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서주리Juri Seo [비평과 해석사이] 시리즈 중
서주리(1981-)는 연세대학교 작곡과에서 학사,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서 활동하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클래식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고전적이면서도 혁신적인 기법을 두루 사용하는 다양한 편성의 작품을 선보인다. 구겐하임 펠로우십, 고다드 리버슨 펠로우십을 비롯한 다수의 펠로우십에 선정되었으며, 탱글우드, 뱅온어캔,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 페스티벌, 웰즐리 컴포저스 컨퍼런스, 애틀랜틱 센터 포 더 아트에서 작곡 펠로우로 활동했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쿠세비츠키 재단, 하버드의 프롬 재단, 발로우 인다우먼트, 탱글우드 음악센터를 위한 위촉 작품을 썼으며, 이노바 레코드(Innova Recordings)에서 음반 ‘모스틀리 피아노’(2017)와 ‘레스피리’(2019)를 발매했다. 현재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두 개의 축
서주리는 조성의 세계 안에 함몰되거나 비조성의 세계에서만 고군분투하기보다는, 이것 모두를 ‘밖에서’ 조망하고 다룬다. 이런 태도는 과거 음악으로부터 적절한 거리감이 형성된 21세기 작곡가의 동시대성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특히 서주리의 작품 안에서는 이것이 폴리스타일(poly-style)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서주리의 폴리스타일은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두 가지 축에 의해 작동한다. 첫 번째는 각기 다른 음악사 시기를 넘나드는 ‘시간축’이다. 다양한 시대의 음악언어를 응축한 형식이나 양식이 여러 작품 안에, 혹은 한 작품 안에 등장한다. 두 번째 축은 음악적 ‘공간’에 관한 것으로서, 음향이나 음군, 리듬 등을 두 가지 층위로 구분하고 이 둘을 교묘하게 넘나드는 데에서 비롯된다.
시간들
특정 시기의 음악을 ‘물화’시켜 그저 음형이나 선율 자투리로 활용하는 수많은 작곡가가 존재한다. 하지만 서주리는 이들과 분명히 구분된다. 서주리는 인용의 대상, 즉 ‘과거’를 타자화하고 거리를 두는 대신, 이를 ‘자기화’하여 근거리에서 구현한다. 더 나아가 서주리는 다양한 시대의 형식이나 양식 등에서 취할 부분, 비틀 부분, 새롭게 작곡가의 악상을 전개시킬 부분 등을 보다 정교하게 고민한다. 이런 방식으로 서주리의 작품 안에는 ‘과거의 시간’이 고유의 컨텍스트로 소환되며, 그 안에 존재하는 음 진행의 가장 원초적인 원리를 드러낸다. 이를테면 <셋>(Three for Piano, Percussion & Bass, 2015)에는 재즈라는 양식이 긴장감을 다루고 프레이즈를 전개하는 모습은 물론 성부가 쌓이고 중첩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특유의 에너지와 즐거움이 담겨있다. 동시에 이 음악에는 낭만주의 피아노 협주곡이 주는 달콤하고도 벅찬 느낌을 ‘잘 아는’ 이만이 구사할 수 있는 섹션이 공존한다.
