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우리가 사랑했던 정원에서> 리뷰

2021. 7. 15. 21:48

음악, 소리, 대사가 어우러진 감각의 전이

2021년 6월 22일(화) ~ 2021년 7월 4일(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이야기는 간단하다. 아내가 죽은 후 홀로 딸을 키워 온 작곡가이자 사제 시미언. 그가 딸을 집에서 내쫒는다. 그에게는 죽은 아내의 추억을 곱씹는 ‘정원’이 가장 중요하며, 그걸 계속 정성스레 가꾸며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등장인물은 내레이터를 포함해 총 세 뿐. 주목할 것은 이 작품이 키냐르(P. Quignard)의 원작 동명소설처럼 극 전체를 소리와 음악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는 점이다.

키냐르는 글자를 이용해 소설 뿐 아니라 음악을 쓸 수도, 언어를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글자를 사용하는 매체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감각을 넘어서는 것이다. 키냐르의 아이디어대로라면 ‘연극’ 형태로 바뀐 이 작품 역시 연극이라는 매체에서 기대하는 체험의 정도를 넘어서야 한다. 그래서 아마도 이 연극은 노련한 연주자로 구성된 실내악 앙상블을 대동하고, 60여 대의 스피커를 설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리와 음악, 대사로 표현되는 다양한 세계의 충돌과 얽힘, 티티새 등의 독특한 자연물에 대한 음악적 묘사를 준비했을 것이다.

 

무대를 구성하는 것들: 환상계, 공간계, 실제계

극 안에는 각기 다른 소리의 얼개로 구성된 다양한 청각 신호들이 독립된 세계를 이루고 있다. 첫 번째 세계는 내레이터의 목소리와 음악이 결합된 환상계다. 바이올린, 플루트, 피아노, 첼로로 구성되는 실내악이 바로크 풍, 바흐 풍, 드뷔시 풍, 니먼 풍(M. Nyman style) 등의 음악으로 등장한다. 특히 니먼 풍 음악은 반복하는 음형을 가진 그물 같은 짜임새의 ‘반주부’를 만들고, 그 위에 내레이션을 일종의 선율처럼 얹는다. 그렇게 내레이션과 음악의 결합이 전경(前景)과 후경(後景)을 가진 하나의 완전한 세계로 다가온다.

다만 음악의 각 성부가 또렷하게 청취되고, 각 악기의 특성을 적절히 반영한 선율이 너무도 명료하기에, 이것이 내레이션과 충돌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극 초반에 삽입된 바로크 풍 음악에서는 플루트와 바이올린의 ‘선율’이 ‘말을 한다’고 느낄 정도로 또렷하다. 이는 음악과 내레이션이 맞물릴 때에 두 명의 화자가 동시에 이야기하는 것처럼 엉킨 채로 청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세계는 소리로 구성된 공간계다. 이 연극에는 텍스트의 맥락 안에 배치된 디제시스 사운드(diegesis sound)가 풍성하며, 이를 통해 특정 공간과 계절, 상황을 상세히 그려낸다. 매미, 개천, 바람, 폭풍우, 풍경(風磬) 등. 이런 소리는 관객이 바라보는 무대 위를 폭풍우 소리를 채 막지 못하는 낡은 집으로, 그리고 수십 여 년 간 돌봐 온 정원으로 보이게 한다. 이따금 들리는 자전거의 경적 소리가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시미언의 삶을 은유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소리가 겹겹이 쌓여 그 자신만의 온전한 세계를 구축한다 할지라도, 음악이나 대사가 일단 침범한 이후에는 인식의 후면으로 밀려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세 번째 세계는 높고 낮은, 그리고 느리고 빠른 ‘대사’로 구성된 실제계다. “아빠 나랑 얘기 좀 해,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 아빠 날 이제 사랑하지 않아?” 딸 로즈먼드의 대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무대 위에는 아버지와 딸의 ‘말’ 만이 공간을 채운다. 이는 지극히 연극적인 테크닉으로만 구성된 세계로서, 이 안에 침범할 수 있는 소리 혹은 음악이란 딸이 흥얼거리는 ‘휘파람’ 정도에 불과하다.

 

시미언이 들은 소리: 티티새 한 쌍의 지저귐

주인공 시미언이 평생 해왔던 일이 정원의 새소리를 악보로 옮겨 적는 것이었기에, 그가 쓴 음악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 연극을 보러 온 관객 상당수는 시미언이 들었던 자연의 소리를 ‘실제 음악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다만 이 연극은 시미언이 작곡한 음악을 풍부하게 제시하지는 않으며, 이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으로 ‘티티새 한 쌍’에 대한 음악적 묘사를 언급할 수 있다. 암컷 티티새는 피콜로로 연주하는 짧은 연타음을 다양한 음역에서 그리고 도약이 섞인 단선율 형태로 연주하며, 플라터 텅잉으로 새의 목이 울리는 듯한 소리를 낸다. 이는 ‘진짜 새소리’를 악기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수컷 티티새는 주로 새의 ‘몸짓’을 흉내 내는 듯한 글릿산도 위주의 소리를 사용하며, 매끄러운 성악적 선율이 아닌 다소 거친 윤곽을 가진 무조의 음 조합을 들려준다.

