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극 <적로> 리뷰

2020. 2. 4. 01:49

음악으로 구분하고 써 내려간 예인들

2019년 12월 6일(금) ~ 2019년 12월 29일(일) 서울돈화문국악당

 

복합양식의 음악과 단일양식의 음악 

‘이슬’을 형상화한 피아노 선율이 등장하고, 대금 그리고 재즈풍 베이스가 섞여 나오며 막이 오른다. 이처럼 다양한 기원을 가진 소리를 한꺼번에 듣는 경험은, 음악극 <적로>의 음악적 정체성을 짐작게 한다. 이런 음악은 판소리·뮤지컬·국악·서양음악·재즈 등 다양한 장르들이 각자의 현대적 형태로 우리의 눈앞에 실재한다고 믿게 해주며, 극이 끝난 후 흥얼거릴 수 있는 말끔한 선율을 제공한다. 국악에서 기원한 창극을 뮤지컬의 흐름에 융합시키는 것도, 극에 등장하는 다양한 양식의 노래를 앞뒤로 매끄럽게 연결하는 것도 이런 ‘복합양식’ 음악의 힘이다.

한편 극 안에는 양식적으로 닫힌, ‘단일양식’의 음악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음악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가’와 ‘판소리’다. 특히 정가와 판소리는 작품의 캐릭터에 강하게 밀착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작품 후반의 서사적 반전에 영향을 미친다.

 

판소리와 정가의 구분 그리고 전복 

대금명인 김계선과 박종기가 실랑이를 벌이며 극이 시작된다. 박종기는 나이가 들어 고향에 내려가려 하지만, 절친인 김계선은 이를 막아선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낯선 인력거가 이들을 기방으로 데려간다. 그곳에서 난생 처음 보는 기생의 술대접을 받는데, 이 기생의 외모와 노래가, 이들이 수십 년 전 흠모했던 산월을 쏙 빼닮은 것이 아닌가.

이어지는 대화는 두 대금명인이 풀어 놓는 음악과 삶 그리고 기생 산월에 대한 회상이다. 이들의 이야기 안에서 산월은 청소년 즈음의 아이로서, 둘 다 ‘산월의 머리를 올려주고자 껄떡댔다’고 말한다. 다만 대금명인이 서사의 주체로 삶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옆에서 술을 따르는 여성기생은 점점 그와는 동등하지 않은 인물로 상상된다. 이는 불편할 수 있는 지점이다.

이런 구분은 남성예인과 여성기생을 판소리와 정가라는 두 가지 음악양식에 투영하면서 강화된다. 즉 남성이 부르는 판소리는 김계선과 박종기의 서사와 결합하면서 세상의 풍파를 허심탄회하게 표현하는 양식으로 청취된다. 반면 기생의 정가는 추상적인 시구를 읊는, 판소리의 진솔함과는 대척점에 선 무언가로 인식된다.

놀라운 전복의 지점은, 길고 긴 남성의 이야기가 끝나고 수수께끼에 싸여있던 여성기생이 말문을 열 때다. 인형같이 술을 따르던 산월은 본인의 인생을 털어놓고 어머니의 정체를 밝힌다. 그리고 바로 그날이 어머니의 기일이었음을 고백한다. 이 술자리가 산월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서사의 주도권자가 뒤바뀌는 느낌도 묘하다. 이야기를 계속해 온 것은 남성예인이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끌어낸 것은 다름 아닌 여성기생 산월이었던 것이다.

정가에 채색됐던 특유의 뉘앙스도 이 부분에서 변화를 맞는다. 지극히 여성적이었던 정가는 그 경계를 넓혀 초월적인 심상을 품는다. 산월이 부르던 노래는 사실 산사람과 죽은 사람 사이를 헤매던 귀신의 소리였고, 그녀가 읊던 가사는 모녀가 겪었던 수많은 시간을 시로 압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확장을 거친 후에야, 무대 위에는 동등한 지위를 가진 ‘세 명의’ 예인이 자리하게 된다.

하지만 김계선과 박종기는 산월의 이야기를 듣고 그 어머니의 넋을 기리고자 씻김굿을 시작하며, 무대 위에서 산월과 어머니의 넋을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뒤를 이어 김계선과 박종기도 이별을 하고, 죽음을 맞는다.

 

음악적 클라이맥스 vs. 극의 서사적 마무리 

이 작품은 극의 최종부에 위치한 ‘두 남성예인의 이별과 죽음’을 통해 공허하고도 덧없는 삶 그리고 ‘이슬의 노래’라는 부제를 극 전체의 여운으로서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극이 끝난 후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그 직전에 배치된 ‘산월의 퇴장’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 작품은 복합양식의 음악을 주요하게 활용했고, 작품 전체에 걸쳐 대중적인 극에서 볼 법한 기승전결을 만들어냈다. 단일양식의 음악을 군데군데 배치한 가운데 복합양식의 음악이 촘촘하게 흐르며, 거대한 음량을 갖는 산월의 퇴장을 기점으로 클라이맥스를 완성한다. 따라서 관객은 점차 고조되는 음악의 흐름을 따라가며 쉬이 오열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예컨대 이 작품은 복합양식의 음악이 암시했던 대중성으로의 욕망을 통해 산월의 퇴장이라는 ‘기억될만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헛헛함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그 이후의 진짜 마무리는 기억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추측도 가능하다. 회생했던 산월의 목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극을 지배해 온 남성예인의 ‘행위’를 통해 퇴장 당한다. 그러나 남성예인의 ‘화려한 배웅’은 그 서사의 주체가 남성이었을 뿐, 그 음악의 절절함과 강렬함은 서사의 행위자와 피행위자를 가볍게 전복시킨다. 여성기생과 남성예인을 음악으로 구분 짓던 방식. 그리고 남성의 목소리로 여성을 멋들어지게 배웅하고자 했던 자신감. 이런 얼개들이 결국, 서사적으로는 주변적이지만 음악적으로는 중심이 되어버린, 특정 장면의 무게감을 간과해 버린 것이다.

 

「월간리뷰」, 2020년 2월 (2020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