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키무키만만수와 새로운 시대의 민중가요, 그 둘 모두의 탄생

2012. 8. 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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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광화문사거리 앞 촛불집회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이 비장한 곡은 1980년대에 불릴 법 할 노래이지, 2000년대에 불릴 노래는 아니었다. 그날 386세대는 노래를 부르며 ‘1980년대의 혁명적 낭만주의’ 1)와 자신들의 젊음, 그리고 히트 민중가요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젊은 세대를 소외시켰다.

1980년대 이전 권위주의 시절의 시위가 대학생들과 노동자층에 의해 주도되었고 반정부 투쟁 형태를 띠었다면 1980년 이후의 시위는 사회적 약자인 농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2) 그리고 이 집회, 시위 현장에서는 늘 노래가 함께 불렸다. 1970년대에는 ‘포크 음악’이 그리고 1980년대 초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는 대학생, 지식인, 노동자, 농민 등이 주체가 되어 만든 ‘민중가요’ 혹은 ‘노동가요’들이 활발히 작곡되고 불렸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변화가 일어난다. 과거에 비해 민주화된 사회 분위기는 시위 횟수의 절대적인 하락을 가져왔고, 그 가운데 민중가요도 점점 힘을 잃게 된 것이다. 특히 2000년대 이후에 들어서 민중가요는 그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고사하였다. 이 시기 민중가요는 과거의 히트곡들을 반복해 부르곤 했으며 매너리즘에 빠진 듯이 보였다. 평론가 신현준은 “1980년대 남한이라는 환경에서 민중가요가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자라고 가지를 치기는 했지만 (그 뒤를 이어서) 꽃을 활짝 피우지는 못한 것 같다.” 3)라고 말한다. 동시에 민중가요는 대중음악연구에서 소외되었으며, 단지 운동권의 노래라는 한정된 범주로만 간략히 취급되었다.4) 

그러나 2000년대에도 시위와 집회는 형식과 주제, 세대를 달리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촛불 시위’를 비롯해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전면수입 반대 촛불 시위’ 등 사회적 정의와 공익을 위한 시위들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나타났다.5) 그리고 더 최근에는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 등에 기반한 다양한 경향의 시위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제 시위는 점점 그 종류와 쟁취하려는 바를 확장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최근 시위 현장에서는 어떤 노래가 울려 퍼지는가? 여전히 과거에 만들어진 노래들을 부르고 있는가? 고사하였다던 민중가요는 여전히 작곡되고 있는 것일까? 1980년대의 ‘민주화 투쟁’과 2012년의 ‘잡년행동’ 야한 옷차림과 늦은 귀가 등이 강간의 원인으로 지적되는 성범죄의 불합리한 정당화에 대한 반(反)성폭력 운동은 같은 방식으로 음악을 사용하는가?

분명한 것은 최근 거리의 음악들이 그 스타일과 방식에 있어서 새로운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 같은 흐름이 시작된 것은 2000년대 초반 등장한 문화제 형식의 다양한 집회에서부터이며, 이 흐름은 상대적으로 더 ‘최신’의 집회나 시위와 함께 더 많이 발견되고 있다. 실제로 여성주의와 생태주의 관련 집회에서는 플래쉬몹이나 음악 퍼포먼스, 그리고 랩이 등장한다. 물론 통일, 노동 등의 주제를 이야기하는 집회 현장에서도 새로운 흐름은 일고 있다. 2012년 7월에 대한문 앞에서 열린 쌍용차 집회에서는 두 개의 무대가 설치되고 전통적인 음악과 새로운 음악이 동시에 등장하기도 했다.

이 글은 집회와 시위현장의 ‘새로운’ 음악을 추적하는 장치로 ‘무키무키만만수’라는 팀을 살펴본다. 2011년 여름 결성된 무키무키만만수는 지난 1년간 ‘거리’에서 자라났다. 주목할 점은 이 무키무키만만수의 1년 동안의 ‘탄생 과정’이 집회, 시위현장의 새로운 음악이 대중들 앞에 본격적으로 ‘커밍아웃’하는 과정과 비슷했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대의 민중가요는 무키무키만만수(이하 뭌만)라는 구체적 ‘상(像)’을 가지게 됨으로써 실체를 가지게 된 것이다.

