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레드북> 리뷰

2021. 6. 24. 11:14

2021년의 레드북, 또 다시 동시대성을 고민하다

2021년 6월 4일(금) ~ 2021년 8월 22일(일)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2017년 트라이아웃을 거쳐 2018년 초연된 <레드북>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대표적인 창작뮤지컬이다. 특히 이 작품은 성녀와 창녀로 이분화된 전형적인 캐릭터에 신물을 느꼈던 이들에게 신선한 여주인공을 제시했으며, 문화예술계의 미투운동이 한참 불거져 나오던 시기에 관객을 만남으로써 당대의 여성담론을 시기적절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레드북>은 매끄러운 극작 및 음악과 함께 호평을 받았다.

이제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2021년이 되었다. 연극·뮤지컬 분야에서 여성 원톱 작품은 더 이상 놀라운 것이 아니며, 여성 배역으로만 구성된 작품도 여럿 눈에 띈다. 여성 3대로 이뤄진 기묘한 집 안 풍경을 다루는 <베르나르다 알바>가 2018년에, 막내딸이 친부를 도끼로 살해하는 <리지>가 2020년에 라이선스로 소개되어 충격을 주었고, 독특한 여성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호프>(2019), <마리 퀴리>(2020) 등이 창작되었다. 이러한 흐름 안에서 여성의 비중만으로 주목받았던 작품에 대한 호의적인 태도 또한 폐지되었으며, 서사의 전개 방식, 여성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각의 적절성, 조연의 활용과 배치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레드북> 역시 단지 주체적인 여성 주인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2021년 관객에게 어필할만한 동시대성이 무엇인지 다시 고민해봐야 한다.

 

노부인에서 시작되어 팬덤이 이끌어주는 새로운 방식의글쓰기

<레드북>에서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동시대적 요소 중 하나는 극 안에서 묘사되는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다. 물론 이 극은 안나가 이야기를 ‘하는 것’(telling)과 이야기를 ‘쓰는 것’(writing) 사이의 간극을 애매모호하게 처리했다. 이는 이 작품이 무대극이기에 글에 대해 ‘쓰는 것’ 만을 묘사해서는 내용을 전개시키기 어려우며, 이런 이유로 극적인 허용을 통해 말하기와 쓰기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고 극 안에 등장하는 안나의 글쓰기를 포괄적으로 살펴보면, 기존의 미학을 뒤집는 독특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극 안에서도 반복적으로 언급되듯, 글쓰기란 자고로 남성의 영역이었고, 정확하게는 ‘천재로서의 남성 작가’의 일이었다. 이 경우 천재의 글쓰기는 번개를 맞은 듯 글을 쏟아내는 작가의 모습으로 표상되어 왔다. 이들은 글쓰기 기술을 연마하기보다는 찰나의 ‘영감’에 기대며, 현실이나 삶과는 거리가 먼 아름답고 추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즉 글쓰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신의 행위와 동일하며, 작가는 기존의 규칙을 습득하여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 존재 가치를 증명한다.

이와 같은 기존의 글쓰기. 즉 괴팍한 행실을 보여주며, 고독하지만 신적인 능력을 지녔던 남성 작가의 이미지는 <레드북>에서 완전히 삭제되었다. 대신 안나의 글쓰기는 자신이 돌봤던 노부인의 독려, 그리고 남들과는 달랐던 자신의 경험에서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안나는 평범한 일상 그리고 쉬이 지나쳤던 일들을 글로 써내려가며, 심지어 금기시되었던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다. 글의 출처는 분명하고 타인을 대상화하거나 착취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통해 자아를 성찰한다.

