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환 서울대 기악과 교수와의 인터뷰

2018. 9. 9. 23:46

“저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저의 주변에 있는 분들, 기회가 된다면 전부 일일이 감사드리고 싶어요. 지금도 좋아하고 사랑하지만 앞으로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어린 시절, 아버지 

피아노를 처음 배우게 된 것도 음악을 건너 들은 것도 아버지 쪽 영향이예요. 아버지가 음악을 워낙 좋아하셨으니까. 그 당시에는 피아노 있는 집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우리 집에는 피아노도 있었고 음반 같은 것도 굉장히 많았어요. 아버지는 모차르트를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집에 LP도 굉장히 많았거든요.

5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어요. 우리 누나(최정환)가 숙대 피아노과를 나왔거든요. 그 누나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배웠어요. 동네에서 어떤 선생님에게 레슨도 받았고 유치원에서는 피아노 반주도 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초등학교 5학년이나 6학년까지 피아노 레슨을 다녀서 쇼팽 즉흥환상곡까지 쳤어요. 쇼팽 중에서도 쉬운 에튀드 같은 거를 쳤지. 그런데 잘 하지는 못했어요. 레슨은 중학교 들어가서는 그만 두었어요.

초등학교 시절에는 음악회보다는 주로 LP로 음악을 접했어요. 아버지는 음악을 취미로 좋아하시던 공무원이셨어요. 반면 어머니는 음악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 분이셨지. 어머니는 자식을 기르시는 가정주부로서 충실하셨던 분이예요.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이 음악하는 것에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아들을 의사로 키우는 게 꿈이셨던 분이니까. 아버지도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걸 원하시지는 않으셨어요. 그 당시야 뭐 음악을 하는 것은 열악했으니까. 누나도 원래는 약대를 들어갔는데, 피아노과로 전과를 한 거예요.

아버지께서는 인문학적인 소견을 아들에게 주기를 바라셔서 당신의 지인이셨던 시인들을 아들과 만나게 해주시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저는 다방 같은 곳에서 이야기도 많이 해보고. 그때는 르네상스같은 음악 다방은 아직 없었고, 진짜 동네 다방이었어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그림도 좋아했어요. 아버지는 그림을 수집하셨었는데 그 그림이 아직도 우리집 창고에 다 썩고 있어요.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진 않으셨고 당신 친구 작품을 가져오시고 그러셔서 집에 몇 점이 있었어요. 이걸 자식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셨고. 유년시절 저희집은 상류층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일본에서 유학을 하셔서 그런지 그런 쪽으로 상당히 관심이 많으셨어요.

 

생물반 vs 명동예술극장

중학교 1, 2학년 때는 동아리 활동으로 생물반을 했어요. 개구리 해부하고 그러는 거. 생물반은 사실 의대에 가려고 들었던 거예요. 의대가 적성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중학교 3학년 때인가? 친구들이랑 명동예술극장에 놀러갔는데 거기서 누가 피아노 리사이틀을 하더라고. 그래서 애들은 보내고 나 혼자 그걸 보겠다고 갔어요. 거금을 들여서. 그런데 공연을 보면서 음악에 대한 그리움뭐 이런 게 갑자기 터진 거죠. 이게 굉장히 격하게 올라왔어요. 그리고 집에 와서 어머니께 음악을 하겠다고 상의를 한 거죠. 어머니는 당연히 안된다고 하시지. 그래서 한 달간 밥을 안 먹었어요.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은 안먹고 배고프니까 가게에 가서 몰래 먹고. 그래서 결국은 허락을 받아냈어요. 그냥 음악이 하고 싶었어요.

당시 아버지 반응까지 살필 여유는 없었고, 아버지는 아마 니가 좋으면 해라그러셨을 거예요. 워낙 음악을 좋아하시고 그러셔서. 그런데 레슨비나 이런 것도 결국은 아버지가 주시는 거였으니 아버지가 허락을 하신거지.

작곡은 정우현 선생님께 배웠어요. 정우현 선생은 제자에 흡족해 하는 면이 있었어요. 선생님이 잘한다 잘한다 그래서 진짜 잘하는 줄 알았지. 그때 처음으로 테마 작곡하는 거 그 정도를 배웠어요. 피아노곡 같은거. 그 당시 예고 작곡과에 들어갈 때는 많은 과목이 필요하지 않았거든요. 굉장히 옛날이라 지금처럼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아마 시험이 주제(theme)작곡, 단선율 작곡이랑 화성법 정도였을 거예요. 음악이론하고.