뭌만이 이 ‘새로움’의 구체적 실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몇몇 키워드를 관통하고 있어서다. 먼저, 뭌만은 ‘거리’라는 매체를 기반으로 한 팀이며, 이들의 음악은 거리와 연대함으로써 음악적 새로움을 쟁취한다. 이는 일반적인 록음악과 대중음악이 레코딩과 공연장이라는 매체에 종속되어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둘째로, 뭌만의 음악은 최근 인디씬의 새로운 경향을 대변한다. 이 경향은 운동권 외부의 음악가들이 노래 운동을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즉 인디음악과 민중가요가 같은 영토를 공유하는 지점에 뭌만이 위치한다. 마지막으로, 뭌만이 재현하는 이미지는 수동적인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아닌, 행위를 하는, 즉 길거리에서 ‘악 지르는’ 여성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의 재현에 있어 거리라는 장소는 중요하다. 지금까지 ‘소리를 지르는 여고생’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는 여고생은 없었기 때문이다.

 

거리 위 사운드

뭌만과 민중가요를 연결할 원초적이고 가장 확실한 끈은 뭌만이 ‘거리’ 태생이라는 점이다. 뭌만은 2011년 5월 13일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내 동아리에서 주최한 작은 음악회를 위해 결성된 팀이다. 이 음악회의 이름은 ‘쓰레빠 음악회’였으며, “해가 지는 초저녁에 쓰레빠 신고 마실 나오듯 놀러 나와… (중략)… 놀자”라는 의도가 있었다. 기획자들은 학교 주변 지하철 출구 앞 공터를 소박한 문화공간으로 이용하길 원했으며,6) 이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들은 음악회가 너무 소란스러우면 공무원이나 지역 주민과의 마찰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일반적인 밴드 사운드가 아닌 ‘어쿠스틱’ 스타일로 공연의 전체 사운드 규모를 결정하고 뭌만을 비롯한 하헌진, 회기동 단편선, 이류, 악어들 등의 라인업을 짜게 된다.7) 그렇게 신이문역 1번 출구 앞의 고가도로 밑 공터에서 노점상과 상가로 둘러싸인 채 뭌만의 첫 공연이 이루어진다.

<쓰레빠 음악회>에서의 음향은 ‘너무 크지 않은’ 정도로 요구되었기 때문에, 뭌만은 이에 맞추어서 그들의 악기를 만들게 된다. 무키가 들고 나온 타악기는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축소된 드럼 세트와 흡사한 것이었다. ‘구장구장’이라 이름 붙여진 이 악기는 장구를 세워놓고 드럼의 하이햇과 발 베이스를 달아 소리를 냈으며, 뭉툭한 질감과 최소한의 음량으로 가장 기본적인 비트를 연주한다. 빗속에서 공연을 하거나, 음향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오로지 악기를 연주하는 무키의 괴상한 발짓만으로 존재감이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 뭉툭한 타악기의 질감 위에 서로 다른 음색을 지닌 무키와 만수의 목소리가 더해진다. 무키와 만수는 확연히 구별되는 서로 다른 음색을 가졌다. 이 두 음색은 서로 중첩되며 섞인다. 노래 부르며 비명 지르고, 비명 지르며 중얼거리고, 중얼거리며 추임새를 넣는다. 이를 통해 어쿠스틱 사운드와 여성목소리 그리고 통기타 한 대가 낼 수 있는 최대 음량은 거리의 열악한 앰프시스템을 터트릴 정도로 증폭되며, 단조로운 기타와 타악기 반주는 풍부한 층을 갖는 다채로운 음향으로 둘러싸인다.

마지막으로, 평범하지 않은 인성과 타악기를 일반적인 ‘음악’의 범주로 묶는 것은 기타 사운드이다. 여기에서 기타는 단순한 화성진행을 끊임없이 스트로크 하면서 모든 요소를 푹 담그는 작은 ‘풀(Pool)’이 된다. 한편 기타의 화음진행은 곡의 스타일에 따라 몇몇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단연 돋보이는 부류는 <안드로메다> 그리고 <투쟁과 다이어트>에서 보이는 형태이다. 이 곡들은 원코드 진행을 기반으로 하며 일반적인 가요에서의 B부분이 부재하거나 최소한의 형태로 존재한다. 동시에 이 음악들은 예고 없이 어느 순간 갑자기 끝나버린다.