따라서 관객은 눈을 감고 새의 움직임이나 생리를 상상할 수 있다. 티티새의 음악은 그것을 ‘조성’이나 ‘형식’ 같은 인간적이고 음악적인 체계로 포섭하지 않았으며 새소리의 높낮이나 움직임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이다. 시미언이 작곡했던 음악 역시 소리를 조합(composition)했다기보다는 사실상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옮긴 것(transcription)에 가깝다.

문제는 티티새 역할을 맡은 플루티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가 허리춤에 ‘깃털’을 달고 무대 위에 등장해 이런저런 동선으로 ‘몸 연기’를 곁들인 연주를 행한다는 점이다. 이 경우 관객은 오히려 티티새를 떠올리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성인 연주자가 무대 위에서 숙련되지 않은 몸짓으로 ‘인간새’를 연기할 때, 관객은 이를 보이는 존재로 해석해야 하는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존재로 해석해야 하는지조차 헷갈려 한다. 이런 고민의 순간, 무대의 실제계와 환상계를 섬세하게 넘나들던 이제까지의 긴장감이 잠시 바스라진다.

 

음악, 소리, 대사가 어우러진 감각의 전이

극 안에 등장하는 다양한 세계들, 그리고 극 중 시미언이 들었던 자연의 소리는 모두 한데 얽혀 독특한 서사를 이루며 계속해서 흐른다. 특히 실제계, 환상계, 공간계는 서로를 거울같이 반영하고, 때로는 그들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

이를테면 지극히 순수한 대사의 얽힘이 음악적으로 독해되는 순간이 있다. 긴 독백을 계속하는 아버지의 대사는 절묘하게 호흡을 끊어가며 때로는 휘몰아치며 화내다가도 딸의 음성이 끼어들 공간을 조율한다. 그렇게 부녀가 만드는 말의 논쟁은 텍스트의 서사적 강렬함과 함께 일종의 음악적인 클라이맥스로 느껴진다.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네, 내 존재 자체가 비극이네”라고 외치는 딸의 말을 되받아 “니 엄마는 너 때문에 죽었어, 그건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아버지. 놀랍게도 이런 대사의 흐름은 어느 순간 악기로 연주하는 이중주(duet)처럼 들린다. 낮게 깔리는 내레이터 김소진의 음성 위에 약간 톤을 높여 낭송하듯 이야기하는 아버지 정동환의 음성, 그리고 여기에 딸 이경미의 목소리가 얹히는 순간도 중음역의 목관악기와 낮은 음역의 현악기, 그리고 더 고음의 금관악기가 결합된 삼중주(trio) 같다.

이제 무대 위 배우 세 명은 무대 오른편에 앉아있는 연주자들과 병치된다. 이들은 서로를 반영하고 있는 각기 다른 세계임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시미언이 죽음에 거의 다다른 장면에서는 아버지와 딸이 언쟁하기보다는 분명 연주를 하는 것처럼 들린다. 일정한 속도로 흐르는 말의 이중주가 극 초반에 등장했던 플루트와 첼로 음악과 유사한 무드를 풍긴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런가하면 소리의 공간계와 음악의 영역이 일순간 용해되어 환상적인 공기의 흐름을 만드는 지점도 기억에 남는다. 바람 소리와 함께 플루트의 독특한 텅잉이 서라운드 음향으로 흘러나오는 부분, 그리고 “반지만은 없다”라는 아버지의 음성과 함께 등장하는 한 무더기의 쏟아지는 듯한 음악이 그렇다.

이렇게 만들어진 제4의 감각 혹은 제4의 세계는, 키냐르의 책을 읽고 느끼는 공감각적 체험과 유사하다. 이 연극을 보고 새로운 유형의 청각적 혹은 시간적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 연극은 2시간여의 길이를 갖는 독특한 음악작품으로 다가오기도 하는데, 아버지의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는 일반적인 기승전결을 갖는 고전주의 소품으로, 아버지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딸의 이야기가 계속될 때에는 끝날 듯 끝나지 않고 후주부(postlude)를 계속해서 늘려나가는 19세기 낭만주의 소품을 연상케 한다. 이 또한 연극의 ‘시간적 흐름’을 오롯이 겪은 관객에게만 인지되는 독특한 감각으로서, 소설의 형태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시간적인 영역으로의 감각의 확장,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 연극만이 가진 ‘음악적이고도 청각적인 축’을 기반으로 한 감각의 전이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글 이민희/음악평론가)

 

「월간리뷰」, 2021년 8월 (2021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