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 작곡발표회 (2021.12.13. 일신홀)

2021. 12. 28. 17:47

작품세계

화려하고 강렬한 표면, 깊고 어스름한 내면

  

작곡가 박정은(1986-)의 작품은 강렬한 추동력을 가지고 화려하게 흐르는 독특한 사운드가 특징으로서, 현재 한국의 젊은 작곡가 중에서도 손꼽히는 아방가르드 음향의 직조자다. 이런 음악세계는 그녀가 좋아하는 바슐라르(G. Bachelard, 1884-1962)의 표현, 젊고 생기발랄한 처녀처럼 에너지를 뿜어내는 살아서 질주하는 생명체를 연상시킨다. 따라서 그의 음악을 처음 접한 많은 이들은 강렬하고 화려한 총천연의 사운드에 압도당하는 경험을 한다.

다만 박정은의 음악세계는 아직 젊고 뜨거운 작곡가의 현재와 그 성향을 반영하고 있기에, 미래의 음악이 어떻게 변모할지는 짐작하기 어려우며,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작곡의 여정 또한 현재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구조와 직관 사이, 늘 중요했던 음향

박정은은 한때 음향보다는 구조에 천착했던 때가 있었으며, 여러 가지 규칙을 조합하며 긴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는 하나의 음악을 만들기에 앞서, 규칙의 설계에 들이는 시간이 가장 길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와 같이 사전 작업으로 음향의 얼개를 촘촘하게 엮어 나갈 때에도, 결국 이 모든 과정이 귀에 들리는 음향 덩어리를 구축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규칙의 얽힘은, 결과적으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소리를 작곡가 앞에 가져와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곡가는 독일에서의 유학생활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리 그 자체와 마주하는 훈련을 하게 된다. 하나의 악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소리내보고 악기를 바꾸거나 변형시키기도 하며, 기존에 본 적 없는 앙상블을 만들면서 본인이 원하는 소리가 무엇인지 반복적으로 만들어 본 것이다. 이런 시도는 락헨만(H. Lachenmann, 1935-)기악구체음악등으로 자주 언급되는 아방가르드 그 너머에서 시작하며, 일반적인 현대음악회장에서 볼 수 있는 듣기 싫은 소리의 범주를 가뿐히 넘어선다. 예컨대 박정은은 그 누구보다도 섬세하게 작동하는 소리의 감식안을 발달시키게 되었으며, 악기의 음향에서부터 악기에서 기대한 적이 없던 음향, 악기가 아닌 것의 음향 전부를 음악의 범주 안에서 사고하게 된다. 이 시기의 곡으로 <필연>(2015)이 있으며,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 쓴 것이지만 <얼룩진 잔향들>(2019) 역시 이런 작법이 지배적으로 드러나는 곡이다.

귀국 이후 박정은은 여전히 소리를 고민하되, 소리 안으로만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통해세상과 이웃을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오늘 연주회에서 초연될 <소외>는 최근 이슈로 자주 등장하는 번아웃을 작곡가만의 방식으로 다루고 있으며, <깊은 심심함>에서는 멀티태스킹이라는 독특한 상태를 음악으로 고민한다. 해당 작품 안에는 작곡가가 경험한 동시대의 일상, 속도, 현대인의 반복되는 고민들이 형상화되어있기에, 객석의 청중들 또한 순수한 음향 안에서 동시대를 사유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한 음향의 깊은 곳

