아방뛰르>(Aventures, 1962)의 영향을 받은 곡이다.

 

1970년대

오케스트라 곡 <Through and through>(1972)는 샌드스트롬의 음악원 졸업 작품이며 동시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첫 번째 곡이다. 샌드스트롬은 이 작품으로 단숨에 스칸디나비아의 젊은 모더니스트 작곡가 반열에 올랐고, 1974년에는 “Christ Johnson Prize”를 받게 된다. 이 곡은 1974년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Concertgebouw in Amsterdam)에 의해 ISCM(the International Society for Contemporary Music) “World Music Days”의 일환으로 연주됐고, 이 덕택에 관악기와 타악기를 위한 다음 작품 <Utmost>(1975)를 위촉받게 된다. 음악학자 룬드만(Tony Lundman)1970년대 초반 샌드스트롬의 음악이 기악곡이 많으며, 무척 섬세하고 극단적으로 복잡하다고 말한다. 이즈음 그의 음악은 음렬과 같은 엄격하고 형식적인 작곡 프로세스에 기초한다.

그러나 샌드스트롬의 작곡 방식은 197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는 경직되어 있고 미리 예측된 구조를 사용하는 초기 방식에서 벗어나 한층 더 자유로워졌으며, 신낭만주의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물론 이즈음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비화성음을 사용하며, 복잡하고, 작품 내부를 관통하는 법칙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서서히 모더니스트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자신이 진정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샌드스트롬이 모더니스트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을 모색하게 된 것은, 그가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와 같은 시인의 텍스트를 음악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다. 환상적인 텍스트들은 그의 음악 안에 감정적이고 표현적인 힘을 만들어 냈으며, 샌드스트롬의 음악은 순수한 낭만주의 혈통으로 이끌린다.

예를 들어 블레이크의 시를 가사로 쓴 혼성 합창곡 <A Cradle Song/The Tyger: Two Poems>(1978)는 샌드스트롬의 텍스트사용 방식과 그 음악적 영향에 대해 보여준다. 이 곡에는 블레이크의 시집 순수의 노래(Songs of Innocence, 1789)에서 가져온 시 한 편과, 경험의 노래(Songs of Experience, 1794)에서 가져온 시 한편, 2편의 시가 결합된다. 흥미로운 점은 <A Cradle Song/The Tyger> 안에 구현되는 이원론적인 세계. 음악 안에는 순수의 노래에서 가져온 자장가경험의 노래에서 가져온 위험한 호랑이와 대응되며, 이런 대비는 3화음, 부드러운 음향에 대응하는 소리를 내는 제스처들, 불협화음 등과 병치된다. 그리고 이런 방식의 작법은 이어지는 작품 <레퀴엠>에서도 계속된다.

1979년 샌드스트롬은 악명 높은 <레퀴엠>(De ur alla minnen fallna, Missa da requeim)을 작곡한다. 이 작품은 4명의 솔리스트, 혼성 합창단, 8파트로 된 어린이 합창단 그리고 4관 편성 오케스트라가 필요한 대작이다. 샌드스트롬은 이 곡을 작업할 때 대본가 토비아스 베리기리엄(Tobias Berggren b.1940)과 밀접하게 협력하며 2차 대전 당시 나치가 행했던 국외추방, 잔악행위 그리고 유대교 아이들에 대한 살인을 곡 안에 그려냈다. 음악학자 브루만(Per Broman)은 이 곡을 두고 검은 낭만주의라고 표현했으며, 이 곡이 가진 그로테스크한 측면을 지적한다. 1982년 이뤄진 초연에서는 현대음악사에 유례없는 소동이 일어났다. 한 무리의 그룹이 연주회장 밖에서 이 곡의 연주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스웨덴의 다양한 매체들은 이 작품의 텍스트가 가진 선정성을 문제 삼았다. 예를 들어 이 곡의 아뉴스데이악장에서는 어린이 합창단이 “Mary has a little lamb”이라는 가사에 이어서 “Mary was a little whore”이라고 노래 부른다. 또한 디스 이레악장에서는 소프라노가 2차 대전의 잔악성을 설명하며 강간 장면을 묘사한다. 이 작품은 표현상에 있어서 너무 진부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샌드스트롬이 집중했던 것은 가사가 가진 감정적 임팩트를 음악적으로 강화하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음악학자 룬드베리(Camilla Lundberg)는 이 작품을 샌드스트롬의 음악 여정에서 일종의 터닝 포인트로 본다. 영감의 원천으로 텍스트를 사용하는 것, 음악의 구조적 측면을 넘어서서 음악의 직접적인 표현성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 그리고 모더니즘에서 벗어난다는 측면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은 그가 하나의 작품 안에 다양한 작곡 스타일을 사용한 폴리스타일리스틱한(Polystylistic) 곡이며, 이런 스타일적인 다원성은 앞으로 그의 다양한 대편성 작품에서 발견된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이 작품은 1984년 그에게 “the Nordic Council Music Prize”를 안겨줬고, 오늘날에는 스웨덴 20세기 음악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간주된다.