 

그 매력은 어떻게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팀파니를 처음 샀어요. 그 전에는 빌려 쓰다가 사게 되었는데, 정우현 선생님께서 작곡하는 사람은 악기에 대한 경험도 풍부해야 되니까 한번 해보지 않을래?” 하셔서 그때 악기를 처음 접하고 시작을 하게 된거죠. 정우현 선생님이 은인이지.

거의 모든 타악기 주자가 그렇듯이 정말 그 매력은 어떻게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진짜 무대 처음 섰을 때 떨리기도 했지만, 뿌듯했고. 모든 시선이 나한테 오고 그런 것이 너무 좋았어요. 설레고, 내가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아 이게 연주고, 음악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처음에는 무조건 악기를 주고 하라고 하니까 지적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그걸 벗어나기 위해서는 노력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지휘자 선생님이 못하면 막 야단치고 그러잖아요. 처음에는 지휘자 선생님의 지적으로부터 탈피하고 싶었고. 지적을 안 받으려면 연습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타악기의 길로 빠져들게 된 첫 단계는 도전이죠 뭐. 나와의 싸움,

최동수 선생님이라고 옛 KBS팀파니 수석이셨던 분이 나 때문에 예고 강사로 나오셨어요. 선생님이 참 좋으셨어요. 그 당시에는 담배를 반으로 잘라 피실 정도로 여건이 어려웠어요. 그런데도 자상하게 아주 잘 가르쳐 주셨죠. 그렇게 한 1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연주도 되고 그러니까 마음이 타악기로 기울어졌어요. 그래도 작곡 전공에서 타악기로 바꿀 수 없었던 게 대학교에 타악기 전공이 없었어요. 그래서 두 가지 전공을 병행했는데 마음은 타악기 쪽으로 가 있었죠.

강당에 악기가 비치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수업도 있고 또 시설들이 있었기 때문에 잘 열어주질 않았어요. 그래서 연습 장소가 필요해서 팀파니를 끌고 옥상으로 올라갔죠. 예고 계단이 경사져 있었거든요. 혼자서 끌고 올라 갈 수 있어서 옥상에서 연습을 하는데 그 소리가 아마 미술과, 거기 공터에 옛날에 있었던 조소과에 들렸나 봐요. 선생님이 올라와서 귀 잡아당기고. 너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구냐고. 그 선생님이 아마 은퇴하신지 10, 15년 되셨을 거예요. 팀파니 스틱이 닳을까봐 활케이스 같은 데에다 분해를 해서 집어넣고 가지고 다닌 기억도 있어요. 또 어린 생각에 팀파니 윗면이 가죽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그 위에 플라스틱을 칼로 오릴 뻔한 적도 있었죠.

떠올려보면 정말 독을 품고 연습을 하게 된 것은, 같이 학교 다니던 김덕기 선생이 베토벤 <1번 교향곡> 하는 것을 본 이후부터예요. 김덕기 선생은 음악가 집안 출신이다 보니 <1번 교향곡>에 대해 많이 들었을 거고, 그래서인지 그 곡을 완전히 꿰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보다 팀파니를 더 잘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팀파니라는 게 뭐냐면, 예전에는 콘트라베이스 주자가 팀파니 연주를 했을 정도로 주법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음악에 대한 식견이 필요한 악기거든요. 테크닉보다는 곡 전체를 파악해야 하는 음악적 소양이 중요한 거죠. 당시 김덕기 선생은 음악의 진행을 아니까 놓치지 않고 칠 수 있었던 거예요. 그걸 보고 어린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어요. 그 다음부터 죽어라 연습을 한거지.