박정은의 작품에서는 악기는 물론 그 출처를 알기 힘든 다양한 물체들이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소리를 내며, 그 안에 전자음향이 섞이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더 나아가 이제 박정은은 무대 위에 설치 작품이나 무용수들, 영상 등을 마치 음소재를 탐색하고 섞었던 것처럼 도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상과 퍼포먼스의 결합을 비롯한 기이한 시각적 도상이 만들어내는 원초적인 그로테스크함이 지난 2020년의 독주회에서 부각됐다면, 이번 공연에서는 보다 앙상블적인 면에 집중하되 악기 본연의 다채로움에 접근한다. 특히 한명의 타악기 주자를 위한 <깊은 심심함>에서는 타악기라는 신비로운 영역을 다루는 작곡가의 독특한 시도를 엿볼 수 있으며, 아쟁과 아코디언을 포함하는 <그때, 그 공기들에 대하여>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악기조합이 만들어내는 생경한 음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작품들은 작곡가의 말을 빌리자면 꼭 음악일 필요가 없는화려한 진동체로 무대 위에 존재함으로써, 가장 최신의 음악을 접하고 싶어하는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것이다.

박정은의 음악은 음향적으로는 절뚝거리는 듯한 강력한 펄스가 수평으로 쭉 흐르되, 이는 다소 폭력적인 느낌을 주는 강한 아티큘레이션의 튜티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수직적으로 결합되는 소리들은 각 악기에서 낼 수 있는 독특한 소리를 조합하되, 이것은 서로 엇갈리고, 때로는 성부마다 맹렬히 각자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이와 같은 소리의 조합은 날것의 정서를 갖고 있는데, 이 안에서 작곡가 특유의 음향적 화려함이 배어 나온다.

다만 이와 같은 화려한 표피를 지나, 그 깊은 곳에는 작곡가의 예민함과 다소 고립된 듯한 정서가 감지된다. 이와 같은 내면의 우울은 아마도 그의 유학시절 작품인 <알터 에고>(2013)를 비롯하여, 그녀의 작품 안에 자주 등장하는 개인적인 진술이나 삶과 사람을 다루는 모티브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또한 박정은의 음악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로서, 적어도 이와 같은 정서를 포함하고 있기에 그의 음악 표면이 더 강렬한 모습으로 타인에게 도전적인 형태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성실한 작업의 결과물

이번 음악회는 2020년에 이어 두 번째로 준비한 개인작품발표회로서, 박정은의 신작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특히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소외>, 한 명의 타악기주자를 위한 <깊은 심심함>, 아쟁, 아코디언, 피아노를 위한 <그 때, 그 공기들에 대하여>를 세계초연한다. 이 작품들은 작년의 퍼포먼스적인 작품발표회에 비해 보다 소리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앙상블 위주의 작업들로서, 박정은의 최근 음향적음악적 관심사를 엿볼 수 있다. 이외에도 2021년 작품인 피아노 독주를 위한 <몸짓들>을 재연하며, 여러 번 관객을 만나 깊은 인상을 주었던 플롯, 클라리넷,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얼룩진 잔향들>을 개작 연주한다.

이러한 작업들은 박정은의 음향에 대한 꾸준한 호기심과 성실함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박정은은 결국 사는 것작품을 쓰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기에, 좋은 음악은 좋은 삶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작곡가란 겉으로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상은 그 어떤 직업보다 자기 규율이 엄격해야 지속가능한 것 같습니다. 회사에 출퇴근하듯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작업을 하고 삶의 리듬을 확보하고 지켜가려고 노력합니다. 무엇이 좋은(Good) 걸까? 라는 고민을 오랫동안 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살며 작업을 했을 때 만족하는 결과물을 마주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제 작업이 끊임없는 수정의 과정과 함께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음악은 본질적으로 구조적인 것이기도 하기에, 완벽함과 객관성을 위해 스스로가 만족할 때까지 수정하고 또 수정합니다. 직관적으로 시작을 하나, 필요에 따라 내적인 필연성으로 합리적인 숙고의 과정들을 거치는 거죠. 그렇게 순수한 형식적 아름다움을 또한 추구하게 됩니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처럼 젊은 작곡가의 삶과 인생의 결과물이, 오늘 연주될 작곡발표회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글 이민희 음악평론가 『한국창작음악 비평과 해석사이 004 - 성악곡: 음유와 서정의 화박정은 작곡가의 음악세계에 대한 글을 바탕으로 작성 (2021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