이런 글쓰기는 에코(U. Eco)나 크리스테바(J. Kristeva)가 언급했던 글쓰기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연상시킨다. 글쓰기란 이미 존재했던 수많은 이야기를 엮고 새롭게 배치해 놓는 것일 뿐, 창조자의 ‘권위’에 호소했던 과거의 작가 개념은 이제 낡았고 더 이상 어떠한 의미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주장 말이다. 더 나아가 안나의 태도는 스피박(G. Spivak)이 제기했던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노래하는 노인 캐릭터를 무대 위에 불러내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안나의 글쓰기가 지속될 수 있었던 까닭이 그녀의 글을 읽은 팬덤의 반응 때문이며, 그녀의 창작이 ‘로렐라이 언덕’이라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이뤄졌고, 이 공동체 안에 ‘2차 창작’이나 ‘팬픽’을 쓰는 회원이 존재한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는 글쓰기 행위가 ‘작가’의 고유한 영역에서 확장되어 이에 대한 ‘수용’과 ‘재생산’이라는 보다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컨대 안나는 남성천재미학의 망령에 휩싸여 있던 과거의 글쓰기를 세세한 층위에서 전복시킴으로써 글쓰기에 대한 최근의 새로운 시각을 한데 엮어 제시한다.

 

가장 핫한 창작뮤지컬 레퍼토리로서의 <레드북>

<레드북>은 2017년의 공연에서부터 유리아, 박은석 등 인지도 있는 배우를 캐스팅했으며, 2021년에는 더욱 더 화려한 라인업을 보여줬다. 차지연, 아이비, 김세정, 송원근, 서경수, 인성 등 최근 가장 주목받는 대극장 여성주연을 비롯하여, 팬덤이 확고한 남자 배우들 그리고 유명 아이돌을 주요 배역에 발탁했다. 이는 <레드북>이 작품의 흥행이나 작품성을 조심스럽게 고민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중극장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으며 특정 캐릭터에 대한 캐스팅을 보다 폭넓고 다채롭게 시도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지난 몇 년간 유튜브 등의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등 극 중 넘버가 큰 인기를 얻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관객이 극을 보고 나서 넘버를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넘버를 ‘듣기 위해’ 극장에 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뮤지컬이 스테디셀러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인 ‘대표 넘버’를 착실히 다져가는 과정으로서, 추후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레드북>이 여전히 사랑받을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주인공인 안나와 브라운 이외에 로렐라이와 바이올렛, 도로시, 존슨 등 다양한 조연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 ‘신사들’로 등장하는 세 명의 남자, ‘로렐라이 언덕’이라는 여성문학회에 모인 이들, 마을사람이나 하녀들 등 수많은 ‘군중’이 각기 다른 음악으로 표현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특히 신사들은 극 전반에 걸쳐 유사한 결의 음악과 안무를 들려줌으로써 통일성 있는 경쾌한 분위기를 만드는 반면, ‘로렐라이 언덕’의 노래들은 보다 자유로운 안무와 다채로운 스타일의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렐라이 언덕’에서 불리는 앙상블 넘버가 관객에게 ‘공동체’에 대한 독특한 감각을 상기시킨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런 음악들은 극이 끝날 때쯤에 이르러서는 ‘대안적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음악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풍부한 화성과 유머러스한 안무로 기억되는 음악들은, 이런 공동체가 충분히 희망적인 미래라고 암시하는 듯 하다. 이는 지극히 동시대적인 화두를 음악으로 선보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신사들의 묘사가 경직된 몸짓의 희화화에 가깝다는 점, 로렐라이 캐릭터가 모호한 성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존슨 캐릭터가 너무도 나약하다는 점, 더 나아가 극 전체가 ‘무해함’에 대한 강박을 보여주는 듯한 모습은 이후의 프로덕션을 거치며 다시 고민될 수 있는 사항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전면에 드러나는 ‘주체적 여성’이라는 요소 이외에도 여성주의와 섬세하게 얽혀 있는 새로운 유형의 글쓰기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대표적인 넘버 및 공동체에 대한 음악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런 지점은 <레드북>이 여전히 동시대를 대표하는 창작뮤지컬이며, 더 많은 이들에 의해 새로운 시각에서 논의되어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글 이민희/음악평론가)

월간리뷰, 2021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