 

1980년대

1980년대에 들어선 샌드스트롬은 그의 다작 성향 안에서 다양한 편성의 곡을 선보인다. 이 시기 샌드스트롬은 실내악, 솔로 콘체르토, 오케스트라 음악, 합창곡, 발레 음악, 오페라 등을 작곡했으며 1985년부터 왕립 음악원에서 북트(Gunnar Bucht)와 리드호름(Ingvar Lidholm)의 뒤를 이어 작곡 교수가 된다.

샌드스트롬의 1980년대 작곡 성향은 신낭만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브루만(Per Broman)은 이 시기 샌드스트롬의 음악에 대해 인공적인 낭만주의’(artificial romanticism)라는 말을 사용한다. 샌드스트롬의 음악이 낭만주의 화음과 진행을 사용하지만 전형적인 낭만주의 화성어법은 따르지 않으며, 독특한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1980년대 초반 샌드스트롬의 음악은 점점 더 직접적인 표현성과 표현의 단순성을 드러낸다. 한 예로 그가 1980년에 작곡한 합창곡 <아뉴스데이>(Agnus Dei, 1980)<En ny himmel och en ny jord>(A New Heaven and a New Earth)는 이즈음 샌드스트롬 음악의 단순화 경향과 접근가능성이라는 측면을 잘 보여준다.

샌드스트롬이 1980년대 중반 집중한 또 한 가지는, 과거로 눈을 돌리고 과거 대가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는 것이었다. 1985년 작곡한 이중 합창단을 위한 <O sanna>(1985)에는 바로크 음악을 연상시키는 멜리스마 선율이 등장하며, 1986년에는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의 작품 <Hear My Prayer, O Lord, Z.15>의 새로운 버전인 혼성 합창을 위한 <Hear my Prayer, O Lord>(1986)를 작곡했다. 1986년 작곡한 합창곡 <Es ist genug>(1986)은 북스데후데(Dieterich Buxtehude 1637-1707)의 칸타타 <Eins bitte ich vom Herrn, BuxWV 24>의 텍스트를 이용해 작곡된 것이며 소프라노 파트에는 북스데후데의 음악이 인용된다. 1987년 작곡한 혼성 합창곡 <Etyd nr 4 som i e-moll>(1987)도 북스데후데의 작품을 기반으로 한다. 이런 다양한 노력 덕분인지 샌드스트롬은 1987“Buxtehude Award”를 받는다.

샌드스트롬은 1980년대에만 총 8개의 발레작품을 만들었으며 1970-2000년대까지 다수의 극음악, 발레, 오페라 등을 작곡했다. 이시기 샌드스트롬이 작곡한 무대 음악 중 중요한 것은 발레 음악 <Den elfte gryningen>(The Eleventh Dawn, 1988)이다. 이 작품은 20세기 발레의 클래식 레퍼토리인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의 작품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1990년대

샌드스트롬의 음악은 1990년대가 되면서 보다 조성적으로 변모하며 더욱 더 아름다워진다. 음악 어법의 전환은 초기의 무조적 음악에서부터 점진적으로 이뤄진 것이었지만, 이미 1990년의 오케스트라 곡 <Fantasia III>(1990) 같은 작품에서는 완전한 신낭만주의 어법을 드러낸다. 룬드베리(Camilla Lundberg)는 샌드스트롬의 신낭만주의 음악이 충격적일 정도로 낭만주의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시기 샌드스트롬의 음악은 비르투오시티와 쇼맨쉽을 이용해 청중을 즉각적으로 감동시키고, 청중에게 호소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확하다. 이런 측면은 샌드스트롬 초기 작품이나 동시대 다른 작곡가와 비교해 보았을 때 상당히 독특하다. 샌드스트롬은 이런 자신의 성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왜 우리는 충실한 감정을 느끼고 싶을 때 늘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로 되돌아갈까요? 모던 음악은 차갑고, 감정적인 효과 없이 미학만을 전달해야 하는 걸까요? 아마 내 생각에 우리 시대의 예술은 감정의 예술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어요. 나는 아이들 · 음악을 전혀 모르는 이들 · 우매한 청중까지도 감동시키고 싶습니다.” (1992년 룬드베리와의 인터뷰 )