서주리의 일부 곡에서는 특정 시기에 작곡된 앙상블의 음향적 형태가 소환되기도 한다. 14세기의 ‘롱도’ 형식을 테마로 하는 <롱도, 오스티나토 그리고 판타지아>(Rondeau, Ostinato and Fantasia for Sextet, 2018)의 첫 악장에서 선법 위주의 선율과 반복이 하프시코드 음향으로 제시되는 것이 그 예다. 이처럼 서주리의 폴리스타일은 수많은 음악 형식에 대한 심도 높은 이해가 바탕이 된 것으로, 매 순간의 수직적 음정과 선율 진행에 대한 수공예적인 작업 없이는 구현하기 힘든 것이다. 이는 서주리의 음악 안에서 다양한 형식과 양식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존중의 태도’를 느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간들
B음과 C음 사이에는 수많은 주파수가 존재하듯, 자연 상태의 소리 및 리듬은 연속적이며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서양음악은 이를 자르고 계량화하여 이산된(discrete) 음정과 리듬을 만들어왔던 터, 분할리듬 체계와 열두 반음을 재료로 그 음악사를 구성해왔다. 서주리의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서양음악의 ‘이산 공간’에서 비롯된 음들 뿐 아니라 ‘연결 공간’으로 명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소리들을 구분하고, 이 둘을 함께 운용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소리새>(Songbird for String Sextet, 2020-2021)에서처럼 외부세계에 대한 인상이나 ‘자연’을 그리는 작품에서는 미분음이 주로 활용되며, ‘음악의 역사’ 안으로 파고드는 <대위적 형식>(2019)과 같은 작품에서는 ‘이산된’ 열두반음과 리듬이 전면에 배치된다. 마치 ‘생명체가 사는 자연’과 ‘음악이 거하는 추상적 공간’이 다른 것처럼, 전자는 미분음과 소음의 세계로 그리고 후자는 이산적인 음향 공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외에도 <셋>과 같은 곡에서는 재지한(jazzy)한 리듬을 능숙하게 다루는데, 그 안에는 비정형적인 리듬 요소인 ‘그루브’가 존재함으로써 박자와 박자 사이의 연결된 시간을 건드린다.
인상적인 것은 이 두 공간이 하나의 작품 안에서 등장할 때다. 이 경우 두 공간을 ‘넘는’ 순간의 감각이 탁월하게 음악화되며, 이는 작품의 전개나 구조 등에서 중요한 지점으로 부각된다. 이를테면 <대위적 형식>에서는 ‘조성의 영역’과 ‘미분음의 영역’으로 음 공간이 구분되는데, 청자가 이 두 경계의 ‘넘나듦’을 인지할 때 음악적 긴장감이 생성된다. 또한 곡의 시작은 ‘조성’이었지만, 클라이맥스는 ‘조성 밖의 소리’에서 생성되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육중주를 위한 <대위적 형식>(Contrapuntal Forms for Sextet, 2019)
완전히 새로운 음악적 세계를 창조하는 방법
서주리의 육중주를 위한 <대위적 형식>은 하버드 대학교의 프롬 뮤직 파운데이션이 위촉한 작품으로 2019년 10월 15일 뉴저지주 프린스턴의 타플린 오디토리움에서 ‘Latitude49’에 의해 초연되었다. 피아노/키보드, 타악기, 클라리넷, 색소폰, 바이올린, 첼로로 구성된 육중주 편성으로 2018년 작곡된 <롱도, 오스티나토 그리고 판타지아>와 일종의 시리즈를 이룬다. 1악장에는 ‘푸가’, 2악장에는 ‘정선율’, 3악장에는 ‘캐논’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1악장에서는 ‘푸가’의 구성요소인 주제와 응답, 대주제, 에피소드 등이 개별적인 프레이즈로 뚜렷하게 제시되며, 피아노와 세트드럼은 재즈적 짜임새를 구사한다. 각기 다른 음가의 조합으로 이뤄진 몇 개의 리듬패턴이 각 성부를 구성하고 이들이 중첩되어 활발한 짜임새의 ‘폴리리듬’을 만드는 점도 눈에 띈다. 악장 내내 프레이즈·리듬·섹션 등의 도입과 끝을 귀로 명확히 인지하며 주제 선율을 흥얼거릴 수 있는데, 어느 순간 이것이 ‘푸가’의 속성인지 ‘재즈’의 속성인지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이 있다. 이런 경험은 결국 청취의 즐거움을 만들어낸다.
2악장 ‘정선율’에서는 중세 최초의 여성작곡가 힐데가르드 폰 빙엔의 성가 “오 피의 붉음이여(O rubor sanguinis)”가 주제선율로 등장한다. 곡 초반에는 베이스 클라리넷이 이 선율을 긴 호흡으로 연주하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첼로와 바리톤색소폰에서도 등장한다. 테마로 사용된 이 선율은 라단조 음계 상의 1음과 5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음향의 후면에는 D음과 A음이 페달포인트로 나온다. 따라서 곡 전체는 ‘확실한’ 라단조 조성 안에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확실한 조 영역에 대비되는 ‘불확실한’ 영역의 소리들이 나타날 때다.