그렇게 스코어라고 하는 작은 핸드북을 거의 다 외우다시피 하면서 <1번 교향곡>을 공부했어요. 사실 학교 오케스트라는 레퍼토리가 뻔한 면이 있는데, 그래도 가장 집중도 있게 처음 연습해 보았던 곡이 <1번 교향곡> 이었어요. 그리고 가장 어려웠던 곡으로는 고3때 했던 그리그 <피아노 콘체르토 1>이 기억나요. 이 곡은 롤이 안 되면 할 수가 없거든요. 특히 양손을 똑같이 사용하는 롤은 초보자한테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서울대학교 작곡과 입학과 국립교향악단 입단

그렇게 고등학교를 지내고 작곡 입시를 해서 서울대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제 작곡 지도선생이셨던 김용진 선생님이 나 때문에 속을 많이 썩었어요. 학교에 타악기 하는 사람이 하나 들어오니 경사가 난 거예요. 막 여기저기에서 작품연주 해달라고 할 때마다 그거 쫒아 다니느라 곡을 쓸 시간이 없었어요. 끝나고는 술도 먹어야하고. 레슨 시간에는 맨날 도망 다니고 커리큘럼에 있는 곡을 겨우겨우 써서 통과하고 그랬어요. 내 졸업연주를 위해 타악기 앙상블 곡을 쓴 적도 있었는데 후에 그 악보를 없앴어요. 내가 굉장히 내성적이라 스스로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겨두고 싶지가 않거든. 타악기 편성이 있는 곡이라면 창악회, 미래악회를 막론하고 다녔고, 한양대, 연대 같은 다른 학교 작품발표도 다 다녔어요. 페이는 따로 없었어요. 교내연주는 그냥 다같이 막걸리 마시고 그랬죠. 72년도면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못살때거든.

그러다 73,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서울대에 타악기 전공이 처음 생기고 미국에서 활동하시던 박동욱 선생님을 모시고 왔어요. 박동욱 선생님 엄격하셨죠. 선생님 덕분에 스네어 드럼도 접하고 건반악기도 접하게 되었어요. 훌륭한 분이세요. 미국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계셨는데 거기 생활을 다 버리고 오셨어요. 음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세요. 작품도 많이 남기셨고.

박동욱 선생님은 국립교향악단에 계시면서 네가 와서 연주 좀 해라하시면서 국립교향악단이니 서울시향이니 매번 타악기 주자가 필요할 때마다 저를 불렀어요. 그러다가 선생님이 원서를 내라고 하셔서 국립교향악단 단원이 된 거죠. 그때가 대학교 3학년 때인 74년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성적증명서를 떼기가 싫은 게, 학교 다닐 때 너무 바빠서 수업을 나가기가 힘들었어요. 그래도 그 당시에는 국립교향악단이 오전만 출근을 했고 오후에는 별로 일이 없었어요. 데모 덕도 많이 봤죠. 그 때 휴교도 많이 하고 그럴 때니까.

같이 놀던 그룹에 친구가 서너 명 있었어요. 그 중 하나가 최우일이라고. 첼로를 하는 친구였는데 굉장히 잘하고 특이했어요. 내가 위에서 연주하고 있으면 우리 애들은 밑에서 술을 먹고 있어요. 그러면 저는 돈 벌다가 내려가서 술값 내주고 다 같이 마시고.

 

화려한 음악들, 브뤼셀

직장하고 학교하고 병행하다보니 제가 졸업이 좀 늦어요. 그래도 80년도에 졸업하자마자 유학을 갔어요. 사실 처음에는 졸업할 생각이 없었어요. 당시에는 교향악단에 취직하면 졸업장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그랬거든요.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직장을 잡기 위해 대학을 다니는 것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졸업하길 잘했죠.

그때는 유학을 가기 위해 어떤 정보를 구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다들 미국 아니면 독일로 유학을 가던 때였는데 박일경이라는 작곡과 선배가 벨기에에서 공부하고 있었어요. 그 분과 편지왕래를 했죠. 선배가 여기에 오지 않을래? 여기 괜찮은 학교가 있으니까 와라라고 권유하셨어요. 곧 테잎을 보내 브뤼셀 학교에서 오케이가 되어 유학을 가게 되었어요. 사실 제가 굉장히 즉흥적인 면이 많아요. 유학을 떠날 때에는 언어 같은 것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유학을 나가 보니 내가 생각했던 시스템과 많이 달랐어요. 브뤼셀은 쁘띠빠리라고 불릴 정도로 모든 시스템을 파리에서 가져오잖아요? 그 영향 때문인지 거기에서 접하는 곡들 상당수가 현대적이고 솔로를 중시하는 스타일이었어요. 한국에서도 현대음악 앙상블을 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유럽 쪽이 훨씬 더 현대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참 우스운 게, 그때 참 많은 악보를 샀는데 요즘은 그 곡들을 연주를 거의 안해요. 이게 주로 콩쿨을 위한 곡, 졸업연주를 위한 곡, 테스트를 위한 곡들인데, 보통 팀파니로 시작을 해서 밧데리로 끝나는, 다양한 요소가 15분 정도의 한곡으로 쭉 연결이 되어 있는 것들이에요.