이 음악들 안에 흐르는 시간은 기승전결보다는 ‘정지된 시간’ 혹은 ‘영원히 돌고 도는’ 시간과 흡사하다. 음악 내적인 논리성보다 그 음악 사운드 자체가 마치 스냅사진처럼 기억되는 것이다. 사운드는 연신 밟고 쳐대는 구장구장과 목소리들, 그리고 흡사 달리기하듯 쉬지 않고 스트로크 하는 기타와 함께 순간적으로 밀려들어온다. 이때 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이 음악을 중간부터 들어도, 혹은 앞부분을 듣다가 중간에 자리를 떠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마치 굿 음악이 그렇듯 이 음악은 특정 장소 위에 펼쳐지는 초시간적인 ‘의식’이 된다.

한편 이들은 공연의 사운드 발란스가 정확히 맞지 않았다고 해서 불평하지 않는다. 매번 구장구장을 들고 다니며 발 베이스를 설치하거나, 드럼 비트를 장구에 치는 행위, 새벽 3시에 집회현장에서 공연하는 행위 그 자체는 매뉴얼화 된 좋은 사운드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팀들이 거리에 나왔을 때 열악한 음향상태 때문에 당황해 하고, 어느 정도 자신들의 음악적 아이디어가 포기될 것을 각오하는 행위와는 반대이다.

그렇게 거리라는 매체를 위한 이들의 음악은 사운드적인 측면에서 여타 다른 음악들과 구별된다. 한국의 거의 모든 밴드는 그들 음악의 완성된 형태를 레코딩 부스와 공연장 음향을 기준으로 맞추지만, 뭌만은 그렇지 않다. 뭌만의 레코딩은 그들 음악의 야생성을 해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루어졌으며, 거리에서의 공연 레퍼토리들을 고스란히 모아 ‘후에’ 레코딩 되었다. 즉 거리에서의 느낌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레코딩이 이루어졌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간혹 테이프에 녹음된 조악한 음향의 민중가요를 들으며 지하 노래방의 쾨쾨한 냄새를 맡은 적이 있다. 테크노로 뿅 뿅 거리는 여느 민중가요에서는 촌스러운 고속도로 뽕짝이 떠오른다. 하지만 뭌만의 음악은 그 안에 ‘거리’를 담고 있다.

 

새로운 씬과 아마추어리즘

그렇다면 뭌만은 실제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어떤 음악가들과 연대하고 있을까? 물론 현장에는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가진 다양한 타입의 음악가가 혼재되어 있다. 하지만 최근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눈에 띄는 풍경은 과거와는 달리 민중가요와 인디음악 둘 다의 정체성을 공유하는 음악가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한국에서 1세대 인디는 1990년대 중반 펑크나 그런지를 기반으로 하고 홍대 앞 라이브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음악가들을 일컫는다. 평론가 김작가는 이들은 ‘태도’로서의 인디라 분류하며, 이어지는 2세대 인디와 구별한다. 이어지는 2세대 인디는 ‘취향으로써의 인디’로, 20대 여성과 어쿠스틱 계열 음악이 주를 이루는 모던록으로 대변된다.8) “1990년대 인디씬을 상징하는 단어가 ‘반항’, ‘분노’였다면, 이즈음부터 ‘일상’, ‘서정’ 등의 단어가 그 자리를 대체” 9)하게 된 것이다.

