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광주> 리뷰

2020. 10. 25. 15:05

여전히 또다시, 이야기의 주체와 기억에 관한 고민

2020년 10월 9일(금) ~ 2020년 11월 8일(일)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추상적인 무대연출과 결합한 시민의 대열

이 극은 5·18 광주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무대 한편에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설치해 시체의 화장장소를 나타내고, 두 대의 방패가 전면에 등장해 대치중인 상황을 암시하는 식이다. 극의 최종부에 이르러 무대 중앙에 석상처럼 우뚝 선 채 단호하게 이야기하는 정화인, 그리고 죽음의 순간 공중으로 떠올라 사라지는 이기백의 모습 등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기백의 죽음은 광주의 희생자를 사람과 같은 크기의 오브제로 구현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추상적인 상()들이 몇몇 장면에 이르러서 일종의 제의(祭儀)적인 퍼포먼스로까지 확장되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1막 후반에 소년 오용수가 하얀 천 사이를 가로지르며 걸어 다닐 때, 그를 둘러싼 구체적인 시공간은 사라져버리고 영()으로 등장한 죽은 자와 이를 마음에 새기는 산자의 의식(儀式)이 시작된다.

여기에 ‘대열’을 이루고 선 시민의 모습이 더해진다. 편의대원과 시민군 대표가 악수를 하는 장면이 좌우 대칭의 구도로 나타나고, 모든 여성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흩어진 상태로 <검은 리본 달았지>를 부르는 것, 그리고 <훌라훌라>를 노래하는 시민이 원을 그리며 도는 것 등. 즉 이 작품은 추상적인 무대연출 위에 시민의 대열을 반복해 보여줌으로써 실험적인 음악극 혹은 1980년대 민중극의 기시감을 만들어낸다. 특정 시공간을 사실적으로 묘사해서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투박한 배경 위에 직접적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극에서는 이야기의 ‘주체’가 누구이며,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누구의 이야기인가?

뮤지컬 <광주>에는 편의대원 박한수 그리고 시민군을 이끄는 야학교사 윤이건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서로 대립하는 구도를 띤다. 특히 박한수는 새롭게 창작된 가상의 인물로서 시민군 사이에 투입된 계엄군의 프락치다. 극 초반에는 박한수가 시민들에게 총을 들도록 종용하며 강경진압의 명분을 만들고자 한다면, 후반에는 이 구도가 뒤바뀌어 오히려 시민군의 무장을 말리는 입장을 취한다. 이처럼 극에 등장하는 ‘무장투쟁’이라는 소재는 광주의 시민군이 ‘언제’ 그리고 ‘왜’ 무기를 들게 됐는지에 대한 숱한 논쟁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이 토픽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과는 별개로, 극 전체의 서사를 이끄는데 적합한지는 조금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흐름 안에서 주체적으로 사고하며 입체적인 감정변화를 겪는 대표적인 인물이 ‘프락치’ 박한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설정은 박한수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 심지어는 윤이건 마저도 평면적인 캐릭터로 주변화시킬 수 있다.

한편 이 극은 5·18 당시 주먹밥을 나눠줬던 여인, 계엄군에 끌려가 참혹한 고문을 당했던 이들 등을 시민군 캐릭터로 재구성했다. 또한 광주에 대한 기록사진 등에서 앳된 모습으로 발견되는 청년들을 무대 위에 소환했다. 즉 이 뮤지컬은 계엄군에 맞서 싸운 ‘남성’ 시민군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이들을 뒤에서 독려하고 보좌하는 역할로 ‘여성’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이 지점에 이르러 이 극은 성별 분업의 딜레마에 빠질 위험성이 높다. 역사적 고증을 통해 ‘보조로서의 여성’을 취하고, 여기에 가상의 서술자로서 ‘고뇌하는 남성’을 결합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천진한 소년의 죽음을 무대 위에 벌거벗긴 채 전시하는 순간, 이 작품은 결단을 내리는 ‘남성’과 이들에게 감정적 동요를 불러일으키는 ‘약자’의 구도를 출현시키게 된다.