이를테면 타악기 크로탈은 라단조 음계에 포함되지 않은 음을 마치 빛이 어른거리는 듯한 고음의 묘한 울림으로 들려준다. 한편 첼로는 더블스탑으로 라단조의 1음과 5음을 길게 끌어 주다가, 종지 지점에 이르면 이 5도 음정을 미세하게 비튼다. 즉 현을 4분의 1음 만큼 당겨 미분음 상에서 5도 음정을 만들어내고, 이를 글리산도를 통해 다시 라단조 상의 1음과 5음으로 복귀시킨다. 이 움직임은 표면적으로는 중세의 이중이끈음(double leading tone) 관습을 구현한 것이겠지만, 그보다 선행하는 음악의 가장 오래된 진행원리, 즉 하나의 소리가 본래 거했던 자리를 찾아가고자 하는 움직임을 들러준다. 첼로의 묵직한 미분음은 그 자체로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기에, 상상 속 중세 성가의 낯섦을 직관적으로 제시하는 효과도 있다.
어느 정도 작품이 진행되면 라단조 위에서 지속음을 연주하던 키보드가 조율을 달리한다. ‘BitKlavier’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미분음 단위의 새로운 스케일을 장착하는 것이다. 특히 기존의 평균율 체계에서 벗어나 키보드가 미분음을 ‘화음’ 단위로 최초로 들려줄 때에는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으로 넘어가는 듯한 감각이 압도적이다. 이후 모든 악기가 중단되고 키보드 독주만 남는데, 그제서 이 악장의 중심선율인 “오 피의 붉음이여”가 그리는 풍경이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미분음의 소리뭉치가 기이하면서도 강렬한 에너지를 풍기고, 이는 그 자체로 영성(靈性)의 현현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게 힐데가르드의 성가 안에 그려진 ‘신’을 비롯하여 ‘붉은 피’와 ‘뱀’과 같은 것들이 소리의 형태로 청중을 둘러싸는 것 같다.
3악장에서는 다채로운 짜임새가 교체되며 과거의 여러 음악적 공간에 차례로 접속한다. 이를테면 선법 위주의 섹션에서는 르네상스 음악의 기시감이, ‘메노 모쏘’(Meno mosso) 부분에서는 전원적인 뉘앙스가, 또 다른 섹션에서는 중세 작곡가 패로탱(Pérotin)의 오르가눔이 연상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음악 양식들이 과거의 것임과 동시에, 완전히 새롭게 직조되었다는 감각을 늘 동반한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직조는 곡 전반에 나타나는 음정·음향 요소에 대한 섬세한 수직적 통제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이는 ‘대위’라는 오래된 규칙이 본질적으로 의도했던 것이다. 그렇게 수공예적으로 단단히 박혀져 무엇 하나 버릴 것 없는 <대위적 형식>의 모든 음표들은 불협화와 협화, 긴장과 이완, 신과 인간의 공간을 넘나들며 소리를 내고, 결국은 완전히 새로운 음악적 세계를 창조하게 된다.
작곡가 서주리와의 대화 2023년 7월 22일 오전 6시(한국시간) 줌 화상인터뷰
이민희: 과거의 형식을 가져와 쓰는 경우는 많지만 <대위적 형식>처럼 명쾌하게 모든 프레이즈와 형식을 구성하는 각각의 요소가 온전히 귀로 인지되는 곡은 흔하지 않습니다. 대중성과는 결이 다른 ‘청취가능성’ 혹은 귀로 바로 이해할 수 있는 프로세스(audible process)에 대해서 남다른 고민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서주리: 중요한 질문인거 같아요. 제 생각에, 작곡가들은 본인이 자의적으로 ‘관습’을 만들어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중 입장에서는 전혀 모르는 진행이나 효과인데, 작곡가들은 자기가 이것을 사용했으니 청중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작곡가가 어떤 의도를 갖고 곡을 썼다고 해서 듣는 사람이 이것을 전부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저는 항상 사람들이 ‘어떻게’ 듣는지를 주의 깊게 생각합니다. 기존의 음악 관습을 바탕으로 하되, 청취가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곡을 씁니다. 이것은 제가 음악 안의 컨텍스트와 그 안에서 대위법을 다루는 것과도 관련이 있어요. 이를테면 재즈화성이나 스펙트럴 구조에 기반한 음악 안에서는 증4도나 장9도와 같은 음정은 보통 협화음으로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점을 바탕으로 확장시키는 거예요. 사실상 대위법이라는 것이 음악 안에서 ‘협화음’과 ‘불협화음’을 설정하고 곡을 쓰는 작법이기에, 실제로 곡 안에서 인지되는 ‘협화’와 ‘불협화’가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고민합니다.