한편 이 ‘취향’ 으로써의 인디는 2010년 5월 1일, 홍대 앞 두리반 칼국수 건물 철거 투쟁현장에서 열린 <51+> 공연을 통해 다시 ‘태도’로써의 음악10)으로 갈라져 나온다. 이들이 바로 최근 집회 현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인디 중의 인디’ 11) 즉 이 글에서 말하는 ‘새로운 인디씬’이다. 이들은 스스로 ‘자립음악생산조합’이라는 기구를 만들고 연대하며, 예술가들의 최소생계 보장, 공정한 음원 유통 시스템, 그리고 합리적으로 공연할 수 있는 공연장을 요구한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위한 세미나와 포럼을 열고, 자본이 잠식해버린 홍대라는 공간을 벗어나 석관동 ‘대공분실’, 문래동 ‘로라이즈’, 이태원 ‘꽃땅’이라는 공간을 개척한다. 이들의 고민은 기존의 사회적 활동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정치적이며, 과격한 텍스트를 이용해 결벽증적으로 정치에 괴리되어 있던 기존 인디와 대중음악계에 충격을 던지기도 한다. 이 부류의 유명한 밴드 ‘밤섬해적단’은 “북괴의 지령이 내려졌다! 복지예산 확충하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북괴의 지령>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중요한 지점은, 이 새로운 인디씬이 홍대 미화노동자 투쟁 지지, 명동의 카페 마리 철거 반대, 한진중공업 관련 희망버스 지지12) 등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 연대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점점 더 과거 민중가요가 담당했던 집회, 시위현장에서의 음악을 담당하고 있다. 동시에 이들이 등장하는 집회, 시위 현장은 과거처럼 음악이 시위의 일방적 도구가 되기보다는 좀 더 새로운 모습을 띈다. 예를 들어 음악가 ‘야마가타 트윅스터’는 ‘두물머리 철거 저지 집회’ 13)에 등장해 전체 집회를 하나의 ‘퍼포먼스’로 바꾸어 버린다. 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함께 춤을 추고 행진하면서 음악을 이용한 정치적 퍼포먼스에 참여하며, 음악은 집회의 ‘들러리’에서 모든 것을 주도하는 ‘주인공’으로 그 역할이 바뀐다.

또한 자립음악생산조합과 딱히 연관되어 있지 않더라도, 스스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음악가들도 상당히 많아졌다. 이들이 만드는 음악은 과거 민중가요와는 좀 다른 맥락에 위치한다. 과거 민중가요들이 소수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져 대규모로 불렸다면 이 새로운 흐름은 아마추어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개인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낸다. 이들은 “사회 문제를 이야기하고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을 때, 제게는 노래가 가장 분명하고 쉬운 표현 방법입니다” 14)라고 이야기한다. 집회, 시위 현장에서 ‘남이 만든’ 노래를 ‘배워서’ 따라 부르는 수동적인 민중이 아닌, ‘스스로’ 느끼는 바를 구호가 아닌 음악으로 ‘만들어’ 부르는 것이다. 이 경우 과거 일었던 민중가요 음악의 음악성 논쟁을 잠식시킬 수 있다는 점에 있어 고무적이다. 개인이 내는 다양한 목소리로써의 음악은 ‘완성도’라는 미학적 잣대보다는, 얼마나 폭넓고 다양한 이야기를 하는지, 그리고 대중이 스스로 이야기를 한다는 그 행위 자체로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멍구밴드’는 “누구나 인권과 사회에 관심 가져야” 15) 한다고 이야기하며, 장애인 노래패 ‘시선’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의 시선을 깨기 위해 스스로 거리에 나선다.16) 제주 강정마을 활동가로 구성된 ‘신짜꽃밴’의 활동도 비슷한 맥락에 위치한다.

한편, 이 밴드들의 활동에서 발견되는 ‘아마추어리즘’이라는 키워드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이 개념은 ‘거리’ 위에서 작동할 때 이 뜻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부정적인 의미를 상쇄시키고, 대신 ‘진정성’이라는 훌륭한 키워드로 거듭난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요즘 시대가 제공하는 음악의 하드웨어적인 풍부함(장비, 연습실)과 소프트웨어적인 풍부함(음악성, 표현욕)을 바탕으로 한다.