 

서로 다른 음악 양식의 계층화

뮤지컬 <광주>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선율이 조각나고 또 변형되어 극 전체를 영혼처럼 떠돈다. 조각난 선율은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성부, 그리고 잦은 전조를 동반하는 독창과 이중창, 그리고 삼중창의 일부가 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들은 관객이 따라 부르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며, 이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을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와는 대조적인 음악으로 비교적 명확한 화성진행을 동반하는 가요 및 뮤지컬 풍 넘버가 다수 등장한다. 이런 노래들은 파토스의 정서로 감정을 고양시키며, 주로 2막 후반에 이르러서는 여성의 목소리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한편 극 안에는 굵고 뚜렷한 선을 가진 다수의 합창이 존재한다. 이런 노래들은 주먹을 쥔 시민군의 절박한 눈빛과 함께하며, 최소한의 화성진행과 반주를 동반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가장 큰 울림을 주는 순간도 시민군이 목청 높여 이 노래를 합창할 때다. 실제 투쟁 현장에서 자주 들리던 <훌라훌라>도 인상적이다. 이 노래는 독특한 안무 및 시민의 대열과 결합하여 거리에서나 느낄 법한 에너지를 무대 위에 옮겨 놓는다. 이외에도 트로트, 재즈풍 음악, 시민군이 함께 부르는 유쾌한 합창 넘버가 추가로 등장한다. 이런 음악들은 시민군이 평범한 이웃이었으며,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 웃으며 극복하고자 했음을 표현한다. 특히 시민들이 처음 무대에 등장할 때 불리는 <눈을 떠>는 공동체의 에너지를 폭발시킨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런 다양한 유형의 음악들은 단지 ‘혼재’한다기 보다는 일종의 ‘계층적인 구도’를 이룬다. 즉 전조가 많고 따라 부르기 어려운 음악들은 주로 서사를 전개시키고 주인공의 고뇌를 표현하며, 말하는 형태로 연속해서 흐른다. 반면 뮤지컬풍 넘버나 합창 등은 대부분 정서의 표출에 관계되어 있으며, 극 중에서도 ‘노래’ 그 자체로, 즉 뚜렷하게 독립된 ‘낱곡’으로 존재한다. 고민해봐야 할 지점은 극장을 나서는 관객이 기억하게 될 음악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다.

 

결국 누가 목소리를 냈고, 어떤 노래를 기억했는지의 문제

아마도 한 무리의 관객은 극장을 나서며 고양된 감정으로 불렸던 웅장한 합창 <임을 위한 행진곡>과 <투쟁가>를 기억할 것이다. 이런 노래들은 까다로운 음악 사이에 배치되었기에, 상대적으로 더 부각되어 청취될 수밖에 없다. 애초에 청각의 작동방식이 ‘어려운 곡’에서 쌓아올린 긴장감을 ‘단순하고 쉬운 곡’ 안에서 해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 <광주>는 추상적인 무대연출, 나부끼는 깃발, 결의를 다지듯 굳게 움켜쥔 주먹 등과 함께 집단의 목소리로 외쳐진 하나의 ‘슬로건’ 그 자체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또 한 무리의 관객은 극 후반에 배치된 <아무 일 없던 것처럼>을 비롯한 가요 및 뮤지컬풍의 서정적인 넘버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는 광주의 오월을 여성적인 목소리의 추모로, 즉 이 사건의 주체가 아닌 주변인의 관점에서 ‘슬퍼하는’ 방식으로 애도함을 의미한다.

사실상 이 두 유형의 음악이 너무도 강렬하기에 극 전체를 떠돌던 <임을 위한 행진곡>의 파편들과, 여기에서 기인한 수많은 노래들은 기억의 후면에 위치할 가능성이 높다. 선창자처럼 등장했던 ‘거리천사’가 걸출하게 늘어놓던 해학적인 노래들, 그리고 평범한 이웃의 일상을 다뤘던 노래들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극은 광주를 소재로 한 수많은 작품이 제기했던 질문, 즉 누구의 목소리로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며, 또 무엇을 기억하게 할 것인가의 고민을 반복하게 한다. 극 후반에 직접적으로 “우리를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외치며 희생자의 이름을 ‘비석’에 써 놓지만, 이런 행위는 작품 전체가 세 시간에 걸쳐 추동하는 ‘기억되는 노래의 힘’에 비하면 지극히 부차적이다. 관객이 공연장을 나선 후에도 긴 시간 기억될 노래가, 뮤지컬 <광주>가 던지는 직접적인 메시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글 이민희·음악평론가)

 

「월간리뷰」, 2020년 11월 (2020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