이민희: 대위법이 일상적이었던 르네상스 혹은 바로크 음악보다 <대위적 형식>에서 '대위법'이라는 테크닉의 강점과 그 특성을 더 잘 엿볼 수 있는 느낌입니다. 바흐나 팔레스트리나가 고민했던 대위법에 비교해, 본인이 다루는 ‘대위법’이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서주리: 21세기에는 과거가 16세기든 19세기든 차이가 없이 다 접속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 대위법이란 것이 어떤 시대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대위법은 그냥 대위법이 아니라 메타대위법인 것 같습니다. 저는 양식적 담화(stylistic discourse)에 관심이 있어요. <대위적 형식>의 ‘푸가’ 악장에서도 재즈화성과 같은 것은 20세기 양식이지만, 뒤쪽에는 18세기 양식으로 된 섹션도 있거든요. 갑자기 18세기의 모차르트 대위법처럼 바뀌었다가 재즈로 돌아오는, 말하자면 ‘세기’의 관습에 대한 담론을 만들 수 있는 거죠. 16세기 대위법에 미분음을 가미한다든지, 악기법을 다르게 한다든지, 이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실험을 시도합니다.
결국 저도 무언가 일관된 그런 언어를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여기는 16세기 여기는 18세기 이렇게 하는 것 말고요. 말하자면 ‘21세기 대위법’이란 것이 있을까요? 저도 그것이 궁금합니다.
이민희: <대위적 형식> 안에서 유독 몇몇 음향적 순간들이 아주 매혹적입니다. 이를테면 크로탈로 만든 고음이 앙상블과 함께 울릴 때, 혹은 미분음정이 다시 평균율에 기반한 음정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하는 순간 등. 궁금한 점은 앙상블의 ‘결과로서’ 관객을 만나는 ‘전체 음향’의 형태에 대해 미리 상상하시는지요? 수직적이고도 음향적인 전체 사운드에 대한 계획은 어떤 방식으로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서주리: 저는 활용가능한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곡을 쓰며, 항상 전체적인 음향에 대해 생각합니다. 다만 음향에 관한 디자인은 대위법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행합니다. 대위법의 경우 음정에 기반한 불협화나 텐션이 존재하지만, 이걸 음정이 아닌 소리로, 이를테면 배음을 불협화로 쓴다든지, 음색 같은 것의 수직적 배합을 특정 방식으로 한다든지 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어요. 예컨대 음정이나 화성 뿐 아니라 ‘음향’이나 ‘음색’적인 요소도 충분히 대위법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협화와 불협화를 조절하는 것처럼 음향적인 측면에서도 안정적인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를 조절하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하나의 톤이라도 그것을 피아노로 연주했을 때는 협화로 들렸다면, 타악기로 했을 때에는 불협에 가깝게 들릴 수도 있어요. 이런 것들을 모두 고려합니다. 또한 저는 ‘경계’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는데, 화음과 소음의 경계, 자연배음의 스펙트럼 그 사이의 공간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민희: <소리새>, <무한한 계절>(String Quartet - ‘Infinite Season,’ 2017-2018)처럼 외부의 풍경이나 인상을 그리며 미분음을 전면에 드러내고, 음색 그 자체를 음미할 만한 사색적인 작업들과 <대위적 형식>은 어느 정도 스타일이나 구조상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또한 전자의 경우에는 ‘재지한’ 리듬이 등장하지 않지만, 후자에는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고, 전자는 주로 수직적인 음향의 구성에 후자는 수평적인 리듬의 흐름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주리 작품의 일부를 전자로, 또 음악의 일부를 후자로 나누어서 생각해도 될까요?