중요한 점은, 이 ‘아마추어리즘’의 바탕을 이루는 자연스러운 음악성이 서양음악의 자기화 과정 이후 일반화된 현상이라는 점이다. 이전까지의 한국 록음악은 “록 뮤지션의 상당수가 영-미권 음악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서 성장” 17)하는 모습을 보여 왔지만, 2012년도에 음악을 듣고 향유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비틀스와 김창완을 동일 선상에서 이해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제 ‘기타연주’라는 행위는 빽판불법LP음반 속의 ‘신비한’ 서구인의 모습에서가 아닌, 남편, 친아버지, 고등학생 아들이 수시로 연주하는 기타 소리에 의해서 익숙해진다. 우리가 모두 국악적 스펙트럼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만큼, 그리고 우리의 사운드스케이프가 언젠가부터 서양음악 어법으로 가득 찼던 것만큼,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타의 C코드를 짚으며 우리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아마추어리즘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던록’의 ‘서양적’ 감성은, 오히려 사물놀이패의 웃다리 풍물보다 더 순수할 수 있는 지점을 가진다. 드디어, 지금 거리에 모인 우리들이야 말로, ‘펑크’를 하며 시위를 할 수 있는 면죄부를 받은 셈이다.

그리고 뭌만이 위치하는 지점은 이 모든 흐름의 한가운데이다. 이들은 ‘펑크’ 혹은 ‘포크’의 외형을 가진 아마추어리즘에 기반을 둔 음악을 한다. 동시에 이들은 홍대 밖 영토라 일컬어지는 새로운 공간에 출몰하며, 이들이 함께 공연하는 밴드들은 상당 부분 자립음악생산조합과 연관되어 있다. 또한, 뭌만이 던지는 정치적 텍스트는 누군가를 선동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개인적인 발언에 가깝다. 우리는 거리에서 뭌만의 음악을 듣고 ‘주입 당하기’보다는 자유롭게 따라 부르고, 춤을 추거나 동영상을 촬영한다. 그리고 우리는 뭌만의 음악에 ‘경도’ 당하기보다는, 그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방식을 ‘본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또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우리가’ 뭌만을 보는 행위에 관해서다. 이 장에서 다루어진 수많은 자립음악생산조합과 관련된 밴드들, 그리고 수많은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밴드 중에 왜 하필 뭌만이 새로운 음악의 키워드가 되었는가? 왜 악어들이나 회기동 단편선이 아니라 뭌만인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이어지는 장에서는 뭌만이 재현하는 ‘이미지’에서 그 답을 찾는다. 뭌만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성’의 타입을 거리에서 재현함으로써 모두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 점은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비판 받아야 한다.

 

거리에서 악 지르는 소녀

뭌만이 재현하는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이전까지 민중가요와 대중음악이 ‘여성’을 어떻게 재현해 왔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뭌만의 이미지가 강렬하고 신선한 까닭은, 이제까지의 여성 이미지가 너무도 천편일률적이고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민중가요에서 발견되는 ‘여성’은 주로 텍스트 안에 있는 ‘누나’, ‘어머니’ 혹은 ‘동지’라는 지위로 드러난다. 이들은 모두 보호의 대상이며, 운동의 ‘주체’인 남성이 열성적으로 투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좌한다. 이 같은 모습은 민중가요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데, 이는 민중가요라는 노래형식이 애초에 ‘집단적’으로 불리는 ‘선전선동’ 기능을 따랐기 때문이다.18) 즉 지금까지의 민중가요는 그 ‘집단 가창’의 한계 때문에 다양한 주체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았었다.

한편 대중음악에서 드러나는 ‘여성’은 그 육체가 강조되며 성적 대상으로서 그려진다. 이것은 최근 새롭게 등장한 2세대 인디음악에서 볼 수 있는 ‘여신형 가수’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섹시 댄스가수’나 마찬가지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여성’ 음악가의 음악들은 손쉽게 남성적 음악이나 남성 음악가와 대립구도를 이룬다. 앞서 인용했던 ‘1세대 인디의 남성적인 펑크와 2세대 인디의 여성적인 모던록’이라는 표현은 이런 접근의 한 예이다. 또한, 프리스와 맥 로비가 1970년대에 주장한 “록이 남성들에 의해 통제되고 남성적 섹슈얼리티를 표현하기 때문에 남성적” 19)이라는 생각은 2012년의 한국에서 여전히 통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신대철은 “기타는 남자의 악기인데 너는 여자인데도 참 잘하는구나!”라는 발언을 진심으로 쏟아낸다.