1994년 또 다른 논란을 불러 온 <High Mass>(1993/94)가 작곡된다. 이 곡은 5명의 여성 솔리스트와 대편성 합창단 그리고 오케스트라로 이뤄진 대규모 작품이며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B단조 미사>(Mass in B minor BWV. 232)를 모델로 한다. 이 작품이 초래한 논란은 새로운 예술 음악의 통속화에 관한 것이었다. 스웨덴의 다양한 매체들은 이 작품에 대한 논평을 쏟아냈으며, 이 작품이 과도하게 청중 우호적이고 · -아카데미적이며 · 예술의 영역과 키치의 영역의 경계에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은 브루만(Per Broman)의 말을 빌리자면, “고귀한 예술과 대중 예술을 분리해서 유지하고자 하는 최후의 불운한 시도일 뿐이었다. 샌드스트롬은 이 곡으로 1995“Christ Johnson Grand Prize”를 타게 된다.

한편 1990년대 중반 샌드스트롬은 자신의 음악에 미니멀리즘 테크닉을 도입한다. 이 시기 그의 곡들은 작은 아이디어나 구조에 기반하며, 반복, 오스티나토, 캐논 등을 변주와 함께 사용한다. 또한 그의 음악은 대체적으로 이전보다 더 빨라진 템포를 유지하며, 리듬적으로도 훨씬 발전된 모습을 보여 준다. 그가 여전히 난해하고 빡빡한 짜임새를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전 시기에 비해서는 음정클러스터 등의 사용이 줄어들게 된다. 또한 샌드스트롬의 곡은 밝고 가벼운 음향을 갖게 되었고, 그가 초기 작품에서부터 자주 사용해 온 긴 길이의 크레센도나 아첼란도 등도 여전히 모든 곡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1990년대 말이 되면서 약간의 유머와 변덕스러움까지 갖추게 된다. 세기말에 그가 쓴 중요 작품으로는 오페라 <Staden>(1996), 오라토리오 <Moses>(1997) 그리고 그의 첫 번째 교향곡 <Symphony>(1999) 등이 있다.

 

2000년대

2000년대에 들어선 샌드스트롬은 조국을 떠나 인디애나 대학교(Indiana University Bloomington's Jacobs School of Music)의 작곡 교수가 된다. 이 시기 샌드스트롬의 음악은 대부분 종교 작품이다. 양식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폴리스타일리즘(polystylism)을 구사하며, 그가 이제껏 사용했던 다양한 기법들을 총망라한다. 또한 그의 음악은 1980-199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드라마틱하고 표현적이며, 어떤 측면으로는 고도로 구조화되어 있고 복잡하다.

종교 작품에 대한 집중은 전통그리고 다른 작곡가에 대한 관심과 어우러져 2000년대 특유의 작품 목록을 만들어냈다. 그는 2004년 대편성의 수난곡 <Ordet>(The Word, 2004)를 작곡했고, 오라토리오 <Juloratorium>(Christmas Oratorio, 2004), 칸타타 <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2008), 그리고 바로크 시대악기를 이용하는 <Magnificat>(2005) 등을 작곡했다. 헬무트 릴링(Helmuth Rilling b.1933)과 오레곤 바흐 페스티벌(the Oregon Bach Festival)이 위촉한 대편성의 <Messiah>(2008)는 우리가 잘 아는 헨델의 <메시아>(Messiah HWV 56, 1741)와 동일한 텍스트를 사용한다. 바흐의 오리지널 작품을 기반으로 하는 6개의 모텟 작품 도 중요하다. 이와 같은 일련의 활동들은 그가 1980년대에 했던 퍼셀 · 북스데후데 오마주를 잇는 것이며, <High Mass>에서 시도했던 전통과의 연결을 다시 한 번 시도하는 것이었다.

샌드스트롬은 인디애나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지 10년이 되던 2008, 교수직을 내려놓고 오랫 동안 간직해왔던 꿈을 실현시켰다. 그것은 마치 바흐처럼 교회의 모든 축일을 위해 음악을 작곡하는 것이었다. 그는 2주에 한 곡씩 성실하게 작곡했고, 이 작업은 2011년 완료됐다. 그가 말년에 소박한 성격의 작업을 꾸준하게 행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어쩌면 평생 자유로운 마음으로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음악에 솔직했던 그였기에 가능한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음악>(Christmas Music, 1992)

작품 안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반복들과 점진적인 진행들, 싱코페이션 등은 샌드스트롬이 1990년대 중반 도입했던 미니멀리즘 테크닉과 리듬적 발전 경향을 떠올리게 한다. 특정한 리듬으로 이뤄진 개별 음향 덩어리는 청자에게 수월하게 인지되며, 이것들이 서로 대조되거나 다른 덩어리로 이행하는 것도 들린다. 예를 들어 초반에 등장하는 짧은 음가로 이루어진 리듬적인 짜임새는 이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코랄풍의 음향과 대조된다. 중반에 등장하는 튜티 짜임새는 재즈적 리듬이 가미된 미니멀리즘 풍이며, 반복을 통해 서서히 발전된다. 리듬적으로 고조되던 음악은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점차 맥박이 더뎌지고, 느리고 정적인 음향으로 향한다.

