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ute and Strings (2021. 11. 19. 페리지홀)

2021. 12. 27. 20:00

플루트와 현악기를 위한 다섯 개의 에피그램Five Epigrams for Flute and Strings

윤혜리 Fl. Nicholas Kitchen Vn. 김다미 Vn. 이한나 Va. Yeesun Kim Vc. 

에피그램은 인류가 남긴 가장 오래된 문학 장르 중 하나로, 돌에 새겨진 짧고 간결한 형태의 글귀를 의미한다. 로마시대 카툴루스(Catulle)와 마르티알리스(Martial)의 라틴어 시들이, 그리고 시대를 건너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e)와 보를레르(Baudelaire)의 독특한 시들이 에피그램으로 불린다. 이 안에서 에피그램이란 촌철살인의 내용을 담고 있는 풍자적인 성격의, 그리고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무게감을 갖는 글귀로 간주되었으며, 압축적이며 명확한 구도를 띈, 특히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일련의 시 모음을 일컫게 되었다.

플루트와 현악기를 위한 다섯 개의 에피그램이라는 타이틀로 준비된 이번 음악회도 마찬가지다. 플루트를 중심에 둔 삼중주, 사중주, 오중주가 연주될 예정이며, ‘에피그램이라는 구도 아래에서 각기 다른 성격의 매혹적인 음악이 관객을 만날 계획이다. 음악회를 여는 레거(Reger)의 작품은 플루트, 바이올린, 비올라의 투명한 삼중주 짜임새로 세레나데라는 장르의 본질을 각인시켜주며, 비치(Beach) 주제와 변주곡 20세기 초의 여성작곡가가 남긴 잘 알려지지 않은 수작으로, 독특한 형태로 플루트와 현악사중주를 운용한다. 한편 프로코피예프의(Prokofiev)의 현악사중주 카바르디니안은 그의 작품 중 드물게 민족주의적 색채가 전면에 드러나는 곡으로서, 페리지홀이 준비한 ‘Russian Seasons’을 관통하며 묵직한 울림을 들려줄 것이다.

드뷔시(Debussy) 여섯 개의 고대 비문은 이번 음악회의 타이틀이기도 한 에피그램을 드뷔시의 상상력 안에서 풀어낸 작품이다. 특유의 화성과 성부진행은 물론 태고의 신비함을 쫓는 듯한 인상주의 풍 음향이 특징적이며, 악장마다 펼쳐지는 각기 다른 풍경이 귀를 사로잡는다. 한편 이어지는 플루트 오중주는 밝고 따뜻한 작품으로 대중에게 사랑을 받아온 작곡가 블레이크(Blake)가 자신의 장기를 발휘해 아름답고 부드러운 선율과 화성을 보여주는 곡이다.

무엇보다도 이날 연주될 레거와 비치, 그리고 드뷔시의 곡은 모두 1914-16년 사이에 작곡된 것들로, 동시대의 천재들이 만들어낸 각기 다른 작품을 대면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한편 프로코피예프와 블레이크의 작품은 이보다는 더 최근인 20세기 중반과 후반의 곡으로서, 20세기의 실내악 레퍼토리 중 가장 작품성과 아름다움이 가장 빼어난 것들이다. 이러한 작품이 모여 다섯 개의 에피그램을 만들 이번 음악회는, 러시아의 색채를 뿜어내는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국적과 시대의 곡들이 저마다의 메시지를 전달하며 간결하고도 명료한 에너지를 전달할 예정이다.

 

막스 레거 (Max Reger, 1873-1916)

플루트, 바이올린, 비올라를 위한 세레나데Serenade for Flute, Violin and Viola Op. 141a (1915)

레거의 생애 최후반부에 작곡된 곡으로서, 낮은 음역의 악기가 생략된 채 플루트, 바이올린, 비올라 앙상블이 밝은 톤으로 진행하는 세레나데다. 레거가 오랜 시간 일했던 라이프치히와 마이닝겐에서의 직책을 모두 내려놓고 예나로 거처를 옮긴 후에 완성된 곡으로서, 그의 음악이 너무나 진지하고 어둡다고 불평하는 많은 이들에게 모차르트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키는 밝음과 경쾌함을 들려준다. 특히 음악형식에 정통했던 레거가 세레나데라는 장르의 본질을 고민했으며 이를 다소 새로운 방식으로, 동시에 그 본질을 지킨 채 부활시킨 작품으로 평가된다. 보통 레거의 음악은 푸가나 형식을 다루는 능수능란함 때문에 딱딱하고 학문적일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비바체로 시작하는 빠른 1악장은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고 가벼운 무드로 달리는 듯한 제스쳐를 보여주며, 2악장에서는 고요하며 때로는 장난스러운 느낌을 준다. 3악장 프레스토에서는 레거의 특기인 대위법적인 패시지가 잠시 등장하지만, 이는 악기 세 대의 어울림을 강조하는 느낌으로서 세레나데라는 음악 전체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다.

