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김부장의 죽음> 리뷰

2020. 4. 1. 23:40

사색적인 죽음을 통해 본 소극장 오페라의 가능성

2020년 2월 5일(수) ~ 8일(토)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유형화된 인물에서 보편적인 이야기로

오페라가 시작되면 한국근현대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들, 특히 ‘65년생 김부장’으로 대변되는 인물과 그를 둘러싼 가족이 등장한다. 조건에 맞춰 남들처럼 결혼을 하고, 직장 상사에게 아부하며, 한강이 보이는 대형 평수 아파트를 구입한 남자. 그는 회사일에 바빠 가정을 돌보지 않았으며, 자식은 아버지를 피하고, 아내는 그를 돈 버는 기계로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급작스럽게 죽음 앞에 서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오페라의 ‘김부장’이 톨스토이의 소설에 등장하는 ‘이반 일리치’를 각색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원작 속 일리치도 아내 및 자식과 함께 성공가도를 달리며 지극히 사회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로, 20세기 한국이라는 배경과 결합하여 동시대의 전형적인 남성 가부장 신화 그 자체로 거듭난다.

극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김부장의 죽음>은 서서히 이 남자의 ‘죽음 그 자체’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전반부에서는 지독한 클리셰처럼 그려지던 중년 남성의 이야기가, 후반부에 이르러 사색적이고 무거운 분위기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이 김부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자 했다기보다는, 죽음의 여정을 철학적으로 그리고자 했음이 드러난다. 예컨대 이 작품은 김부장의 인생역경이나 그 삶의 정당성을 설득하는 과정을 최소화한 채, 김부장을 둘러싼 지극히 유형화된 인간관계를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누구나 겪을 법한 ‘죽음에 대면한 인간의 모습’을 화두로 던진다. 그리고 이를 표현함에 있어 음악을 필두로 죽음의 면면을 묘사하고, 강렬한 최후를 만들어낸다.

 

음악으로 풍부해진 죽음의 여정

대본으로만 죽음을 접한다면 그 무거움과 삭막함에 쉬이 짓눌리겠지만, 이 작품은 ‘오페라’이기에 음악이라는 도구로 죽음을 입체적으로 구현해낸다. 이를테면 작품을 여는 서곡 안에는 ‘세이킬로스의 노래’와 장례미사에 쓰이는 ‘디에스 이레’가 등장한다. 이 노래들은 죽음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서, 옛 선율에 간직된 독특한 화성진행과 함께 목가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이런 무드는 관객에게 죽음의 보편성 그리고 태초부터 이어지는 죽음의 평범성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한편 김부장의 성공신화 그리고 그의 가족이 등장할 때에는 ‘생상의 백조’ 그리고 ‘우리집은 내손으로 지을 거예요’와 같은 선율이 인용되어 블랙코미디 같은 구도를 만들어낸다.

김부장이 병원에 입원하고 죽음과 거짓이라는 강박으로 괴로워할 때에는 그의 감정이 다소 복잡한 무조의 선율로 제시된다. 아마도 관객은 김부장의 고통에 동반되는 날카로운 선율을 들으며 그 즉시 불편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동시에 까다로운 선율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성악가의 노련함을 지켜보며, 죽음이라는 감각이 연상시키는 예민하고 때로는 신경질적인, 형언하기 힘든 복합적인 감정을 상상할 수도 있다.

다만 다수를 이루는 격렬한 중창의 경우, 가사가 명확하게 청취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관객은 대본을 배제한 채 선율과 화성의 뉘앙스 그리고 성악가의 연기를 참고하여 죽음을 그저 추상적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가사가 또렷하게 들리도록 대본 및 음악을 조정하거나, 무대 곁에 ‘자막’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김부장의 병상세례를 위해 찬송가를 부르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원곡 ‘하늘가는 밝은 길이’가 가진 울림과 ‘세례’라는 제의적인 구도가 결합해, 종교의식으로 다뤄지는 죽음의 또 다른 형태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이윽고 작품의 맨 끝에 이르러서는 단출한 음향으로 반복되는 선율이 등장한다. 이 또한 꺼져가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음악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소극장 오페라의 가능성

이 작품은 ‘소극장 오페라’라는 외형으로 작업됐기에, 간결하고 영민한 연출을 통해 대본과 음악이 빛을 발했다. 예를 들어 크지 않은 무대 뒤편에는 스크린이 설치됐고, 그 위에 죽음을 상징하는 기하학적인 무늬 및 각 장면을 뒷받침하는 추상적인 이미지가 적극 활용됐다. 이런 장치를 통해 죽음의 과정에 내포된 가상의 시공간 및 상상의 풍경을 무리 없이 구현할 수 있었다. 무대에서 사용된 간소한 소품도 눈에 띈다. 특히 몇 개의 상자와 병원침대, 긴 천 등을 사용한 연출은 다소 현학적인 대본과 무조로 흐르는 난해한 음악과 병치되기에 적절한 너른 배경이 되었다.

작품 최종부에서는 조명이 무대 뒤편에서 뻗어 나와 김부장의 뒷머리를 비추게 되는데, 이 장면은 오페라의 백미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빛을 등지고 선 성악가의 모습은 극 내내 진행된 죽음의 과정이 드디어 장렬한 최후를 맞았음을 감각적으로 보여주었다.

총 열 개의 악기로 구성된 앙상블도 주목할 만하다. 오보에와 바순에서부터 팀파니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음색을 갖는 악기의 결합은 그 자체로 독특한 음향을 구성했다. 동시에 이 악기들은 독립적으로 청취됨으로써 무대 위 다수의 성악가만큼이나 개별적인 심상을 만들어냈다. 특히 클래식 기타가 주도하는 음향은 대극장오페라에서는 듣기 힘든 지극히 실내악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소극장이라는 공간에 걸 맞는 소박하고 친밀한 감정을 무대에 부여했다.

결국 이 작품은 김부장의 죽음을 보편적으로 그려내는 과정 안에서, 소극장에 적절한 연출 및 음악의 입체적인 성격을 적극 활용했다. 이는 ‘소극장 오페라’라는 새로운 유형의 무대극이 갖고 있는 가능성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으로서, 다소 사색적일 수 있는 주제에 대한 고찰이 ‘오페라’라는 방식으로, ‘작은’ 무대 위에서 오히려 더 깊고 풍부하게 표현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글 이민희/음악평론가)

 

「월간리뷰」, 2020년 3월 (20200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