 

<피아노 트리오를 위한 4개의 곡>(Four Pieces for Piano Trio, 2012)

샌드스트롬은 자신의 음악을 지속적으로 단순화시켰고, 낭만주의 음악을 떠올리는 화음을 꾸준히 사용해 왔다. 이 곡은 이와 같은 그의 경향을 전적으로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로 만들 수 있는 친밀하고 투명한 음향을 구현한다. 부드럽고 투명한 음 층(layer)6도로 짝을 지어 움직이는 소리들, 아르페지오 음형이나 익숙한 화음들, 다소 전통적인 리듬 등이 자주 등장한다. 4개의 곡으로 이뤄져 있으며 2015413일 코펜하겐(Copenhagen)“Mogens Dahl” 콘서트홀에서 트리오 콘 브리오 코펜하겐 (Trio Con Brio Copenhagen)에 의해 초연됐다.

 

 

-파안 영희 (朴-琶案 泳姬 / Younghi Pagh-Paan)

 

박영희의 음악에 다가가기 위한 첫걸음은 그녀 삶의 궤적을 살피는 것이다. 그녀는 1945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막 광복이 되었던 때였고 청주 시내는 아직 근대화되기 이전이었다. 거리에는 다양한 형태의 한국 음악이 있었다. 해금을 연주하는 사람, 정월 대보름마다 들을 수 있었던 농악, 굿 등이 그녀 어린 시절의 소리 풍경이었다. 음악을 좋아했던 건축가 아버지도 자주 언급된다. 박영희는 아버지 앞에서 자주 노래를 불렀고 아버지는 퉁소를 연주했다. 이런 경험들은 그녀의 앞으로의 작곡 여정에서 음악적으로 중요한 어떤 근원이 된다.

박영희 최초의 음악교육은 언니를 통해 어깨 너머로 배운 피아노였다. 처음에는 작곡가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서울로 유학 온 언니를 따라 서울로 거처를 옮기게 되고,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해 작곡가의 길을 걷게 된다. 박영희는 서울대에 같이 다녔던 또래와는 다르게 작곡가로서의 길을 진지하게 생각했고 서양 음악이론을 배움과 동시에 가야금같은 국악기도 배우게 된다. 당시 그녀는 활발하게 작곡 활동을 했고 대학원에도 진학했으나, 이 시기 작품 중 정식 작품 목록에 포함된 것은 1971년 쓴 <파문>(波紋) 한 작품뿐이다.

그녀 인생의 전환점은 1974년 독일 학술 교류재단(DAAD)의 장학금을 받고 떠난 독일 유학이었다. 그녀는 프라이부르크 음대(Musikhochschule Freiburg i. Br.)에서 클라우스 후버(Klaus Huber b.1924)에게 작곡을, 그리고 브라이언 퍼니호흐(Brian John Peter Ferneyhough b.1943)에게서 현대음악 분석을 배운다. 독일에서 내놓은 첫 번째 작품은 플룻 독주를 위한 <드라이잠 노래>(Dreisam-Nore, 1975)였고 두 번째 작품은 1977년 작곡한 클라리넷과 스트링 트리오를 위한 <만남>이었다. 특히 <만남>은 보스빌 작곡가 세미나(Komponistenseminar in Boswil/Schweiz)에서 1등 상을 수상했으며, 이어진 세 번째 작품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위한 <소리>(1979)는 그녀의 졸업 작품임과 동시에 1980년 도나우에싱엔 현대음악제(Donaueschinger Musiktagen)의 위촉 작품이었다. 유학을 떠난 지 7년 만에 3편의 작품으로 현대음악계에 화려하게 데뷔한 것이다.