 

에이미 비치 (Amy Beach, 1867-1944)

주제와 변주곡Theme and Variations, Op. 80 for Flute and String Quartet (1916)

후기 낭만주의 양식으로 작곡된 변주곡으로, 라흐마니노프와 브람스, 그리그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아름답고 섬세한 화성과 선율 진행이 인상적이다. 특히 곡 안에는 라벨의 현악사중주를 꼭 빼닮은 부분이 나오기도, 심지어 첫 번째 변주에 등장하는 9/8박자의 선율은 드뷔시가 작곡한 목신의 오후 전주곡속 플루트 선율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와 같은 다양한 작품에 대한 기시감은, 비치가 미국작곡가라는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제2뉴잉글랜드 악파의 일원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이 악파는 비옥하게 발전했던 유럽의 음악을 재료로 삼아 미국 특유의 음악을 발전시켰고, 비치는 이 중에서도 가장 어린 나이의 작곡가로서 재기발랄한 작품은 물론 묵직한 대작을 다수 남겼다. 특히 비치는 후기 낭만주의 어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천재로서, 그녀의 비범한 작곡능력이 이 작품 안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느리고 표현적인 주제가 제시된 후 총 여섯 개의 변주가 뒤따르며, 두 번째 변주의 폴리포니 구조, 세 번째 변주의 느린 왈츠,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변주가 보여주는 다채로움과 강렬한 표현력이 빼어난 곡이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Sergei Prokofiev, 1891-1953)

현악사중주 2카바르디니안String Quartet No. 2, Op. 92 “Kabardinian” (1942)

프로코피예프가 남긴 두 곡의 현악사중주 중 하나로, ‘카바르디니안민속선율의 화성과 리듬에 기반을 두고 작곡되었다. 프로코피예프는 19412차 세계대전 중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소련의 카바르디노발카르(Kabardino-Balker) 자치공화국의 수도인 날치크(Naichik)에 머물게 되는데, 이곳에서 정부 관리로부터 해당 지역의 민속주제를 이용해 곡을 쓸 것을 권유받고 작곡에 착수하게 된다. 1942년 모스크바에서 베토벤 사중주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동양풍의 선율, 타악기 연주를 흉내 내는 듯한 리듬제스쳐 그리고 독특한 화성이 특징적인 곡이다. 프로코피예프가 남긴 곡 중에서 드물게 민속적인 요소를 활용하고 있지만, 이국적인 색채 이면에 프로코피예프 고유의 작곡어법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이 흥미롭다. 1악장은 격렬한 분위기에 휩싸인 경쾌한 무드를 보여주며, 중음을 사용한 두터운 음향과 최초에 등장한 후 반복해서 연주되는 민속선율이 특징적이다. 2악장은 카바르디니안의 춤곡을 주제로 하며, 중동에서 사용되는 이국풍 현악기를 연상시키는 짜임새가 등장한다. 3악장은 특히 더 리듬적이며 타악기로 연주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클로드 드뷔시 (Claude Debussy, 1862-1918)

여섯 개의 고대 비문Six Epigraphes Antiques for Flute, Violin, Cello and Viola (Arranged by B. Chapron)

드뷔시의 친구였던 시인 루이스(P. Louys)의 시집 빌리티스의 노래를 기반으로 작곡된 곡으로, 표제가 포함된 여섯 개의 모음곡이다. 이 시집은 고대 그리스에 대한 현대인의 환상적인 상상을 담고 있는데, 드뷔시는 이를 위한 작품을 이미 가곡으로 발표한 바 있었다. 본래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연탄곡으로 1914년 작곡되었지만, 관현악모음곡으로 발표하려던 드뷔시의 의도대로 후에 지휘자 앙세르메(E. Ansermet)에 의해 관현악 버전으로, 그리고 다시 플루트를 포함한 사중주로 편곡되었다. 1곡은 여름 바람의 신, 판에 기도하기 위하여로서 드뷔시의 작품에 몇 번 등장한 바 있는 목신 을 그리고 있으며 그에 대한 인상을 목가적인 동양풍 선율로 제시한다. 이어지는 곡의 표제는 2무명의 묘를 위하여”, 3행복한 밤을 위하여”, 4크로탈에 맞추어 춤추는 무희를 위하여”, 5이집트의 연인을 위하여”, 6아침 비에 감사하기 위하여등이다. 병행을 비롯한 독특한 화성적 어법은 물론 특유의 모티브 처리, 음색적인 효과를 의도한 패시지들, 선법과 오음음계 등 드뷔시 고유의 기법과 정취가 작품 내내 진한 인상주의 풍 음향을 만들어낸다.

 

하워드 블레이크 (Howard Blake, 1938-)

플루트 오중주Flute Quintet, Op. 493 (1996) 

블레이크는 영국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작곡가로 다양한 장르에 많은 곡을 남겼다. 그의 음악은 아름다운 선율선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선법적인 조성, 투명한 오케스트레이션 짜임새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함으로써 동시대의 현대음악과는 구분되는 듣기 편한 소리를 들려준다. 이런 음악적 스타일 덕분에 블레이크는 애니메이션 스노우맨의 사운드트랙을 비롯하여,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위한 피아노 협주곡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기곡을 남겼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학창시절 플루트를 연주했으며 이 악기에 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었지만 본격적인 협주곡은 쓴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던 중 한 플루티스트가 협주곡을 의뢰했고, 그제서야 블레이크는 플루트 오중주 Op.493을 작곡하게 된다. 1악장의 주제는 작곡가의 머릿속에 몇 년 동안이나 맴돌던 선율이며, 플루트의 특유의 유려한 선율적 서법을 보여주는 긴 호흡이 특징적이다. 2악장은 당김음 짜임새가 경쾌한 무드를 만들어내며, 3악장은 느린 주제와 변주곡으로서 짧은 카덴자에서 절정을 이루고 곧바로 4악장으로 이어진다. 4악장은 장난스러운 분위기의 휘파람 행진곡으로 활기차며 화려한 느낌이다. 코다에서는 1악장의 주제가 다시 등장한다. 이 곡은 후에 플루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으로 편곡되어 발표되었다.

(글 음악평론가 이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