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의 서정오페라 <브람스...> 리뷰

2021. 5. 24. 00:19

‘오페라’라는 표지 아래에서 시도된 장르적 실험

2021년 5월 13일(목) ~ 2021년 5월 16일(일) 국립극장 달오름

 

국립오페라단이 초연한 <브람스...>는 ‘서정오페라’라는 수식과 함께 일반적인 오페라와는 다른 외양을 갖는다. 브람스(J. Brahms), 슈만(R. Schumann), 클라라(C. Schumann)라는 세 명의 인물과 발레리나들 그리고 대규모 합창단이 등장하며, 익히 알고 있는 브람스의 사랑이야기를 지극히 추상적인 필치로 그린다. 작품 안에 포함된 총 20곡 중 18곡은 브람스, 슈만, 클라라가 기존에 작곡한 곡을 가져와 활용하며, 극 중 모든 가사는 독일어로 불린다. 이런 독특한 형식 안에서 감지되는 두 가지 특이성은, 첫째 이 작품이 음악적 측면에 있어 연속성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했다는 점, 둘째, 느슨한 대서사에 중첩된 서브텍스트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인용된 음악을 토대로 한 음악적 연속성의 성취 

<브람스...>는 다양한 음악을 나열하고 이를 음악적으로 연결시켜 오페라의 ‘전체흐름’을 만들면서도 ‘개별 곡 내부의 기승전결’을 유지하는, 마치 소우주를 독립적으로 운용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극중 슈만이 부르는 “#10. 헌정”이나 브람스가 부르는 “#03. 오월의 밤”은 낱곡 그 자체로 충분히 인상적인 울림을 주는 동시에 <브람스...>의 서사 속 구심점 역할을 한다.

다만 몇몇 곡들은 일부만 발췌되어 삽입됨으로써 원곡의 긴장감과 힘이 동일한 방식으로 전달되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15. 오래되고 몹쓸 노래들”은 본래 연가곡 <시인의 사랑> 후반에 배치되어 일련의 흐름 전체를 포괄하는 강렬한 정서를 폭발시킨다. 하지만 <브람스...>에서는 독특한 화성과 선율을 갖는 노래로만 인지되며, 슈만의 정서적 고통을 나타내는 단순한 음악적 기호로 활용됐다. 더 나아가 극 중 몇몇 곡은 오페라 전체의 시간적 흐름과 충돌한다. 오페라의 첫 곡으로 등장한 “#0. 비극적 서곡”은 낯선 편성의 앙상블이 긴 시간 지속되는 느낌을 주었으며, 후반에 배치된 “#14. 헝가리 무곡”은 오페라의 전체 서사와 분리된 채 길게 정체되어 있는 듯한 감각을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음악의 연속이 ‘콘서트오페라’가 아닌 ‘오페라’의 외양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작곡가가 모든 음악에 행한 편곡과 섬세한 조율 덕분이다. 음악의 도입과 사라짐, 끊어지는 지점의 설정, 연기나 발레의 배경음악으로서 등장하는 앙상블의 조율, 작은 편성을 크게 바꾸거나 반대로 큰 편성을 작게 바꾸는 것 등, 수많은 재해석을 거친 음악들은 그제야 <브람스...>라는 얼개 안에서 새로운 연속체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극단에는 브람스가 쓴 선율을 토대로 새롭게 창작한 몇몇 성악곡이 위치한다. 이런 방식으로 극 안에는 브람스, 슈만, 클라라 그리고 전예은의 곡이 그 경계를 흐릿하게 허문 채 낭만적인 화성 위에 묶여 있다. 이는 이 작품이 기존의 음악을 활용한 ‘오페라로서’ 보여주고 있는 가장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느슨한 대서사에 중첩된 서브텍스트

<브람스...>의 서사는 극중 인물의 노래가사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다. 극 안의 실질적인 서사는 인용된 음악 속 ‘뒷이야기’에 숨겨져 있으며, 표면적으로 흐르는 수많은 가사들, 더 나아가 음악까지도 서브텍스트에서 비롯된 ‘행위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즉 “#04. 리날도 칸타타”에 등장하는 ‘신성한 해안’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으며, 이 칸타타를 초연했던 당시 브람스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더 필수적이다. 극의 초반에 관현악 반주로 등장하는 “#02.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아이를 낳은 슈만부부를 위해 쓰여진 곡으로, 브람스가 이들에게 느끼고 있었던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서브텍스트를 알고 있었을 때에만 이 음악이 등장하는 맥락을 보다 정확한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세팅은 삽입곡의 정보에 정통한 ‘매니아 청중’과 이를 알지 못하는 ‘일반 청중’의 감상을 다르게 유도한다. ‘매니아 청중’의 경우 극 중 텍스트나 음악적 현상 후면의 서브텍스트를 음미하며, 실제 들리고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와 감정을 느낀다. 이들은 “#12. 나는 어두운 꿈속에 서 있었네”의 작곡자가 클라라이며, 남편인 슈만이 출판을 도왔다는 점, 그리고 부부가 어려움에 처한 상황을 그리는 극중 서사 안에서 이 노래를 다른 누구도 아닌 ‘브람스’가 불렀다는 점에서 미묘한 서사적 정보를 취득한다. 반면 일반청중은 다양한 컨텐츠로 활용되어 온 브람스의 사랑이야기를 느슨한 대서사로 마주할 뿐이다. 이들에게는 극 중 서브텍스트의 운용이 그저 ‘프로그램노트 상의 수사(修辭)’로만 머물게 될 가능성이 많다.

고무적인 것은 이 작품이 ‘오페라’라는 표지 아래에서 기존의 장르적 속성을 넘나드는 형식적 실험을 행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브람스...>는 ‘스스로’ 오페라라는 표지를 붙인 그 순간부터, 이 작품의 본질을 장르적 실험에 열려있는 태도라고 선포하는 듯하다. 이는 <브람스...>가 이후의 프로덕션에서 서브텍스트를 중심으로 렉처콘서트적 성격을 계발하거나, 혹은 극의 서브텍스트를 ‘텍스트’가 아닌 ‘연기’의 형태로 추가하는 등 다양하게 변주될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브람스...>가 장르적 신선함을 유지한 채 살아있는 컨텐츠로 더 많은 부류의 청중에게 울림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글 이민희/음악평론가)

 

「월간리뷰」, 2021년 6월 (2021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