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고민하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모든 책은 자신만의 음성을 지닌다. 눈앞에 보이는 글자 너머 그 글자를 새기는 저자의 방식ㆍ의도ㆍ버릇이 책장에 배어난다. 어떤 저자는 고압적인 소리를 낸다. 어떤 저자는 신경질적이다. 또 어떤 저자는 글 안에 군데군데 빈틈이 보이고 그 사이로 생각의 빈약함이 흘러내린다. 때로는 책을 읽고 나서 저자의 불친절한 어투만이 뇌리에 남을 때도 있다. 책 내용은 그 다음이다.

여기 쉽게 만나보기 힘든 다정다감한 목소리를 내는 ‘철학서’가 있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의 저자 타츠루(內田 樹)는 평범한 사람이 떠올릴 법한 아주 단순한 질문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하고, 그 답을 방대한 철학자의 글을 통해 되새김질한다. 저자가 한번 소화한 후 토해내는 구조주의(構造主義) 이론은 삶을 바라보는 보통의 시선이 된다.

도화지에 날카로운 샤프로 꾹꾹 눌러 복잡한 그림을 그린 다음, 그 그림을 지우개로 전부 다 지운 후 종이를 바라보는 느낌. 책 속 구조주의는 종이 위 희미하게 비치는 샤프 자국처럼 뼈대를 드러낸 투명한 모습이다. 요컨대 레비스트로스는 ‘우리 모두 사이좋게 살아요’라고 말하며, 바르트는 ‘언어 사용이 사람을 결정한다’라고 외치고, 라캉은 ‘어른이 되어라’라고, 푸코는 ‘나는 바보가 싫다’고 중얼거린다. 저자는 구조주의가 우리 일상에 스며있는 ‘생각하기 방식’이며, 우리는 이미 그것에 너무도 익숙하다고 말한다.

사실 대부분의 철학서는 ‘읽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뿐더러, 한 문장을 읽고 다음문장을 읽을 때면 먼저 읽은 문장이 저 멀리 도망가 쉽게 친해지기 힘들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서의 어려운 논리에 압도당한 채 책 안에서 내 이야기를 풀어놓을 공간을 찾지 못한다. 유능한 외과의사가 수술을 집도하고 평범한 나는 남이 헤집는 내 뱃속을 그저 바라만 봐야하는 것처럼, 위대한 철학서 앞에서 나는 늘 수동적인 존재다. 그 피로감이란.

그러나 이 책은 다르다. 엄마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을 때 책을 꺼내들어도 된다. 엄마는 내가 책을 읽는 것을 알아도 옆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해댄다. 핸드폰에 대해, 감기기운에 대해, 친구들에 대해. 도란도란하는 엄마의 음성 사이로 ‘구조주의’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책이 그렇다. 혹 엄마의 잔소리가 없는 아주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는다면 그즈음 내가 고민하는 문제들이 책장 사이사이에 슬쩍 등장한다. 길쭉한 식탁에 나와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들과 나의 최근 관심사들, 책의 저자인 타츠루, 그리고 푸코 · 바르트 · 레비스트로스 · 라캉이 모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뜨끈한 국을 떠먹고 밥을 퍼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저녁시간... 가끔씩 엄마의 음성이 들리고 사르트르와 카뮈, 사이드가 기웃거리는 그런 일상과 철학의 공존이 책 안에 펼쳐진다.

차이는 간단하다. 이 책은 쉽고 재밌다. “입문서가 흥미로운 것은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 물음 아래에 밑줄을 그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답할 수 없는 물음, 그러니까 시간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성이란 무엇인가, 공동체란 무엇인가, 화폐란 무엇인가, 기호란 무엇인가, 교환이란 무엇인가, 욕망이란 무엇인가 등과 같은 일련의 물음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근원적이고 인간적인 물음이다. 구조주의라는 사상이 아무리 난해하다고 해도, 그것을 세운 사상가들이 ‘인간은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행동할까?’라는 물음에 답하려고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그 물음에 대한 접근 방법이 보통 사람들보다 강하고 깊었을 뿐이다. 결국 그들이 그 탁월한 지성을 구사해 해명하려고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에 담긴 본질적인 모습일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內田 樹) 저 / 이경덕 역 / 寢ながら學べる構造主義 (자면서 배우는 구조주의) / 갈라파고스, 2010
<서울대 음대 소식지 제15호>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