이후 그녀는 1991년 오스트리아 그라츠(Universität für Musik und darstellende Kunst Graz)1992년 독일 칼스루에(Hochschule für Musik Karlsruhe) 대학 초빙 교수를 거쳐 1994년 브레멘 예술대학(Hochschule für Künste Bremen)에 정식 교수로 임용된다. 그녀는 그 곳에서 신음악 연구소(Atelier Neue Musik)와 전자음악 스튜디오를 이끌었고 인상적인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박영희는 다작의 작곡가는 아니며 오랜 시간 고심해 압축적이고 강렬한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음악학자 강은수는 박영희의 음악시기를 4개로 구분한다. 첫 번째 시기는 독일 이주 전 한국에서의 활동이며 두 번째 시기는 독일 이주 후 <드라이잠 노래>에서부터 <소리>까지다. 세 번째 시기는 1980-1990년대로, 이때의 박영희는 한글로 된 제목을 사용하며 사회 참여적이면서도 섬세한 스타일의 곡을 작곡한다. 마지막 네 번째 시기는 2000년 이후다. 이 시기의 박영희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작곡을 진행 중이다. ‘한국이라는 정체성이 짙게 드러났던 이전 시기와 달리, 이 마지막 시기에는 보다 보편적인 개념과 견지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이 좀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다룬다는 느낌을 준다. 그녀의 음악은 대체로 아방가르드하고 실험적인 작품으로 분류되며, 작품 자체는 굉장히 복잡한 인상을 준다. 헤테로포니 짜임새를 기반으로 하는 흐름과 그녀가 정립한 어미화음’(Mutterakorde) 체계도 독특하다. 그러나 그녀의 음악은 외적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청각적인 측면에서 청자를 강하게 몰입시키고 작품에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오늘날 국내에서 작곡가 박영희는 여성 최초 작곡과 교수로 임명된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인지 박영희는 조국으로부터 2006서울대학교 평생공로상등을 비롯한 몇몇 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주목은 박영희 음악의 본질을 바라보지 않은 채 극히 지엽적인 커리어에만 집중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럽 현대음악계에 위상을 떨친 한국 작곡가라는 타이틀도 마찬가지다. 이 타이틀은 박영희를 그보다 한 세대 위인 윤이상과 비교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박영희 특유의 음악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 윤이상과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그녀의 음악을 거칠게 독해하는 것은, 그녀 특유의 섬세하고 강렬한 울림들에 대면할 기회를 방해한다.

박영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다양하다. 다양한 학자들은 그녀의 음악에 한국’, 모성’, ‘여성’, ‘종교’, ‘’, ‘디아스포라’, ‘소외등을 통해 접근한다. 박영희를 관통하는 키워드들은 윤이상의 것들보다 훨씬 더 여성적이며 소수자적인 느낌을 준다. 이것은 박영희의 음악이 윤이상의 음악보다 다면적이고 섬세하며, 끊임없이 생성하기를 반복하고, 고여 있지 않은 투쟁의 장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가장 창조적인 모든 예술가의 작품들이 항상 불안정하고 격변하는 경계위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녀를 둘러싼 환경인 타향 · 여성 · 동양은 그녀의 예술이 꽃피는 훌륭한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플룻 독주를 위한 <드라이잠 노래>(Dreisam-Nore, 1975)

박영희가 유학생활을 했던 독일 프라이브루크(Freiburg)에는 나무가 울창한 검은 숲(Schwarzwald)이 있고 이곳에서 발원해 시 외곽으로 흘러나가는 작은 강이 있다. 이 강의 이름이 드라이잠’(Dreisam River)이다. 박영희는 이 강을 떠올리며 음악을 만들었고, 순 우리말 단어인 노래’(Nore)를 더해 <드라이잠 노래>라 이름 붙였다. 그녀는 유유히 흐르는 강이 그 쉼 없는 움직임 안에 생동감을 담고 있으며, 지속적이고 잔잔하게 흐르는 수면은 보는 이에게 고요와 안정을 준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자연의 모습이 곡 안에 그려진다.

작품을 구성하는 음 재료는 12음렬이며, 이 곡의 악보 전반을 메우고 있는 것은 플롯 독주로 구사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특수주법들이다. 그러나 정작 곡이 시작되면 곡을 구성하는 재료들은 의식(意識)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곡 안에서 ‘12음렬은 모든 소리를 오롯이 흐르게 하는 도구로만 사용되며, 특수주법들은 마치 정교한 빛 조각을 하나하나 꿰어 만든 만화경처럼, 곱고 세밀한 반짝거림을 구성한다. 찰나에 수천 갈래로 반짝거리는 강 풍경, 자연의 찬연(燦然)함이 소리로 구현된다. 그녀가 일렁이는 강 표면을 보고 아주 짧은 순간에 느꼈을 감정이, 짐짓 긴 시간 안에 흐른다. 착상과 작업이 고도의 집중력을 요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는 별개로 소리로 구현되는 작품은 정말 아름답다.

 

스튜디오2021, (2015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