서주리: 제 곡의 유형이 두 부류로 딱 나뉜다기보다는 이 다양한 것을 하나의 작품 안에서도 자유롭게 다 구사하는 것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음악은 휴머니티의 모든 요소를 다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서정적이고 섬세한 면이 있지만 동시에 격렬하고, 투박하고, 절제되지 않는 상반된 부분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베토벤을 제일 좋아해요. 제 모델이에요. 정말 웃기는 곳도 있고, 빠르고 느리고 모든 대조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토벤은 이런 것을 여러 악장에 걸쳐서 했습니다. 저 역시 다양한 요소를 음악으로 전부 표현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곡 안에서, 특히 긴 곡의 경우에는 말씀하신 두 가지의 방향을 다 포함하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 이런 다양한 제 음악의 측면을 전부 곡에 포함하려면 약간의 길이가 필요합니다. 짧은 곡에서 시도하려고 하면 무언가 좀 어색한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제 <피아노 소나타 1번 ‘La Hammerklavier’>(2015-2016)도 30분 정도인데, 그 안에 모든 요소가 다 나옵니다. <장난감 가게>(Toy Store for Violin and Electronics, 2022)는 폭력적인 느낌으로 시작하지만 곡의 마지막 15분은 서정적입니다. 제 생각에는 이렇게 한곡에서 완전히 다른 표현을 총괄한다는 게 특별한 것 같아요. 거의 서양 음악의 핵심적인 원칙이 전부 작동한다고나 할까요?
이민희: ‘서주리’ 하면 청중이 기억할만한, 트레이드마크 같은 음향·화성진행·특정 선율형태 같은 것이 있을까요?
서주리: 저는 스스로 맥시멀리스트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하나를 꼽기가 쉽지 않은데, 음악이 전개되는 방식이 좀 독특한 것 같아요. 한 곡 안에서도 약간 예측불가능한 흐름이 많이 나오거든요. 또한 제 음악은 클래식 음악의 ‘관습’에 기반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펙트럴 음악과 재즈가 많이 중요합니다. ‘유머’와 같은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것 같고요.
이민희: 대위법 등 과거의 양식을 비롯하여 옛 음악을 가져와 사용하는 현대음악 작곡가는 수 없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서 서주리만의 구별되는 지점에 대해 말씀 부탁드립니다.
서주리: 첫째로, 제가 하는 접근방식과 다르게 낸캐로우(C. Nancarrow)나 리케티(G. Ligeti) 등의 작곡가가 구사하는 대위법은 수직적인 소리의 울림에 대한 매 순간의 통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저는 대위법의 중심이 ‘매 순간에 대한 통제’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니콜라스 벌지(Nicolas Berge)와 같은 작곡가의 작품이나 베리오(L. Berio)의 <신포니아>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이와 같은 소위 ‘유러피안 모더니스트’가 행하는 과거의 음악을 다루는 방식 또한 저와는 거리가 멉니다. 이들은 과거의 음악을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재구성하고, 이 과정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를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저는 이들에 비해 과거의 음악과 굉장히 가깝다고나 할까요? 과거 음악과의 ‘거리’가 다릅니다. 과거의 음악과 보다 ‘근거리’에 있으며, 친근함을 유지합니다.
물론 저도 15년 전에는 그렇게 ‘아이러니’적인 요소를 갖고 과거의 음악을 작품 안에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물론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저는 이제 이런 아이러니를 줄이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저는 아이러니와 시간적 대립을 초월해, 과거의 음악을 완전히 소화시켜 이에 기반한 일관성 있는 새로운 음악언어를 찾는 것이 목표입니다.
글 이민희 음악평론가, "서주리, 육중주를 위한 〈대위적 형식〉", 『문화융합: 소통과 공명의 합』, 서울: 모노폴리, 2023.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