이처럼 도식화된 여성의 재현은, 여성 음악가를 바라볼 때 무의식적으로 감내해야만 하는 군더더기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여성 음악가의 노래를 듣고자 할 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관능적인’ 엉덩이를 수도 없이 봐야 하고, 그녀들의 풍성하고 긴 머리카락을 보며 그것이 원래 함의하는 ‘여성적 매력’을 무의식중에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서 뭌만의 이미지는 대중음악과 민중가요 두 진영에 모두 진보적으로 다가온다. 뭌만은 대중들 앞에서 그들이 난생처음 경험하는 복합적인 여성 이미지를 재현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성적이지 않은’ 여성 음악가를 본 적이 없지만, 뭌만은 이 ‘여성성’을 간단히 벗어버린다. ‘여성성’을 벗음으로써 뭌만이 주는 시원함은 마치 ‘오래된 틀니’를 빼버린 듯한 느낌과 비슷하다. 이 ‘벗기’ 행위는 외국에서 유행한 ‘라이옷 걸’ 20)이 과격한 새로운 이미지를 ‘입는’ 것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한편 뭌만에게서는 “소녀들의 투닥임 같은 무성성” 21)이 느껴진다. 뭌만이 가진 생물학적인 젊음은 남성적 판타지로서의 소녀와 일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뭌만이 재현하는 ‘소녀’는 최저임금 이하의 임금으로 패스트푸드점 주방에서 착취당하며, 친구들과 모여 점주를 욕하는 여고생들과 더 닮아 있다.

한발 더 나아가, 이들은 단순히 수동적, 시각적 대상이 아닌 ‘활동’하는 이미지로 재현된다. 수많은 여성 음악가들이 한 장의 사진처럼 다소곳이 정지해 있을 때, 이들은 열심히 땀 흘리고 목 놓아 비명을 지른다. 이렇게 많은 ‘움직임’을 그들의 대표 이미지에 포함한 여성 음악가가 있었던가? 헤비메탈 드럼 주자가 근육이 터져라 투베이스 속주를 할 때, 그 불끈거리는 허벅지 핏줄처럼, 뭌만의 상(像)에는 그런 ‘활동성’이 숨어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미지’는 ‘거리’와 만나면서 증폭된다. ‘거리에서 - 소리 지르며 - 활동하는 - 여고생’은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뭌만을 향해 열광을 보내는 집회 시위 현장은 그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세력의 유입을 기대한다. 이는 뭌만이 재현하는 여성 그리고 뭌만의 젊은 육체가 내포하는 젊은 세대까지를 포함한다.22)

그러나 집회기획자들은 뭌만이 주는 이 매혹적인 이미지를 경계해야 한다. 이 외형은 몇 년 전 촛불집회에 처음으로 교복을 입고 등장했던 여고생이 변신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판타지일 수 있다.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뭌만이 큰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영상매체를 이용한 음악의 전파방식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만약 라디오로만 노래가 전해지는 세상이었으면 뭌만은 지금처럼 매력적인 아이콘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유튜브에 올라가 있는 ‘새벽 5시에 촬영된 영도조선소 앞 대로 공연’ 23)은, 이 앳된 소녀들의 이미지와 함께 너무도 과도한 감동을 준다.

 

결론: 탄생 그 이후

민중가요는 음악 그 자체, 음악을 사용하는 방식, 노래 불리는 방식, 전파되는 방식, 민중가요 씬의 규모나 대중음악과의 연관성 등 다양한 요소에 걸쳐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민중가요’라는 명칭에도 고민이 필요하다.

한편 과거 민중가요는 ‘가사’ 중심의 음악이었지만 새로운 스타일의 민중가요는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한다. 동시에 이 새로운 노래들은 허무맹랑한 가사를 가지는 것이 많다. 이전까지 텍스트에 기대왔던 세대들, 그리고 수동적인 집단 가창 방식에 익숙한 세대들이 이 가벼운 가사를 가진 퍼포먼스를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도 문제이다. 또한, 트위터에서의 요란한 정치적 구호가 실제 대선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처럼 뭌만은 생각보다 인기가 별로 없다. 모든 평론가가 주목하고 트위터에서 많은 이슈를 몰고 다니는 그들이지만 네이버 팬클럽 회원 수는 2012년 8월 13일 현재 단 4명뿐이다.24) 이는 뭌만이 그들이 속한 세대에서 굉장히 소수집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거리에서 집회와 시위를 할 때 우리는 뭌만을 바라보며 우리의 젊은 세대가 뭌만과 같을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생각을 한다. 하지만 실제 20대 초반의 여대생들은 ‘거리’가 아닌 강남역의 ‘어학원’에 출몰한다.

