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여신님이 보고 계셔> 리뷰

2020. 6. 1. 02:46

회색지대에서 피어난 동화 같은 음악, 그 힘과 치유력

2019년 11월 16일(토) ~ 2020년 3월 1일(일) 대학로 유니플렉스 1관

 

비극 한 가운데에서 시작하기  

때는 6·25 직후. 남한군 영범과 석구는 북한군 포로인 창섭과 주화, 동현, 순호를 배로 이송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러던 중 풍랑과 함께 배 안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설상가상으로 무인도에 우연히 정박하게 된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 남한군이 북한군의 포로가 된 상황. 비인간적인 북한군 창섭이 지휘하는 섬은 무자비한 명령과 함께 어둡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그렇게, 적어도 극의 초반까지는, 이 작품 안에서도 이제껏 숱하게 봐왔던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의 기시감이 있다. 다른 점이 하나있다면, 이 극은 이미 극의 초반에 전쟁의 살육 한 가운데로 재빠르게 돌입했다는 것으로서, 애초에 기합이 한껏 들어간 채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의 전개다. 순호라는 인물과 함께 다양한 군인들이 등장해 서사의 중심이 되면서, 클리셰와 같았던 초반의 배경이 점차 희미해진다. 예컨대 우악스러울 만큼 한껏 들어 올린 초반의 고양된 감정은, 그 최고조에서부터 긴장감을 천천히 덜어내며 흐르기 시작한다. 이런 독특한 세팅은 <여신님이 보고 계셔>가 가진 음악과 적절히 어우러지며 설득력을 발휘하고, 특히 몇몇 음악적 트리거들 및 ‘순호’라는 캐릭터와 함께 매혹적으로 진행된다.

 

회색지대의 청년, 순호가 듣고 부르는 노래

순호는 극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로, 전쟁 트라우마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이다. 그는 북한군으로서 난파된 배를 고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전쟁 중 형의 죽음을 겪은 탓에 매일 악몽에 시달린다. 사실 순호의 악몽은 ‘형제의 배신’이나 ‘형제의 비극’과 같은 6·25 그 자체를 은유하며, 이런 부조리와 고통을 표현하는 <악몽에게 빌어>는 극 초반에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파토스의 넘버다. 그리고 순호가 이 상황을 헤쳐 나가는 방식은 모두와 단절된 채, 그저 고립된 ‘자폐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순호는, 남한군 영범과 이야기를 하고 그가 딸에게 불러주는 동요를 들으면서 서서히 타인과 눈을 맞추기 시작한다. 순호의 마음을 여는 <꽃나무 위에>는 민요에 가까운 음계로 구성된 단순한 선율과 기본적인 화성, 그리고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리듬을 가진 토속적인 동요다. 이 음악은 그 순진한 분위기 안에서 남북의 대치상황 및 가족의 죽음이라는 암울한 현실을 망각하게 하고, 경계나 갈등이 생성되기 이전의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인지 순호는 이 음악을 들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누군가’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곧 순호는 <그대가 보시기에>라는 노래를 부르며 가상의 ‘여신님’이 실재한다고 모두에게 선언한다. 특히 <그대가 보시기에>는 율동을 포함하는 ‘놀이 음악’으로서, <꽃나무 위에>와는 좀 다른 유형의 발랄한 분위기다. 재미있는 것은, 군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따라하면서 ‘군인 특유의 경직된 몸짓과 신체’에서 자유로웠던 먼 과거를 상상하게 하고, 언젠가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될 순간을 암시한다는 점이다. 순호 역시 <그대가 보시기에>를 통해 자폐적인 모습에서 천진난만한 분위기로 변모한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극 중 모든 인물이 ‘여신님’의 존재를 ‘극중 연기’로 그리기 시작하는 것도 흥미롭다. 이는 극 초반을 지배하던 ‘전쟁’이라는 거대서사가 뒤편으로 밀려나고 ‘여신님’이라는 새로운 대상이 투입됐음을 의미한다.

 

음악의 힘과 치유력

순호에 의해 모두의 앞에 등장하게 된 여신님은, 이제 그들의 마음속에서 각기 다른 인물로 상상된다. 이를테면 어머니를 회상하는 창섭에게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누이동생을 그리워하는 주화에게는 ‘누이동생’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음악은 각기 다른 인물이 처한 상황과 배경을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 및 선율 그리고 악기구성을 통해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음악의 사용은, 나열되는 서사구조의 지루함 그리고 유일한 여성배우가 반복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자칫 극의 집중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위험성을 무마시키고, 각각의 음악을 작품 전체의 대표적인 킬링 넘버로 부각시키기에 이른다. 그렇게 <꽃봉오리>, <원 투 쓰리 포>, <꽃나무 위에 리프라이즈> 등이 각기 다른 군인의 전사로서 설득력 있게 등장한다.

남과 북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무인도에서, 아이·어른·정상·비정상·군인·민간인 그 어느 경계에도 닿지 않는 회색지대에 선 순호. 그의 귀에 포착되고 그로부터 시작된 동화 같은 음악이, 군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여신님의 현현으로 이어져, 결국 다양한 스타일의 극 중 음악으로 쏟아져 나온다. 이런 노래가 담고 있는 이야기는 이분법적인 선악의 판단을 보류하게 하는 것으로서, 모두에게 보편적인 울림을 주는 부모·누이·연인과의 정과 사랑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평이한 음악에서 촉발된 평범한 이야기들이, 그들의 거하는 전시상황을 지우고 그곳을 회색지대로 만든다. 이로써 작품 전체는 ‘전쟁’의 서사에서 ‘인간성’과 ‘치유’의 서사로, 극 초반의 비극은 극 중후반의 ‘동화’와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로 뻗어 나간다. 비록 이 이야기의 끝이 어떤 방향으로 마무리될지, 정말로 최후의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그 무엇 하나 속단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월간리뷰」, 2020년 4월 (2020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