유학 가 있는 4년 동안 무척 열심히 했어요. 아침에 연습 가서 저녁에 나오고, 그리고 저녁엔 펍에 들려 맥주한잔하고 집에 가는. 단순한 삶의 연속이었죠. 그래도 벨기에 방송교향악단도 보고, 시카고 심포니도 보고 콘세르트허바우도 보고 그랬어요. 생각해보면 그 때 참 어려웠던 곡이 하나 있었는데 폴 크레스톤의 <마림바를 위한 콘체르티노>(Concerto for Marimba)예요. 요즘은 초등학생도 하는 곡이 되었지만요.

 

소리에 대한 탐구, 암스테르담

어느 날 벨기에 우리학교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연주를 갔던 때가 있었어요. 거기에서 얀 퓨스첸이라고 당시 콘세르트허바우 수석주자를 만났는데 그 분이 제가 심벌치는 모습을 보더니 너 나랑 공부하지 않을래?”라고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어드밴스트 코스를 암스테르담에서 밟게 되요. 나중에 생각하면 벨기에에서의 3년보다 암스테르담에서의 1년이 더 중요했달까? 벨기에에서는 솔로를 많이 공부했다면 암스테르담에서는 오케스트라 공부를 많이 했어요.

암스테르담에서 얀 라보르두스 선생님과 베토벤 <7번 교향곡>을 공부했던 것도 기억에 나요. 선생님께서 소리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셨거든요. 30분정도 레슨을 받으면 처음부터 끝가지 소리에 대한 말씀만 하세요. 그때 진짜 많이 느꼈어요. 얀 라보르두스 선생님 이외에도 얀 퓨스첸이나 피터 프롬멜에게도 정말 많이 배웠어요. 결국 유학의 후반부를 암스테르담에서 공부하면서 다시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게 된거죠.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인 게, 제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잘 풀렸어요.

 

귀국

유학 가 있는 동안 부모님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비를 계속 보내주셨어요. 그런데 더 이상은 그러면 안되겠더라고요. 사실 너 언제 끝나니? 빨리 좀 왔으면 좋겠다는 연락도 있었어요. 귀국하면 시향 같은 단체에서 직장을 주겠다는 말도 있었고요. 타악기 연주자가 당시 워낙 드물기도 했고요. 그래서 85년도에 귀국을 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유튜브가 아마 없었죠? 그래서 그때는 지금과 다르게 경험하고 온 사람’, 이걸 굉장히 높게 샀어요. 다들 외국의 시스템이나 이런 것을 궁금해 했거든요.

귀국해보니 한국의 타악기 전공 학교들은 박동욱 선생님께서 거의 다 맡고 계셨어요. 서울대, 한대, 이대, 추계 등등. 그런데 선생님께서 다 하실 수가 없으니까 조금씩 강의를 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얼마 후 박동욱 선생님께서 미국으로 다시 유학을 가셨는데, 그때 선생님 대신 서울대에 처음 출강하게 되요. 그 당시 서울대에서 타악기 가르쳤던 학생들이 다 잘했죠. 그때는 참 정보 같은 것도 없고 그랬는데 밤늦게까지 열심히들 했어요. 지금은 그 제자들이 교향악단에서 수석 및 단원으로 지내고 있어요. 그렇게 학교와 악단을 병행하면서 악단에만 16년을 있었어요.

 

서울대학교 타악기 앙상블 1회 연주, 그리고 4plus의 창단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연주가 몇 개 있어요. 그 중 하나가 79년도 국립교향악단 순회공연이었는데, 박동욱 선생님의 관현악과 타악기를 위한 <대비>’20회나 연주했어요. 이 작품에 5인의 타악기가 등장하는데 그 짐을 20번 풀었다 쌌다 한 거예요. 또 기억에 남는 연주로는 72년도에 봤던 스트라스부르그 타악기 앙상블이 있어요. 일본작곡가 요시로 타이라의 <히에로포니 V>라는 곡을 했는데, 처음 보는 악기도 너무 많았고 굉장히 충격적이었어요. 그때는 공연장도 없어서 KBS스튜디오에서 연주를 했었죠.