우리는 지난 1년간 뭌만의 탄생과정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들은 탄생에 있어 다른 밴드들과는 구별되는 ‘과정’을 경험했다. 이 경험은 이들이 10센치와 같은 화성을 쓰고, 비슷한 선율 패턴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들 스스로 보다 자유로운 행보를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만든다. 운이 좋으면 우리는 대중음악의 ‘미학’이 ‘자본’으로 수렴하지 않는 다른 케이스를 목격할지도 모른다.

아직은 뭌만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들 음악이 그 자체로는 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이미지의 충격은 곧 걷힐 것이다. 그 안에는 과격한 곡들과 추임새 그리고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음악이 있다. 또한, 이들의 음악은 1990년대의 삐삐밴드가 그랬던 것처럼 키치, 그리고 라이브 음악에서의 퍼포먼스 요소를 도입하고 있으며, 다양한 음악 외적인 활동을 병행한다.

지난 1년간 집회, 시위 현장과 뭌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이제 그 둘은 그대로 교차해 멀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시위대 앞에 더 많은 뭌만이 들어올 공간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주석

1) 정경은, 『한국 현대 민중가요사』, 서정시학, 2008, p.111.

2) 김욱, 「촛불 시위와 한국 시위문화의 변동」, 『한국정당학회보』 제9권 제2호, 한국정당학회, 2010, p.35~36.

3) 신현준, 「지금 민중가요는 무엇으로 사는가」, <황해문화> 제47권, 새얼문화재단, 2005, p.310.

4) 김창남, 「민중가요의 대중음악사적 의의」, 『민족문화총론』 제35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7. p.57~58.

5) 김욱, 앞의 글, p.36.

6) 준하 외, 「석관동의 1년 내내 노는 아이들: 쓰레빠 음악회에 대한 기억들」, 웹진 <시도와 가능성>. 2011.

7) 준하 외, 앞의 글.

8) 김작가, 「한국 인디 음악의 변증법」, <무비위크> 468~469호, 2011.

9) 김작가, 앞의 글.

10) 김작가, 앞의 글.

11) 최지선, 「‘포스트인디’? 인디의 어떤 시도들」, <문화과학> 67호. 문화과학사. p271.

12) 박우진, 「홍대 앞 가난한 음악, 세상 속으로 행진」, <한국일보>. 2012.4.30.

13) 강민수, 「한 손엔 오이 다른 손엔 호박... 세계 최초 유기농 집회」, <오마이뉴스>, 2012.7.18.

14) 박광희, 「현장 노래꾼 송천규씨」, <한국일보>, 2010.11.4.

15) 이종찬, 「음악은 모든 이가 누려야 할 권리다」, <한겨레21> 제869호, 2011.

16) 이철용, 「당당히 장애를 노래하는 장애인노래패 “시선”」, <햇순> 96호, 공동체성서연구원, 2004.

17) 장호연 외, 『오프 더 레코드, 인디 록 파일』, 문학과 지성사, 1999, p.21.

18) 한영옥, 「민중가요에 나타난 여성이미지의 활용과 의미 연구」, 『상허학보』 22호, 상허학회, 2008, p.401~402.

19) Negus Keith, Popular music in Theory: An Introduntion, Wesleyan University Press, 1997, 이중인용.

20) Negus Keith, 앞의 글.

21) 서정민갑, 「참으로 노골적인 아우성 무키무키만만수」. 미디어다음 새로 나온 앨범

(http://music.daum.net/musicbar/musicbar/detail?menu_id=5&board_id=3116)

22) 다수의 집회기획자들은 지난 1년간 집회를 기획할 때 섭외 1순위 가수가 ‘무키무키만만수’라고 말한다.

23) http://www.youtube.com/watch?v=SJdLMzHkIhs

24) 비공식적으로 만들어졌던 이 팬클럽은 현재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플랫폼, 2013년 1·2월호 (통권37호), 2013.1, 22-30.

사진출처: 사직동, 그 가게 blog.naver.com/rogpashop/90128645350