유학시절 접했던 콘세르트허바우 정기연주회도 너무 좋았어요. 제가 콘세르트허바우의 선생님께 배워서 그런지 몰라도 선생님이 들려주셨던 남다른 음색도 인상 깊었고, 배우는 도중에 갔던 음악회여서인지 더 기억에 남아요. 극장 자체도 감동적이었고요.

그런데 이런 수많은 연주를 제치고 제가 1순위로 꼽고 싶은 연주회가 서울대학교 타악기 앙상블 1공연이에요. 뿌듯하잖아요? 학생들이 연주도 잘하고 열심히 하고. 2003년 정도부터 시작을 해서 계속 공연을 했어요. 젊은 학생들하고 만든 공연이었다는 것도 기억에 남는 이유죠.

그러다가 어떤 모임에서인가 우리도 앙상블 단체를 하나 가질 때가 됐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타악기 앙상블 4plus를 시작한 거예요. 그땐 악기도 없고 그래서 제 스튜디오에서 연습해서 첫 무대를 올렸죠. 모든 타악기 앙상블이 그렇겠지만 장소와 악기가 문제거든요. 이것에 맞춰 레퍼토리가 제한되는 어려움이 있죠. 나중에 학교에 자리 잡은 다음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레퍼토리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어요.

 

타악기 주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

소음으로 음악을 만드는 감각, 이게 가장 중요해요. 감각이란 것이 훈련되고 교육되는 것이아니기도 하고, 일단 그런 자질을 갖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사실 이 자질이란 것이 소리에 대한 감각이에요. 예를 들면 트라이앵글을 쳐도 곡에 따라 바꿔가며 쳐야 하거든요. 어떤 동물적 감각?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해요.

차라리 음정이 있으면 음정을 맞추면 되는데, 이건 음정의 문제가 아니에요. 특정 맥락에 딱 들어맞는, 튜닝되지 않는 그 미세한 무언가를 분간하는 능력. 전 이걸 톤피치라고 이야기해요. 말하자면 톤피치를 찾아낼 수 있는 감각이 있어야 하는거죠. 물론 타악기 주자의 가장 중요한 것은 리듬이고, 음감이겠지만, 타악기 주자의 마지막은 톤피치를 구별해 낼 수 있는 감각이에요.

타악기 주자라면 유독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하는 것도 있어요. 어떤 곡을 연주할 때 모든 파트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하거든요. 예를 들어 트럼펫이 더블텅잉을 하면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쳐 춰야 그것에 맞는 아티큘레이션이 나와요.

여기에 또 한 가지 덕목을 추가하자면, 그건 겸손함이에요. 오케스트라에서 타악기의 역할은 데코레이션과 같아요. 케이크를 만든다고 할 때, 현악기가 빵이고 거기에 바르는 생크림이 목관과 금관이라면, 그 위에 추가되는 데코레이션이 타악기예요. 이 데코가 너무 화려해도 케이크 자체가 촌스러워지기에, 이게 적당히 있어야 해요. 항상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자기혼자 잘났다고 크게 치지 말아야 하죠. 그럼 밸런스가 망가지거든. 물론 오케스트라 주자와 솔로주자의 차이는 있어요. 솔로주자가 본인을 어필하려면 기발한 발상과 더불어 더 돋보이는 기법이 필요해요.

 

61일 공연의 <세헤라자데 교향적 모음곡> 관악합주 편곡버전에 대해

다른 사람이 찬성할지는 모르겠어요. 관악기가 바람을 불어넣어서 연주를 하다보니까 프레이즈가 자꾸 뚝뚝 끊기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아요. 살아야 하니까 숨을 쉬어야 되고, 숨이 모자라면 나오는 어떤 습관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여태까지는 관악기를 위한 오리지널 작품을 연주했는데, 이번만큼은 비록 관악기로 연주되지만 오케스트라의 음색과 음향을 낼 수 있는 작품을 시도해보고 싶었어요. 앞으로 기회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평소에 못해본 것을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게 참 조심스러운 얘기인 게, 다른 관악기 주자들이 볼 때에 이건 제 생각일 뿐이고, 관악기는 관악기다운 곡을 연주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어요. 그럼 저로서는 할 말이 없는 거죠.

 

「음악춘추」, 274호, 2018년 6월, (2018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